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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워터게이트에 주목해야 할까? 닮아도 너무 닮았다

2014년 정윤회 문건유출 의혹이 터진 직후 청와대에서 '찌라시' 문건유출 사건이라고 규정한 것처럼 당시 백악관 역시 '3류 강도사건'이라고 주장했다. 1973년 11월 7일, 재임 1주년을 맞은 자리에서, 닉슨은 결정적인 거짓말을 한다. 그는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불과 1년을 채 버티지 못한 채 그는 불명예 퇴진했다. 특별검사와 상원청문회 등을 통해 최종 확인된 바에 따르면 민주당에 대한 불법선거 운동을 비롯해 불법도청 사건 등은 모두 닉슨의 묵인 또는 승인하에 진행되었다.

  • 김성해
  • 입력 2016.11.16 07:18
  • 수정 2017.11.17 14:12
ⓒAP / 연합뉴스

벌거벗은 임금님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은 100만개를 훨씬 넘는 촛불로 넘실거렸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엎을 수도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면 거대한 불꽃이 가진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지만 자칫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침묵하던 다수가 광장으로 나서게 된 것은 대통령에 대한 적나라한 치부가 확인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우화에서 나오듯 이번에도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은 잘난 어른이 아니었다. 대구에서 열린 집회에서 7분간에 걸쳐 거침없이 진실을 폭로한 사람은 여고 2학년이었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그 역할을 초등학교 5학년이 했다. 국가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해 내란죄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법학자가 아닌 연예인이었다.

한국 사회는 늘 말할 자격을 따진다. 뭔가를 주장하면 '네가 뭔데'라는 핀잔이 뒤따른다. 나이가 어려도, 배운 것이 적어도, 돈이 없어도, 지위가 낮아도 자격상실이다.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은 특정한 소수에게 부여되지만 그들은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누구도 진실을 독점할 수 없다는 점도 일의 시작과 끝은 모두 아는 사람은 없다는 점도 그들은 외면한다.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많은 다수는 이렇게 침묵을 강요받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큰 탈은 면할 수 있다. 한국의 지식인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고 어느 순간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100만 촛불을 경험한 지금 쓰는 이 글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아는 것도 많지 않고, 경험도 부족하고, 통찰도 별 것 없지만 지금은 누구나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왜 워터게이트에 주목해야 할까? 닮아도 너무 닮았다

인간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미래 역시 없다고 한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퇴진시킨 워터게이트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면 현재 궤도에서 결핍된 부분이 무엇인지 찾게 된다. 진행과정을 복기해 보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다. 또한 닉슨이 하야한 이후 미국이 걸어간 길을 통해 차기 대통령의 과제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 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릴 기회도 생긴다.

1. 피 묻은 손으로 출발했다

정치든 일상이든 순리라는 게 있다. 무리수를 두면 꼭 뒤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나는 게 세상 이치다. 박근혜 정권은 처음부터 문제가 될 소지가 많았다.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정보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는 불법으로 대선에 개입했다. 그러나 경찰청장은 댓글 현장이 발각된 국정원 직원에 대한 수색영장 신청을 막았고, 서울경찰청장은 한밤의 기자회견을 통해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국정원과 새누리당 등과 사전 협의한 결과였다.

박근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리차드 닉슨은 금수저였다. 1952년 당시 39살이었던 그는 골수 반공주의자였고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지지를 받았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은 이를 고려해 그를 부통령에 지명했다. 1956년 대선에서도 부통령으로 함께 출마했고 모두 성공했다. 자연스럽게 대통령을 꿈꾸었던 그는 1960년 민주당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에게 패배했다. 전체 투표자의 0.2%에 불과한 11만표 차이였으며 케네디가 승리한 텍사스와 일리노이주에서는 선거부정 의혹이 있기도 했다. 선거 불복을 택하는 대신 그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1962년 주지사 선거에 나서지만 TV라는 새롭게 등장한 매체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팻 브라운(Pat Brown)에게 약 5% 차이로 패배한 이후 "다시는 기자회견을 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미디어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언론과 친하지 못했다는 것도 박대통령과 닮았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된다. 그는 취임식에서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하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라"는 연설을 했다. 미국이 직면한 공공의 적은 "독재, 가난, 질병과 전쟁 그 자체"라는 말도 했다. 그의 정치철학은 "위대한 사회"를 내세웠던 37대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존슨은 케네디가 선택한 부통령이었고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그러나 1965년 시작된 베트남 전쟁으로 그의 인기는 수직으로 하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8년 9월 3일, 강력한 대선 후보였던 전직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가 암살된다. 존 F. 케네디 선거 책임자이기도 했던 그 역시 빈곤자, 흑인, 히스패닉 등에 특히 호의적이었다. 암살된 케네디 대통령을 그리워하던 많은 이들의 압도적 지지를 감안할 때 그가 당선될 확률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1968년 닉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두 번의 부통령으로 또 대외정책 전문가로서 닉슨은 자신이야 말로 국내외 혼란기를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지도자라고 포장했다. 196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문화와 반전데모에 실증을 느낀 침묵하는 백인이 호응했다. 2016년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활용했던 선거 전략은 여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닉슨의 재선도 그렇게 무난하지는 않았다. 1972년 최대의 경쟁자는 조지 왈라스(George Wallas)였다. 1968년 제3당 후보로 나와 13%의 득표를 올렸던 그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5월 15일 유세 중 피격된 이후 중도에 하차했다. 닉슨은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을 상대로 재선에 성공했다.

