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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짚는 정치 풍자가 필요하다(영상)

ⓒJTBC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예능의 최순실 풍자

말과 풍자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입을 오랫동안 틀어막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첫째, 입에 물린 재갈이 풀리는 순간 그간 쌓였던 것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 당장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대통령 지지율이 5%까지 떨어지자, 그간 정치 풍자를 삼가며 몸을 사렸던 예능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권력자의 친구를 비웃기 시작했다. 혹자는 엄혹하던 시절 안기부의 전화를 받아가며 시사 코미디를 선보였던 고 김형곤의 예를 들어 보이며 그간 몸을 사리던 이들의 처신을 기회주의적이라 지적하지만, 김형곤 같은 용기를 낸다는 게 말이 쉽지 직접 실천하긴 어려운 일이다. 입 한번 잘못 뻥끗했다가는 해당 발언을 한 코미디언이나 프로그램 연출자가 피해를 입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해당 방송사 모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청와대로부터 퇴진 압박을 당하는 초현실적인 시절, 그 꼴을 보고도 용기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울며 겨자 먹기로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풍자와 조롱을 포기하고, 에둘러 찔끔찔끔 사회 비판을 하고, 그조차도 여의치 않으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조롱 상대를 찾다가 애먼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치명적인 실수나 저지르던 지난 시절, 한국의 코미디는 그 자존심이 꺾였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답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문화방송 <무한도전>을 필두로 “오방색”, “우주의 기운” 등의 자막을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들이 화제가 됐지만, 가장 화제가 됐던 건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와 티브이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 8>(이하 <에스엔엘>)이었다. <개그콘서트> ‘1대1’ 코너가 정치 풍자를 시도하긴 했지만, 역풍을 걱정한 탓에 정치권 전체를 싸잡아 풍자하느라 결과적으로 정치 혐오에 기여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에스엔엘>은 꾸준히 청년실업이나 열정노동 등의 사회적 문제를 건드려 왔지만, ‘여의도 텔레토비’를 선보이며 성역 없는 정치 풍자로 출발한 프로그램의 오늘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속으로 얼마나 벼르고 있었으랴. 지난 5일과 6일, <에스엔엘>과 <개그콘서트>는 각각 김민교와 이수지에게 흰 블라우스를 입히고 머리 위에 선글라스를 살포시 올려준 뒤 무대 위로 올렸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이 찍은 사진 속 최순실의 외양을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다.

본질을 풍자했나?

누가 봐도 최순실처럼 보이는 차림으로 등장한 이수지에게 유민상은 끊임없이 묻는다. ‘그분’ 아니냐고. 들고 있는 그거 태블릿피시가 아니냐고, 독일에서 오신 거 아니냐고. 이수지는 계속 부정한다. 나는 그냥 닮은 사람일 뿐이고, 손에 쥐고 있는 건 클러치 백이라고. <개그콘서트>의 패러디가 눈에 뻔히 보이는 정황을 부정으로 일관하는 최순실을 빗댔다면, <에스엔엘>의 패러디는 최순실의 탐욕을 조롱한다. 최순실과 꼭 닮은 세대주 김민교는 명품 구두를 신고 세입자를 찾아와 턱도 없이 집세를 올리겠다고 강짜를 부린다. 끊임없는 부정과 통제되지 않는 탐욕. 많은 시청자들이 대통령보다 더 재량이 많은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을 직접 겨냥한 이 패러디에 환호했고, 최순실로 분한 김민교와 이수지의 출연 장면 이미지는 온 인터넷을 도배하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오랫동안 말하는 걸 참아야 했던 이들은 단내 나는 입을 열어 말을 토해냈고, 같은 시간 정치 풍자에 목이 말랐던 이들은 타는 목마름을 해갈했다.

입을 오랫동안 틀어 막을 때 생기는 두 번째 일, 오랫동안 말을 할 기회를 잃었던 이들은 종종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곤 한다. 마치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리되었던 이들이 제 모국어를 까먹는 것처럼. 오랜만에 하는 정치 풍자여서 그랬던 걸까, 일단 목마름을 달래고 나서 곰곰이 셈해보니, <개그콘서트>와 <에스엔엘>의 패러디는 최순실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본질을 조롱하는 대신 최순실의 표피적인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온라인 매체 <오마이스타> 유지영 기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아무런 직위에 오르지 않고 국정을 좌지우지한 사람이고, 국가 시스템은 그로 인해 붕괴되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며, 여전히 많은 증거를 숨긴 인물” 최순실의 본질은 “‘프라다 신발'이나 ‘곰탕' ‘독일' ‘선글라스' 같은 이미지에 가려져 미처 드러나지 못했”다.(‘‘최순실 패러디', 재밌지만 이건 아니다.’ <오마이스타> 유지영 기자. 2016년 11월8일) 물론 이만한 게 어디냐 싶지만, 한때 ‘사마귀 유치원’이나 ‘비상대책위원회’, ‘여의도 텔레토비’로 정치 풍자의 한계에 도전하던 프로그램들이 선보인 풍자라고 하기엔 조금 실망스럽다.

