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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뜻이 우주의 뜻이다 | 에스토니아 '민회' 이야기

지난 대국민담화를 통해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이 돌연 태도를 바꿔 수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호위무사에 둘러싸여 버티고, 야당은 내부 갈등을 벌이고 있지만 오히려 국민들은 성숙한 자세로 '퇴진'이라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국민의 힘을 모아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들을 정죄하고 정치개혁으로까지 나아갔던 국민 조직, 에스토니아의 '민회(Rahvakogu)'를 소개합니다. 에스토니아 민회는 제도정치권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국민의 힘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였습니다.

  • 와글(WAGL)
  • 입력 2016.11.18 12:44
  • 수정 2017.11.19 14:12

지난 대국민담화를 통해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이 돌연 태도를 바꿔 수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호위무사에 둘러싸여 버티고, 야당은 내부 갈등을 벌이고 있지만 오히려 국민들은 성숙한 자세로 '퇴진'이라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국민의 힘을 모아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들을 정죄하고 정치개혁으로까지 나아갔던 국민 조직, 에스토니아의 '민회(Rahvakogu)'를 소개합니다. 에스토니아 민회는 제도정치권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국민의 힘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였습니다. 그 작동원리를 살펴보시죠.

'실베르게이트', 대규모 정치 스캔들이 벌어지다

2012년 5월, 에스토니아에서는 정치자금 스캔들이 불거졌습니다. 여당 소속이었던 실베르 메이카 의원은 동료 국회의원들의 불법자금 상납을 폭로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2010년 동료의원에게 출처를 알 수 없는 돈봉투를 받아 이를 당비로 냈으며 이러한 관행이 수년 동안 이어졌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실베르게이트'로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고, 여야 가릴 것 없이 많은 국회의원들이 같은 방식으로 수천만 원의 당비를 낸 것이 확인됐습니다. 혐의가 포착된 사람 중에는 법무장관도 있었습니다. 수사선상에 오른 사람들은 "개인통장에 있던 돈을 냈다", "장모님한테서 빌린 돈이다" 같은 뻔한 핑계를 댔는데, 검찰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을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내부고발을 한 메이카 의원은 당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저널리스트 출신인 실베르 메이카 의원은 정치자금 사건 폭로로 소속 정당인 개혁당에서 제명당한 후, 현재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중입니다. / Wikimedia

정치자금 스캔들이 불거진 직후 에스토니아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에 에스토니아 지식인과 원로들이 '헌장 2012'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에스토니아 민주주의는 우리의 눈 앞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시국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 불법 정치자금 출처 공개

- 정당 운영내역의 투명한 공개

- 국회의원의 대민 의정보고 의무화

- 정당 설립과 무소속 정치인의 진입장벽 완화

- 시민발의 법제화 (국회의 독점적 입법권 완화)

온라인 청원의 형태로 발표된 이 헌장에는 시민 1만7천 명이 서명했습니다. 또 수도 탈린과 제2도시인 타르투스에서는 "정치적 거짓말을 멈춰라"라는 구호의 대규모 집회가 벌어졌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가 보아왔던 시민저항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민회'가 제안되기 전까지는요.

2012년 11월 '거짓말을 멈춰라' 시위에 참여한 에스토니아 시민들 / Rahvuslane

민회, 국가의 문제는 국민이 결정한다

헌장 2012가 발표된 후 에스토니아에서는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문제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사태를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문제를 제공한 만큼, 해결 주체가 국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확했습니다.

이때 에스토니아의 대통령 토마스 일버스(Toomas H. Ilves)가 국회와 풀뿌리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회의를 제안합니다. 에스토니아의 대통령은 한국과 달리 외교 수장 역할만을 수행합니다. 대부분의 국정은 국회에 의해서 결정되죠. 일버스 대통령은 이러한 정치적 '중립성'을 바탕으로, 협동조합, NGO단체, 정당 관계자와 정치전문가를 소집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창고 회의'라고도 불린 이 회의에서 수습 기구로 민회(Rahvakogu)를 꾸려 정치개혁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라흐바코구'라고 읽는 민회는 '시민(Rahva)'과 '회의/모임(Kogu)'에 해당하는 에스토니아어를 합친 말입니다.