단순히 '불법도청' 사건에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는 워터게이트는 이런 역사적 격변기의 산물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랫퍼킹(Ratfucking)이라는 광범위한 불법선거운동이 있었다. 민주당 후보자들의 가족 미행하기, 그들의 사생활 자료 수집하기, 후보자들의 문구가 들어간 편지지를 이용한 편지 위조 및 배포, 신문에 거짓 정보나 날조된 정보 누설, 유세일정 교란시키기, 선거운동 기밀자료의 탈취, 다수의 민주당 선거운동원 사생활 조사 등 그 종류와 규모도 엄청났다. 국정원 댓글 공작이 발각되었을 때처럼 사건이 터지면 권력기관을 통해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노력도 뒤따랐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사람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과 위협이 있었다. 몸통은 대통령과 핵심 측근이었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불법모의, 위증, 사법방해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살았다.

2. 대통령의 반복된 거짓말이 신뢰를 무너뜨렸다

닉슨의 거짓말은 역사가 깊다. 1952년 부통령으로 출마한 직후 그는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시달렸지만 성공적인 대중연설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 그러나 당시의 성공은 나중에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1968년 10월,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서, 존슨 행정부와 베트남 정부 간 체결 예정이었던 파리평화조약을 의도적으로 방해한 것도 닉슨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던 그는 1969년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폭격을 승인함으로써 더 많은 살상자를 내기도 했다. 닉슨 행정부와 펜타곤이 추진했던 전쟁 확대는 1971년 뉴욕타임스의 '펜타곤페이퍼'를 통해 공개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 기밀을 누설한 사람은 다니엘 엘스버그(Daniel Ellsberg)로 닉슨과 측근은 그를 대상으로 한 불법 도청을 이미 승인한 상태였다.

워터게이트(Watergate)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복합단지 이름이다. 1972년 6월 17일, 이곳에 자리 잡고 있던 민주당 선거본부에 강도가 침입했다. 불법침입을 한 5인조 강도는 전화를 도청하고 사무실에 있는 서류를 훔치다 경찰에 체포된다. 당시 이들은 전직 CIA 요원이었던 에버렛 헌트(Everette Hunt)의 연락처를 갖고 있었으며 현장 지휘자는 고든 리디(Godon Liddy)였다. 둘 다 닉슨 선거대책본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2014년 정윤회 문건유출 의혹이 터진 직후 청와대에서 '찌라시' 문건유출 사건이라고 규정한 것처럼 당시 백악관 역시 '3류 강도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8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백악관의 그 누구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첫 번째 거짓말을 했다.

1973년 11월 7일, 재임 1주년을 맞은 자리에서, 닉슨은 또 다른 결정적인 거짓말을 한다.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그는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불과 1년을 채 버티지 못한 채 그는 불명예 퇴진했다. 특별검사와 상원청문회 등을 통해 최종 확인된 바에 따르면 민주당에 대한 불법선거 운동을 비롯해 불법도청 사건 등은 모두 닉슨의 묵인 또는 승인하에 진행되었다. 백악관 직원을 대상으로 그가 설치하도록 지시한 도청 자료에는 헌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망할 것, 그(Hunt)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라는 말이 녹음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CIA를 움직여 FBI의 조사를 방해했고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의 사주를 협박해 특종을 막으려 했다. 국정원과 검찰 및 언론 등이 주연 배우로 등장하고 있는 한국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74년 8월 9일 리터드 닉슨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사임을 발표하는 모습. ©AP