진짜 본질을 건드린 농담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닌 토크 프로그램에서 터져 나왔다. 아직 본방송도 타기 전에 벌써부터 화제가 되고 있는 ‘오늘만 사는 유병재’ 클립 영상을 보자. 제이티비시 <말하는 대로> 촬영 실황을 담은 이 짧은 영상 속에서, 유병재는 올 5월 어버이연합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저희 조카가 저한테 와서 ‘삼촌, 누구 욕하고 다녔어요? 삼촌 나쁜 사람이에요? 이러더라고요. 조카들한테 미안한 거예요. 너무 어리고 밝고 예쁜 것만 봐도 모자랄 때인데.” 조카들을 봐서라도 앞으로는 절대 위험하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대신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겠다고 다짐한 유병재는 조카에게 과외를 하기 시작한다. “어린애들이 확실히 질문이 많아요. 어느 날은 저한테 ‘삼촌, 그런데 공부는 왜 열심히 해야 해요?’라고 묻는 거예요.” 유병재는 조카에게 설명을 해준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래야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그래야 좋은 동네에 살 수 있고, 그래야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조카는 계속 묻는다. “좋은 친구 사귀면 뭐해요?” 유병재는 조카에게 ‘좋은 친구’의 효용을 이렇게 설명해준다. “그러면 이제 네가 연설문을 직접 안 써도 되지.”

쿠데타 할 때 그 ‘데’

아직 어린 조카는 받아쓰기도 많이 틀린다. “‘빨래를 하다’할 때 ‘빨’은 ‘발’이 아니라 ‘빨’이야. 쌍비읍.” 아무리 설명해도 조카가 못 알아듣자 유병재는 친절하게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러니까 ‘빨갱이’ 할 때 ‘빨’이야.” 이어서 ‘데’와 ‘대’, ‘개’와 ‘계’를 헷갈리는 조카를 위해 유병재는 연신 예문을 들어준다. ‘쿠데타’ 할 때 ‘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할 때 그 ‘데’. ‘계엄령’ 할 때 그 ‘계’ 말고 ‘개헌’ 할 때 그 ‘개’. 연신 조카의 받아쓰기를 수정해주던 유병재는 “동생이 언니한테 ‘일해라 절해라’ 하면 안 된다”라고 적은 문장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 말한다. “이건 맞아. 일도 하고, 절도 했으니까 이건 맞아.” 제이티비시가 온라인에 선공개한 이 2분 남짓한 영상 속에서, 유병재는 박근혜와 최순실의 이름을 꺼내지도, 그 생김새나 외모를 비웃지도 않았으며 ‘아줌마’ 운운하거나 그들의 여성성을 공격의 빌미로 삼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연설문을 대신 써주는” 행위를 선의로 포장한 대통령의 언어를 빗대 ‘좋은 친구’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단어 몇 개를 읊는 것만으로 이 정권의 핵심 이데올로기와 그 실정을 까발렸다. 빨갱이, 쿠데타, 계엄령,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개헌, 그리고 ‘일해라 절해라’(이래라저래라).

권력자의 생김새를 조롱하거나 병적인 거짓말, 탐욕을 비웃는 행위에도 분명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구체성을 잃은 두루뭉술한 비판이나 표면적인 이미지를 단순 재연하는 것은 말초적인 쾌감이나 “어쨌거나 정치인들을 비판했다”는 가짜 포만감만 줄 뿐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모든 코미디언이 유병재와 같은 패턴으로 농담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유병재의 코미디가 늘 탁월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은 ‘정치 풍자’의 근육을 다시 단련해야 하는 코미디언들에게, 에두르지 않고 본질로 다가가는 유병재의 태도는 참고할 만한 것이 아닐까? 앞으로는 권력을 조롱하고 풍자할 일이 무수히 많아질 것 같으니 말이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연재 4년차인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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