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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회고록] 14. 제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 작업의 내막

이재오와 이방호는 자신들의 앞날에 김무성이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MB는 내게도 맹형규와 김무성은 날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방호는 그 당시 강창희 핑계를 대면서, 강창희와 서로 주고받기를 하다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을 했다. 여하튼 2008년 공천에서 재량권을 가장 많이 행사한 사람이 이방호였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이방호가 부산 경남 지역에서 패권을 유지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본 큰 축이 김무성과 권철현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날라갔다.

  • 정두언
  • 입력 2016.11.08 07:31
  • 수정 2017.11.09 14:12

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 작업의 내막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공천 작업은 이재오와 이방호 위주로 진행됐다. 정당의 공천은 공식적으로는 공천심사위원회에서 하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사실상 뒤에서 복안을 만들고 조정하는 역할을 따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MB는 그 사람들이 못 미더웠는지 내게도 공천 작업을 옆에서 챙기라고 지시했다.

이방호는 사무총장으로서 공심위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이재오는 공심위 밖에서, 소위 청와대 의중을 반영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구조로 굴러 갔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재오는 그리 실속을 못 챙겼다. 자기 사람을 챙긴다고 챙기면서도, 마무리를 잘 못해 흐지부지된 사례가 많았다. 실속은 이방호가 다 챙겼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떠돌았다. 이상득 최시중은 이방호에게 직접 연락해 공천을 챙겼고, 박영준도 이상득의 지시라고 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곤 했다. 나는 내 역할은 공천에 엉뚱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선 가능성이 없음에도 자기 사람을 심는 것을 목적으로 공천하는 등 사사로운 공천으로 공천 전체가 훼손되는 것을 저지하는 역할이었다. 당권을 노리는 사람들의 경우는 당선 가능성이 없어도 일단 자기 사람을 심어놓고 원외위원장이라도 시키는 게 더 중요했을 것이다. MB도 그런 것을 걱정해서 내게 챙기라고 한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이재오, 이방호와 매일 저녁마다 만나서 공천 작업을 점검했다. MB에게는 이방호가 직접 보고하고, 지침을 받았다. 이상득은 한편으로 자기 측근인 정종복(당시 사무1부총장)을 통해서도 공천에 관여를 했다. 정태근의 말에 따르면 하루는 이방호가 밥을 먹으면서 자기 노트를 정태근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이상득, 최시중 등 공천과 관련해 자신에게 들어온 청탁들의 구체적인 내용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고 했다. 훗날 이방호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이 경남에서 패권을 잡는데 방해가 될 만한 사람들을 다 날렸다고 알려졌다. 이재오 역시 자기 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공천에서 일단 제치려고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권영진(현 대구시장)이었다. 이재오는 자기에게 늘 불편한 존재인 권영진에게 공천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내고 지역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에게 공천을 안 준다면 누구에게 주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이재오가 그런 식으로 고집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겠냐", 또는 "이 사람은 공천을 줘야 한다"하며 맞섰다.

그런 복잡한 구조여서 나는 공천 창구를 단일화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창구를 단일화해서 여러 요청들을 조정한 후 공심위에 반영해야 하는데, 창구가 여러 군데이니 이방호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당시 공심위원장은 검사 출신 안강민이었다. 친박 쪽에서는 공심위원으로 강창희가 들어왔는데, 강창희 때문에 공심위가 힘들게 굴러갔다. 보통 고집불통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공심위를 뛰쳐나가곤 해서 그를 달래느라 힘들었다. 김무성도 내게 공천에 반영해달라며 친박 인사들의 명단을 준 적이 있다. 그렇게 창구가 혼란스럽다 보니 현장에서 예측불허의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공천을 둘러싼 이와 같이 복잡한 구조는 이방호에게 자율적인 공간을 키워준 셈이 되었다. 자기가 꼭 챙길 사람이 있는데 반대가 있으면 다른 유력 실세를 팔아서 관철시키는 등의 수법 말이다. 돈 공천 소문도 무성했다. Y씨는 공공연하게 자기가 실세 아무개씨에게 얼마를 줬다고 말하고 다녔다. 서울의 K씨는 20억 원을 실세에게 줬다고 내게 직접 말했다.

이방호에 대해 특히 과거에 최고위원 선거를 할 때 자기를 도와주지 않은 사람은 거의 공천을 주지 않았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는 부산·경남의 경쟁자들은 날리고, 자신의 모교인 연세대 출신들은 챙긴다고 말들이 많았다. 당시 공천에서 김무성을 제외시킨 것은 이재오와 이방호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재오와 이방호는 자신들의 앞날에 김무성이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MB는 내게도 맹형규와 김무성은 날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방호는 그 당시 강창희 핑계를 대면서, 강창희와 서로 주고받기를 하다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을 했다.