3. 군대문화와 측근 정치가 문제였다

정치적으로는 금수저지만 닉슨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기회가 있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인근에 있는 대학을 다녔다. 명문 듀크대 로스쿨을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었던 그는 졸업 후 검사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에 입대했으며 1946년 함장(Commander)으로 퇴역했다. 그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장군 출신으로 군대문화는 자연스러웠다. 기밀 유지와 업무 효율성을 중시하는 리더십 스타일은 이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군인의 딸로 이런 문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쉽게 접할 수 없는 기밀주의를 선호했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청와대 핵심 보직이 육법당이라고 하는 '육사, 사법고시' 출신으로 채워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닉슨의 측근은 많지 않다. 국내 직책으로는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H. 홀드만(Halderman), 민정수석 존 에릭만(J. Ehrlichman), 정무특보 찰스 콜슨(C. Cholson)과 수석행정관 알렉산드 버터필드(A. Butterfield) 등이 있다. 그 밖에, 법무장관 존 미첼(J. Mitchell), 특별보자관 젭 매그루더(J. Magruder) 및 자문위원 존 딘 3세(J. Dean III) 정도다. 최순실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비선 인물로는 프레드릭 라루(F. LaRue)가 있으며 주로 사법부 인사에 개입했다.

먼저 홀드만과 에릭만은 절친이었다. 백악관 내에서 '베를린 장벽'으로 불릴 만큼 모든 정보는 이들을 통해 닉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닉슨의 '양자'로 불린 홀드만은 민주당사 불법도청을 비롯해 모든 음모의 중심에 있었다. 국내 문제를 맡았던 에릭만은 FBI 등에서 올라오는 모든 정보를 관할하는 직위에 있었고 FBI로 하여금 사건을 조기 종결하도록 압력을 넣은 장본인이다. 청와대 행정을 총괄했던 안봉근 비서관 역할을 한 인물로는 홀드만의 소개로 백악관에 들어온 버터필드가 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지시로 백악관 직원을 감시하기 위해 불법 도청 장치를 설치했으며 닉슨, 홀드만과 함께 매일 3자 회의에 참가했다. 백악관 각종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1969년 닉슨은 절친이었던 미첼을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닉슨은 FBI로 하여금 그와 관련한 의혹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ph)사로부터 반독점 소송 철회를 대가로 40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문제가 되었던 ITT는 1973년 칠레 아엔데 정부를 전복시킨 쿠데타에 자금 지원을 했다. 백악관 인명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는 라루가 있다. 미셀의 자문관으로 일했던 그는 관련 서류의 폐기 및 언론 대책 등을 담당했다. 또 다른 측근으로는 FBI가 워트게이트의 기획자로 지목한 콜슨이 있다. 닉슨의 오른팔로 알려진 인물로 '행동대장'이었다. 민주당에 대한 불법 정보 수집의 초기 기획에서 은폐 및 사후대책 마련 등 전반에 개입했던 그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던 인사를 대상으로 한 블랙리스트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4. 권력기관이 공모했다

당시 연루된 권력기관으로는 중앙정보국(CIA), 법무부 및 연방수사국(FBI) 등이 있다. 한국의 국가정보원, 법무부, 검찰과 새누리당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에 따르면 CIA의 개입은 불법도청 작업을 했던 제임스 맥코드(James McCord)와 이를 지휘했던 헌트(Hunt)를 통해 이루어졌다. 맥코드는 재판을 통해 백악관 자문위원이었던 존 딘과 법무장관 존 미첼의 압력으로 경찰 조사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폭로했다. 체포될 당시 헌트는 Robert R. Mullen이라는 회사에 근무했는데 이 회사는 CIA의 위장기업이었다. 전임 케네디 행정부의 쿠바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대표적인 반전주의자였던 다니엘 엘스버그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랜드재단에서 군사전문가로 일하던 엘스버그는 1971년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펜타곤의 비리를 담은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뉴욕타임스에 넘겼다. 헌트는 콜슨 등과 협의해 정부 비판인사를 대상으로 한 인명록을 만들었고 불법도청은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닉슨의 압력을 받은 CIA는 또한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FBI 수사를 방해했다. 체포된 이들을 너무 깊이 조사할 경우 자칫 케네디 암살 문제까지 건드릴 수 있다는 우려였다.

법무부 역시 자유롭지 않았다. 닉슨 재임시 법무장관으로 근무했던 인물은 존 미첼과 리차드 클라인디스트였다. 닉슨의 절친이었던 미첼은 1969년 장관에 임명된다. 1972년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공화당 선거자금 책임자로서 의혹을 받았고 그 이후 백악관에서 열린 대책 회의에도 최소 3차례 이상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퇴임 후 3년 정도가 지난 1975년 2월, 그는 사법방해, 위증 및 공모죄 등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클라인디스트 역시 부패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재선위원장을 맡은 미첼 후임으로 1972년 6월에 임명된 그는 매그루더로부터 관련 사실을 통보 받았지만 수사를 예정대로 진행시켰다. 1973년 4월 30일, 닉슨의 측근과 함께 사임한 이후 1974년 ITT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를 받았다. FBI의 역할은 이중적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우드 기자가 인용한 익명의 정보원은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Mark Felt)였다. 직속상관이었던 패트릭 그레이(Patrick Gray)의 사건 은폐 및 축소에 반발해 관련 정보를 언론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FBI 국장대리였던 그레이는 사건 발발 직후 헌트의 비밀금고에서 발견되었던 핵심 장부를 건네받고 이를 파기한 장본인이었다. 백악관은 이 사건을 처리할 목적으로 그를 국장으로 추천했지만 1973년 2월 15일에 열린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했다.

