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우리가 노화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3가지 이유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13.15%(2015년)이다. 특히 경기도 양평군은 20.93%로 전체 인구의 1/5 이상이 고령인구다. 세계적으로 유례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노인 숫자가 늘어가는 중이다. 자연스럽게 노화와 죽음에 대한 관심이 생겨가고 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관련한 문제들도 발생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가까이로 다가온 노화와 죽음,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1. 노인병 전문의가 줄어들고 있다.

연합뉴스는 올해 결핵과와 비뇨기과, 흉부외과의 전공의(레지던트) 확보율이 각각 0%, 37.8%, 51.1%에 머물렀다고 보도했다. 기피 전공과 인기 전공 사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노인 질병을 다루는 가정의학과도 105.2%를 기록해 전공 기피과목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의료계가 상당 부분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는 이 변화를 맞닥뜨리는 데 있어서도, 노년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도 너무 더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령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격을 갖춘 노인병 전문의의 숫자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1996년과 2010년 사이에 노인병 전문의 숫자가 25%나 감소했다. 또한 성인 1차 진료 훈련 과정 지원자 수는 곤두박질친 반면 성형외과나 방사선과 지원자 수는 기록적으로 많았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돈 때문이다. 노인병과 성인 1차 진료 분야의 수입은 의학계에서 가장 낮다. 또 다른 이유는 인정을 하든 안 하든 간에 상당수 의사들이 노인을 돌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병 전문의 펠릭스 실버스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주류 의사들이 노인병학에 대해 관심을 꺼 버립니다. 속된 말로 늙은이들, 그러니까 이 삐걱거리는 고물 차를 다룰 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 그리고 이들은 주된 증상 하나만 갖고 오는 게 아니에요. 한 열다섯 가지쯤은 됩니다. 그 많은 증상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의사가 어디 있겠어요. …. 게다가 그 증상들이 한 50년 이상 계속된 거라고 해 보죠. 50년 동안 앓아 온 증상을 고치겠다는 의사는 없을 겁니다.”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저)

2.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보통 죽음이 두렵다고 하지만, 진짜 걱정해야 할 것은 그 전에 노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젊은 시절 가능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불가능한 쪽으로 진행이 된다. 그때의 당혹감과 괴로움, 상실감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확실히 대비가 필요하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닥칠 일들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필립 로스(Philip Roth)는 소설 ‘에브리맨(Everyman)’에서 이를 더 비통하게 표현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대학살이다.” …. 결국 나이가 들면서 점점 많은 것을 잃어 가다 보면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충족하기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거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경우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삶의 상당 기간을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보내게 될 것이다.”(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저)

3. 노인을 위한 의학은 마음이 아닌 몸의 문제에만 주력해 왔다.

요양원과 요양병원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그리고 4만 중증 환자는 돌봄 위주의 요양원에, 치료가 필요 없는 17만 노환들은 치료진이 상주하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잘못된 내용이 아니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돌봄 시설에 있다.) 그렇지만 이들 기관은 노인의 건강 혹은 생존 위주로만 운영 중이다. 마음과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노력은 여전히 약한 편이다.

“의학, 그리고 늙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의학이 만들어 낸 기관들이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게 무언지를 두고 잘못된 관점을 가져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예 관점 자체라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의학은 아주 작은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의료 전문가들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바로 이 부분이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어 내는데-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버렸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질병, 노화, 죽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시련은 의학적인 관심사로 다뤄져 왔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일종의 사회공학적 실험이었다.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저)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허프북스 #노화 #죽음 #초고령사회 #노인병 #요양원 #요양병원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