창고 회의 이후 사태 해결을 위해 진행된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창고회의'를 통해 사태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민회' 개최 결의

2. 동일한 이름의 온라인 플랫폼과 우편을 모두 활용하는 '참여형 국민제안'으로 국민들의 정치개혁 제안 수렴

3. 공인인증 절차를 거친 에스토니아 국민들이 3주 동안 온라인 플랫폼과 우편으로 2천여 개 아이디어 제안

4.시민단체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2천여 개 제안을 18개 안건으로 정리

5. 2013년 4월 6일에 '토론 기일'을 개최하고, 성, 연령, 지역 안배를 통해 추첨으로 뽑힌 국민대표 550명(실제로는 314명이 참석)이 18개 제안을 검토해 최종적으로 15개 제안이 선정

6. 대통령이 15개 제안을 국회에 입법 발의하여, 이 중 3개가 법안으로 통과되었고 4개는 시행령 등으로 반영

2012년 11월 21일 에스토니아 대통령에 의해 소집된 '창고 회의'의 모습 / Citizen Foundation

민회 온라인 플랫폼에 올라온 시민들의 제안 / 민회 웹사이트 갈무리

이날 토론은 참석자들이 소규모 모둠을 이루어 전문 퍼실리테이터(진행조력자, 아래 사진)와 함께 18개 안건을 논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2013년 4월 6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토론기일(Deliberation Day)'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이 정치개혁 안건을 최종심의하고 있다. /Järva Teataja

에스토니아 민회 프로세스를 요약한 도표, 출처: Democratic Innovations in Deliberative Systems - The Case of the Estonian Citizens' Assembly Process, Magnus E. Jonsson, Örebro University, Sweden, 2015

6개월에 걸친 국민적 논의 과정 끝에 통과된 정치개혁안의 내용은 사태의 원인이 된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높이고, 정치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향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출처불명의 정치자금 운용의 처벌(5번)과 이를 위해 관련 기관의 권한 강화(6번)가 투명성을 높이는 것에 해당하고, 정당 설립에 필요한 최저 당원 숫자 하향(9번), 정당 보조금 하한선 설정(4번), 시민발의 법제화(2번)가 정치적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2016년 한국은?

화상전화 프로그램 '스카이프'가 탄생한 에스토니아는 지난 2015년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하는 국가별 부패지수에서 23위를 기록, 37위 한국보다 훨씬 청렴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 발표된 2016 세계 인터넷 자유지수에서는 아이슬란드와 함께 나란히 세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국민들은 정치적 부패에 민감하고, 인터넷을 통해 여론이 모이고 확산되는 속도가 빠릅니다.

지난 11월 12일 광화문 광장에 모인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

한국은 어떤가요? 이번 박근혜 게이트로 확인된 민심은 결코 에스토니아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패에 대한 정치적 감수성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은 그 어느 나라 국민보다 뛰어납니다. 1960년과 1987년 두 차례의 민주혁명이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또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인프라를 갖고 있습니다. 정보공유와 온라인을 활용한 토론이 매일매일 사회관계망 서비스와 포털사이트 댓글창에서 벌어지고 있죠.

무엇보다 이번 사태가 박근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당, 검찰, 언론, 대기업, 정보기관 등 부패한 정치권력의 만들어낸 문제라는 것을 전 국민이 알게 되었습니다. 백만 명이 운집한 촛불집회를 통해, 문제 해결의 주체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권이 아니라, 국민들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대통령 지지율은 3주째 5%를 기록해, 사실상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보이콧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이 사태를 해결할 '민회'의 구성과 민회에 참여할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 아닐까요? 온라인을 활용해서 의제를 선정하고 시민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거나 큰 돈이 드는 일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지금, 에스토니아의 사례가 이 상황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참고자료

Charter 12: Estonia's stab at direct, Open Democracy

ENHANCING ESTONIA'S DEMOCRACY THROUGH RAHVAKOGU, RE:IMAGINING DEMOCRACY, 2013/08/14 2013

What is Rahvakogu?, 에스토니아 민회 홈페이지

Democratic Innovations in Deliberative Systems - The Case of the Estonian Citizens' Assembly Process, Magnus E. Jonsson, Örebro University, Sweden, 2015

Rahvakogu, Estonia - From ideas to laws, Citizen Foundation, Ic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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