5.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닉슨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군인이었다. 모든 문제를 자신이 풀어야 한다는 엘리트 의식도 강했고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한다는 의지도 강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도전한 것 역시 자신이 시작한 '중화학공업' 및 '국방자주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의식과 관련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과 통치 스타일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다. 닉슨이 재임했던 기간은 1969년부터 1974년이다. 국내 상황과 대외 정책 그 어느 것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1971년 4월, 중국과 미국은 핑퐁외교를 시작했다. 그해 7월 15일, 양국은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소식을 전했고 10월 25일 UN 총회는 타이완을 대신해 중국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승인했다. 19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으며 양국의 관계 정상화를 약속하는 '상하이선언'(Shanghai Communiqué)을 발표했다. 닉슨은 또한 1969년 소련과 함께 긴장완화를 뜻하는 '데탕트'(Détente) 정책에 나섰다. 1972년 5월 미소 양국은 전략무기감축협상(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SALT I)에 합의했다. 최근 북한이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자랑한 잠수함발사미사일(SLBM)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생산을 동결하고 같은 비율로 줄여나가는 것이 핵심이었다. 닉슨이 퇴임한 직후인 1975년 1월 체결된 '헬싱키선언'(Helsinki Accords)은 이 협상의 산물이었다. 미국, 소련과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한 이 선언을 통해 '주권의 존중, 무력 사용의 자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국내 문제 불간섭 및 인권과 기본 자유의 존중' 등이 합의된다. 베트남 전쟁을 풀어가는 것도 숙제였다.

1969년. 미국 국민은 전장에서 날마다 죽어가는 군인들을 지켜봐야 했다. 반전 데모가 이어졌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닉슨은 5월 공개적으로 미군 철수를 제안하는 한편으로 캄보디아를 대상으로 폭격과 지상군 진입을 승인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호전되지 않았으며 마침내 양국은 1973년 '파리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갑작스런 미군의 철수로 남베트남은 공황에 빠졌고 1975년 항복한다. 미국의 뒷마당으로 알려진 '칠레'도 현안으로 떠올랐다. 1970년 9월 공산당 후보였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이 된다. 닉슨 행정부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공화당의 돈줄이었던 ITT와 같은 다국적 기업과 함께 쿠데타를 준비했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은 대통령 궁을 폭격했고 아엔데와 경비대 일부는 함께 죽음을 맞았다.

경제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닉슨이 첫 임기를 시작하던 당시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4.7%로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가장 높았다.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임금동결과 가격통제였지만 닉슨은 거부했다. 그러나 1971년 8월, 재선을 앞둔 시점에서도 인플레가 잡히지 않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닉슨은 또한 미국 달러의 교환비율(환율)이 하락하도록 유도했으며, '닉슨쇼크'(Nixon Shock)는 그 결과물이었다. 국제시장에서 더 이상 미국 달러와 금을 교환해주지 않겠다는 폭탄 발언이 핵심이었다. 한겨레신문의 '전망대' 칼럼으로 잘 알려진 정운영 교수는 "만약 약소국이 이런 선언을 했다면 전쟁이 났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쟁과 해외진출 등으로 미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뿌린 달러화의 가치는 결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로버트 트리핀(Robert Triffin) 교수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자국의 통화를 경쟁적으로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며 1948년 이후 국제금융시장을 지탱하던 브레트우즈 체제가 이를 계기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1997년 한국 IMF 외환위기의 배경이 된 '자율변동환율' 시대가 이를 계기로 열렸다. 원유를 비롯한 원재료 값이 폭등했고 그 결과는 국제사회 전반의 경기침체였다. 물가폭등 시기에 흔히 나타나는 식량 품귀 현상 등이 나타났고 실업률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고치로 치솟았다. 닉슨이 선뜻 하야를 결정하지 못했던 것은 이런 시대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

워터게이트의 진행 경로

2016년 한국과 1974년의 미국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동일한 병이라고 볼 수 있다면 진행 과정이나 증상 및 결말도 대강은 추정할 수 있다. 닉슨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박대통령의 성품은 그와 비슷한 데가 많다. 2016년 11월 14일 시사저널에 나온 김종필의 인터뷰에서도 '고집'과 '엘리트 의식'은 잘 드러나 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순순히 물러날 가능성이 있을까? 닉슨도 결코 그런 과정을 밟지 않았다. 퇴임한 이후에도 그는 "좀 더 일찍 보다 단호하게 또 솔직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해 아쉬웠다"고 말했다. 본인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모두 국가를 위한 결단이었다고 항변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제대로 봐야 하는 것도 이 점이다. 구체적으로,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먼저 최순실에게 연설문을 보여주고 인사와 관련한 자문을 구한 것은 정상적인 국정 운영에 속한다. 단순히 공적인 조직에만 이런 문제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는 없으며 닉슨도, 심지어 노무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뇌물죄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미르재단과 K 스포츠 재단에 대해서도 변명은 가능하다. 문화는 가장 창의적 산업으로 일자리를 비롯해 국가 번영을 위한 필요한 투자다. 재계에 협조를 부탁한 것이 자칫 강권으로 비칠 수 있지만 '공익재단'에 대한 지원은 상생모델이 될 수 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는 상황에서 자칫 북한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공공복리의 원칙과 어긋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국가 안정이라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공익을 고려할 때 질서를 해치는 과격한 시위에 대한 단호한 대처는 불가피했다. 세월호 참사 역시 불가항력에 의한 것으로 '7시간'에 대한 음모론은 리더십을 흔들기 위한 것으로 본질에서 어긋난다. 끝으로, 1970년대 미국 이상으로 한국은 심각한 국내외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국정의 공백은 자칫 치명적인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묻는 것을 무조건 책임회피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정부는 각종 기밀 사항을 다루고 있으며 모든 자료를 공개하라는 요구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국가이익에 훼손된다. 향후 검찰에서 박대통령이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다. 닉슨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백악관의 도청자료 제출을 거부했고 권력기관은 은폐에 동참했다.

닉슨이 퇴진한 74년 8월 9일은 워터게이트 강도 사건이 발생한 지 2년 2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닉슨 측근들은 곧 바로 해당 사건이 닉슨의 선거본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FBI에 통보했고 협조를 구했다. CIA 국장까지 나서서 피의자를 너무 강하게 몰아세우면 국가안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함으로써 조사 자체를 지연시켰다. 그러나 FBI의 미온적 대처에 불만을 가졌던 내부고발자의 제보로 언론은 이 사건을 공론화했다. 군사문화에 익숙했던 닉슨 행정부는 정보 공개에 알레르기 반영을 보였다. 1971년 "펜타곤 페이퍼"가 알려진 직후 이들은 엘스버그를 '간첩죄'로 고발하는 한편, 국가이익을 구실로 출판정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해 6월 30일 미국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조를 인용하면서 관련 정보를 공표하는 것을 인정했다. 닉슨의 방해공작은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닉슨은 의혹이 눈덩이처럼 확산된 1973년 4월 30일에야 측근 3명을 해임했다. 문고리 3인방과 우병우 수석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국정원 댓글 수사를 지휘했던 채동욱 검찰총장을 쫒아낸 것처럼 FBI 수사를 지속시켰던 신임 법무장관도 함께 해임했다. 상원 청문회를 통해 불법도청 사실이 밝혀지고 특별검사가 이 자료를 요청할 때도 저항했다. '토요일의 대학살'로 알려진 10월 20일 인사를 통해 그는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 특별검사 해임에 반대했던 법무부 장관(Eric Richardson)과 차관(William Rucklshaus)을 해임했다. 11월 17일에는 자신이 사기꾼이 아니라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콕스 검사를 대신해 임명된 레온 자왈스키(Leon Jaworski)가 도청자료에 대한 영장을 받아냈을 때도 물러서지 않았다. 닉슨은 항소를 했고 1974년 7월 24일 연방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상원 청문회와 하원 탄핵소추위원회의 압력도 큰 몫을 했다.

핵심 측근이 자리에서 물러난 직후 상원은 워터게이트 청문회를 시작했다. 1973년 5월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 홀드만의 보좌관으로 수석행정관 역할을 했던 버터필드는 닉슨의 지시로 불법도청을 했다고 폭로했다. 10월 23일, 하원은 탄핵결의안을 가결했다. 이듬해 2월 하원은 닉슨에 대한 탄핵청문회 개최를 승인했으며 7월에는 탄핵과 관련한 3개항을 통과시켰다. 특별검사, 법원, 언론 및 의회의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은 끝에 74년 8월 9일 닉슨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바로 이튿날 대통령으로 취임한 부통령 제널드 포드(Gerald Ford)가 사면을 약속한 이후였다.

미국에서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시 자연스럽게 권력을 이어받는다. 한국과는 다르다.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유임시킨 것을 비롯해 그는 닉슨의 정책을 대부분 유지했다. 불법으로 병역을 회피한 이들을 대상으로 공익근무를 조건으로 사면을 실시하기도 했다. 미국 국민은 "더 이상의 분열은 없어야 하고 우리는 당면한 현안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던 그의 연설을 일단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1976년 대선에서 그는 그 값을 치렀다. 닉슨의 거짓말과 정부의 타락을 지켜보면서 미국은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선택했다. 대외정책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행정 역량도 의심스러웠지만 '인권운동'으로 유명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당선된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5일 청와대 에서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지점들

닉슨은 항복한 것이지 자발적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포드 대통령이 사면을 단행한 것 역시 탄핵을 당할 경우 자신도 철창에 갇힐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펜타곤페이퍼를 시작으로 워터게이트에 대한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도 큰 역할을 했다. 국민은 각종 정황과 증거를 앞에 두고도 거짓말을 하는 닉슨에게 환멸을 느꼈다. 법무장관, FBI국장대리, CIA 등이 줄줄이 법정에서 유죄를 받으면서 제도에 대한 불신도 극에 달했다. 다행히 '견제와 균형'이라는 시스템이 작동했다. 법원은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공정하게 진행했다. 국익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자유'라는 헌법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헌법 파괴를 막기 위해 양심적으로 행동한 공무원도 많았다. '딥 스로트'(Deep Throat)로 불린 FBI 부국장이 그랬고 랜드재단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펜타곤의 비리를 고발했던 엘스버그도 있었다.

또한 특별검사로 임명된 콕스는 닉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법도청 자료의 제출을 과감하게 요구했다. 특검을 해임하라는 압력에 맞서 법무장관과 차관도 사표를 제출했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사주와 기자들 역시 한국과 달리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당시 사건을 둘러싼 의혹은 남김없이 드러났고 관련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정치는 보다 투명해졌으며 '진솔하지 못한' 정치인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보여줬다. 그렇다면 2016년 현재 당시와 비교했을 때 부족한 부분은 무엇일까? 닮은 점이 많다면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 국민이 분노하고 하야를 선언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절대군주가 된 것처럼 본인은 법 위에 존재한다는 것에 분노했다. 불법을 저지른 것을 넘어서 이를 은폐하고, 정직한 사람을 겁박하고, 시스템을 '오염' 시킨 것에 절망했다. 법무부, FBI, CIA, 펜타곤 등 국가의 핵심 권력기관에 대한 신뢰를 망가뜨렸다는 점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와 달리 '잘못된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검찰에서 적용하는 죄목만 해도 '뇌물죄, 공무상비밀누설죄' 등이다. 미국은 이와 달리 '사법방해죄, 위증죄, 모의죄' 등을 적용했다. 게다가 국내에는 '헌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이 엄연히 존재한다. 제1조에는 "헌법의 존립을 해치거나 헌정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의 배제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헌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검찰과 국회 청문회의 방향을 이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대통령의 혐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특별검사나 청문회를 통해서만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00만 촛불시위는 이런 노력이 제대로 지속될 수 있도록 감시해야 한다. 국회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청문회를 속히 열어야 한다. 국회라는 공개된 광장을 통해 관련자들은 보복의 두려움 없이 진실을 밝힐 수 있다. 자칫하면 위증죄로 구속될 수 있다는 채찍은 물론 단순 가담자나 소극적 협력자에 대한 사면이 전제될 때 실체는 드러난다.

셋째,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인물은 모두 고위직이었다. 홀드만은 비서실장이었다. 권력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모를 수 없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깊숙이 개입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무장관 미첼 역시 최고 30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검찰 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이 은폐의 주역이라는 의심도 당연하다. 한국에서 관련 의혹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황교안 국무총리로 2014년 정윤회 사건 때 그는 법무장관이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조사를 총괄한 이후 승진한 김수남 검찰총장도 조사해야 한다. CIA 역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 남재준 국정원장도 예외가 아니다. 최순실 사건은 명확하지 않지만 국정원 '불법선거'와 '은폐' 의혹의 핵심 인물이다.

끝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닉슨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은 자의적으로 물러날 가능성이 없다. 100만 촛불시위도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본인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헌정파괴'라는 관점에서 거부할 수 없는 사실관계가 확보되지 않으면 곧바로 '정치공세'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퇴진'을 강요받을 경우 정쟁의 희생양이라는 오해도 생긴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불신 받는 상황을 감안할 때 검찰이 어떤 결과를 내놓아도 의혹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개성공단 폐쇄, 사드배치, 한일군사협정 등 중요한 대외정책의 실패를 감안할 때 직무를 그대로 수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민적 합의를 통해 전면적으로 재검토를 한 다음 집행될 수 있도록 잠정적으로 유예하는 것이 방법이다. 당연히 국내의 각종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도 필요하다. 박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것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김두식 교수나 금태섭 의원 등이 지적하는 것처럼 '탄핵' 절차를 제대로 밟아가는 것이 더 시급하다. 대법원에서 기각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지금은 그나마 남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지켜야 할 순간이다. 죽은 줄 알았던 언론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검찰도, 법원도, 공무원 사회도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을 꿈꾸는 분들에 대한 부탁

닉슨 하야를 둘러싼 일련의 전개과정을 잘 살펴보면 국내 상황에 대한 추측도 가능하다. 1961년 '뉴프론티어'를 내세웠던 존 F 케네디는 노무현과 유사하다. 인권변호사면서 주류에 저항했다는 점도 그렇고 대외정책에서도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열광하는 국민이 있지만 못내 불안하게 본 사람도 있다. 암살과 자살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그의 후임자들은 국가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부족한 점이 많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 인플레이션, 포퓰리즘으로까지 불릴 수 있는 과도한 복지정책 등은 부채였다. 미국에 대한 자긍심 또는 애국심을 훼손한 것도 오류다. 닉슨은 미국 중산층과 서민이 갖고 있는 이러한 불만에 주목했다. 물론 속전속결이라는 군사적 전략에 따라 베트남 전쟁을 확대시킨 책임은 있지만 군인답게 물러날 때를 알았다. 전쟁 대신 평화를 가져왔고 1970년대의 데탕트를 주도했다. 10억에 가까운 인구를 가진 중국과 영원히 적대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현실감각도 있었다. 권력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는 말처럼 '본인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교만을 이기지 못한 것이 단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배경은 닉슨과 비슷한 면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한국 경제의 체질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상대적 박탈감을 키웠다. 정리해고와 계약직 노동자의 확대는 전반적인 직업불안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틈새에서 치밀한 준비 없이 진행되었던 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은 불안감을 조성했다. 경제적 성장과 일상생활에서 질서와 안정이 갖는 중요성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보다 강력한 리더, 국민에게 쓴 소리도 할 수 있는 리더,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는 리더에 대한 목마름을 놓쳤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약속했지만 '한풀이'를 한다는 인상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박대통령은 이런 배경에서 당선되었지만 결과는 비참하다. 과도기로 인해 혼돈스러운 면은 있었지만 헌법 정신은 유지되었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시스템'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박대통령의 탄핵 또는 하야는 불가피하다.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면 탄핵이라는 정상적인 절차가 더 바람직하다. 불행은 일찍부터 예견되었다. 우선 정통성이 부족했다. 박정희라는 좋은 유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국정원, 경찰과 군대의 대선개입은 치명적이었다. 본인의 장점이었던 원칙 역시 이중 잣대라는 것이 드러났다. 부친과 달리 인재를 널리 고르게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도 거듭 확인되었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고 비효율적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충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는 항상 초라했다. 정치적 고향이었던 대구에서도 비난 받았던 '속 좁음'과 '편견'도 문제였다. 정치는 살아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외면한 채 자기만 옳다는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박근혜로 대표되는 이 특징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명문가의 '공주'가 아닌 중산층 출신의 '아버지'라고 보면 된다.

금년 3월 끝난 '시그널'이란 드라마가 있다. 극중에서 조진웅은 이 시대가 원하는 아버지상을 잘 보여줬다. 책임감, 능력, 배려, 따뜻하면서도 엄한 모습을 두루 갖췄다. 박대통령에 실망한 국민이 열광할 만했다. 험난한 시대를 맞아 우리는 누구나 아버지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희망한다. 내가 잘못해도, 좀 못나도, 좀 실수를 해도, 넉넉하게 안아주고 다시 추스르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모든 것을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기 보다는 잘못은 지적하고, 때로는 손찌검도 하는, 그러면서 함께 고난을 헤쳐 가는 유형이다. 가족을 위해서는 창피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세상과 두루 섞일 줄도 아는 사람이다. 열정적으로 일할 만큼은 젊어야 하고, 진정성을 느낄 수 있고, 사람 냄새가 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품으로는 훌륭했던 지미 카터가 연임에 실패한 것에서 보듯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없다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2016년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질은 과연 무엇일까?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특징은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당장 최근 사태의 핵심은 '국정농단' 보다는 '헌법질서 파괴범죄'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헌법에 규정된 조항을 누가 어떻게 어겼는지를 명확하게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특검과 청문회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한편으로, 헌법 정신을 훼손하게 된 원인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 한다. 대선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결국 국민의 버림을 받게 된다. 무너진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복원시키는 것이 우선순위여야 한다.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는 한국 축구를 4강에 올렸다. 그 이후 어떤 감독도 이 정도의 성적은 얻지 못한다. 반드시 한국 사람이 감독을 해야 한다는 통념이 없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냉정하게 말할 때, 일반 국민 입장에서는 생명과 재산의 위협을 받지 않고,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직장과, 안락한 일상을 보장받는다면 누가 지도자가 되든 상관이 없다. 능력껏 대접받고,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고, 게임의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된다면 굳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크게 없다. 광화문 광장에서 김재동씨가 말했던 것처럼 '헌법'에 나와 있는 것만 제대로 지켜지면 된다는 의미다. 닉슨과 박근혜는 이 부분에서 실패했고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고 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이 점을 간과했다. "반미 좀 하면 어때"라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 또한 이런 역량에서는 낙제점이었다. 1980년 정권을 잡은 '로널드 레이건'은 이 점에서 평가할 만한 부분이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그는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에서 준비한 '리더를 위한 필독서'(Mandatory For Leadership)를 인수위 참가자들과 함께 논의했다. 국방, 경제, 교육과 환경 전 분야에 걸쳐 미국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이 책의 저자들을 정부 관료에 임명했다. 빌 클린턴이 했던 방식도 참고할 만하다. 폴 크루그먼의 증언에 따르면 클린턴은 선거 직후 자신의 별장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했고 이들과 며칠간에 걸쳐 토의를 계속했다. 국방비를 대폭 축소하고, 무역적자 해소 방안을 마련하고, IT 산업 등에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정책 방향은 이 모임을 통해 확정된 것으로 알려진다.

둘째,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리더는 성공할 수 없다. 케네디와 닉슨을 지지했던 국민은 분명 다르지만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운명적으로 함께 살아야 한다.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타협'은 불가피하다. 미국과 재벌을 적대시 하는 집단과 북한과 노동자를 경멸하는 집단 역시 공존의 대상이다. 적대관계를 일시적으로 화합시키는 것은 '공정'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는 중재자를 통해 가능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부분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고통분담을 얘기했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노동자의 양보를 요구했다. 북한 문제에 접근하기 전에 미국, 러시아, 중국과 일본 등과 충분히 상의했고 그들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인사 문제에 있어 그 또한 충분히 공정하지는 못했지만 몇 십 년 동안 누적된 호남의 차별을 감안하면 정상화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박근혜는 이 부분에서 완전한 실패였다. 막대한 정치적 자본을 확보하고 있었으면서도 TK의 양보를 전혀 얻어내지 못했다. 지나치게 기득권의 편에 선다는 느낌을 줬고 그로 인해 불거지는 박탈감을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부하 장수를 통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솔선수범에서도 최악이었다. 전쟁터에서 장수는 부하들이 밥을 먹기 전에 먼저 식사를 하지 않는다. 부하들의 잠자리를 모두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잠에 든다. 박대통령은 정반대로 했다. 세월호 현장과 메르스 현장에 없었다. 지진이 나도 안전한 지를 확인한 다음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이와 달랐다. 그들은 들판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셨고, 선술집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복장도 소탈했고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을 주는데 성공했다.

셋째, 집단지성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안팎의 도전은 백마 탄 왕자님이 와도 해결할 수 없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리더는 오히려 사기꾼이다. 겸손해야 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고, 인재를 쓸 때는 과감해야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악의적인 잘못이 아닌 경우라고 한다면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인사청문회는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문제가 있다. 제대로 된 리더는 따라서 본인이 등용하고자 하는 인물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필요한지, 무엇을 잘 하는지에 대한 설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한번 인재를 선택한 다음에는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지 말고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유리창을 깨는 것이 겁이나 청소를 하지 않는 오류는 막아야 한다. 과거 로마제국에서 전쟁에 나간 장수에게는 전권을 주고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묻는 대신 설욕의 기회를 준 것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끝으로, 말로만 국민을 찬양하지 말고 누구나 성숙한 시민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말할 자격을 요구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연령이 낮아도, 못 배워도, 직위가 미천해도 인간은 누구나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최근 집회에서도 국민은 결코 개와 돼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거듭 확인된다.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과 이제 겨우 10대 중반에 들어선 어린 학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국민을 믿지 못할 때 닉슨과 박근혜와 같은 오류에 빠진다. 자신만이 똑똑하고 다른 사람들은 선동에 휘둘린다고 확신한다면 자연스럽게 조작하고, 가르치고, 배제하려고 한다. 노무현 정신은 이 점에서 박근혜와 대척점에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패배에 대해 "현장에 나가 직접 만나야 한다"는 충고를 하는 오바마의 발언도 이런 맥락이다. 존 듀이(John Dewey)는 이런 이유로 인간은 누구나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만 주어진다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이런 신념 덕분이다.

* 이 글은 '더피알'에도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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