나는 이방호가 MB에게 공천 관련 보고를 하러 갔을 때 두세 차례 배석했다. MB가 내게 배석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MB는 보고를 받을 때 이상한 버릇이 있다. 마주 앉자마자 주제와 관계없는 딴소리를 하다가 얘기는 산으로 막 가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국 주제를 보고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공천 같이 중요한 사안은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하는데, 늘 그러느라 시간이 없어서 허겁지겁 보고를 마치곤 했다. 그리고 MB는 누구를 딱딱 짚어서 결정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특히 인사 문제에 대해서는 늘 우유부단했다. MB가 이런 식으로 하면 이방호에게 자율권이 커지니 나는 늘 불안했다. 예를 들어 당시 부산의 한 지역구에 대해 MB가 결정을 못하고 머뭇거리기에 내가 "여기에는 네 명이나 몰려서 복잡합니다. 빨리 결정을 해주어야 합니다" 했더니 "J로 하지" 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J는 공심위 4배수에서 탈락했다. MB가 찍은 사람도 이방호가 4배수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방호는 꼭 강창희나 이상득 핑계를 댔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하튼 2008년 공천에서 재량권을 가장 많이 행사한 사람이 이방호였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이방호가 부산 경남 지역에서 패권을 유지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본 큰 축이 김무성과 권철현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날라 갔다. 그때 박형준이 나를 두 번이나 찾아 와 "형님, 이런 식으로 공천하면 무소속 바람이 불어서 부산에서 다 떨어집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 얘기를 이방호, 이재오에게 몇 차례 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걔가 뭘 알아. 이론만 밝은 애 아이가" 하면서 내 말을 일축했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결국 선거 결과는 박형준의 지적대로 되고 말았다. 지역구 공천이 끝나고 공천에 불복해 탈당한 친박들이 친박연대를 결성하면서 박형준의 예상대로 친박연대 등 무소속 연대가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편 비례대표 공천은 청와대가 거머쥐고 극비리에 진행했다. 이재오는 정태근에게 비례대표 명단을 만들어 보라고 맡겼다. 정태근은 이렇게 증언했다. "이재오가 몇 명을 나한테 얘기를 해주면서 명단을 만들라고 했다. 사람들이 뻔했다. 그래서 동료들의 의견을 취합해서 30명 정도, 1.5배수 정도의 명단을 줬다. 그런데 그 명단은 실제 공천에 거의 반영이 되지 않았다." 나와 정태근은 발표된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보고 '으악'했다. 살면서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사람도 꽤 있었다. 사실 비례대표 명단과 순서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비례대표 공천은 귀신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다.

2007년 11월 한나라당 이재오 최고위원이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방호 사무총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개혁공천의 허구성

여기서 개혁 공천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공천 때마다 언론에서는 '개혁공천'을 말한다. 그래서 여야는 개혁 공천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을 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얘기하는 개혁 공천은 결국 현역 교체율이다. 언론은 '교체율이 높아야 개혁적이다'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렇다 보니 공천 작업을 하면서 중간 중간 교체율을 계산하게 된다. 교체율을 계산하면서 교체율을 높이다 보면 공천 작업 하는 사람들은 신이 난다. 부탁받은 것을 반영할 수 있는 소지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교체율을 높이더라도 나쁜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바꿔야 개혁이지, 그 밥에 그 나물 식으로 교체하는 게 무슨 개혁인가. 국회의원도 4년 정도는 해봐야 노하우도 생기고 경륜도 쌓이는 법인데, 무언가 일을 알만하면 바꿔버리니까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면이 크다. 양당 모두 공천 때마다 언론이 깔아놓은 개혁 컨셉인 교체율 경쟁을 벌이다가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늘 국회가 초선 의원이 다수가 되어, 의정활동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2008년에도 양당 모두, 교체율 높이기 경쟁을 하다가 결국 거의 50% 가까이 교체했다.

정당 공천의 사유화

당시 공천이 엉망이 된 데는 이상득을 일찌감치 공천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이상득은 2008년 2월 29일 1차 공천자 발표에 포함됐다. 이후 사전에 세워놓은 공천 원칙들이 다 무너져 버렸다. 예를 들어 원래 65세 이상은 공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해 박희태도 날렸다. 그런데 이상득은 공천을 줬으니 그 뒤부터는 엉망이 된 것이다. 한편 원칙을 깨고 이상득에게 공천을 주면서, 친박이 반발을 하며 끼어들 수 있는 결정적인 빌미도 주었다.

권력의 사유화는 중앙 정부 인사에서 뿐만 아니라 당 공천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개혁 공천에 걸 맞는 사람, 경쟁력 있는 사람을 공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과거에는 계보를 중심으로 지분을 나눠서 챙기는 식으로 공천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2008년에는 MB는 MB대로, 최시중은 최시중 대로, 이방호는 이방호대로, 이상득은 이상득대로, 이재오는 이재오대로 자기 사람을 챙기는 사천(私薦)이 횡행했다.

돌이켜 보면, 청와대 정무수석이 이재오, 이상득, 최시중 등의 의견을 취합한 후 MB의 재가를 받고 이방호와 조정하는 식으로 공천 과정이 진행되어야 했다. MB도 같이 일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박재완 정무수석에게 역할을 주지 않고, 어정쩡하게 이방호에게 보고 받으면서 지침을 주는 식이 됐다. 나는 공천에 관여는 했으나 개입은 안 했다고 자신한다. 대신 부탁한 사람들에게 정보는 주었다. "그 판을 보니까 이 자리가 비었다, 이 자리가 약하다" 그런 정보였다. 그리고 이왕이면 이상득, 이방호, 이재오에게 인사를 하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하지만 공심위 과정에서 이 사람이 공천을 받게 해달라고 한 적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나도 정권 창출에 공이 있으니 주장할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면 나중에 나도 할 말이 없어지고 공범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개입까지는 하지 않은 것이다.

2008년 3월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경북 포항시 남구 해도동 자신의 선거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출마 결심을 밝히고 있다.

소위 '55인 사건'의 전말

대선 때부터 이상득은 출마하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해 온 나는 이상득 공천이 미리 확정이 돼버리니 무척 열을 받았다. 나는 내가 손해 보는 건 참아도 사리에 맞지 않는 건 못 참는 성미다. 당시 이상득 공천 생각만 하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상득 때문에 원칙도 뭐도 없이 공천이 진행되고, 앞으로 국정이 이런 식으로 운영이 되면 국민이 이 정권을 신뢰하겠는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국정 운영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 나는 혼자서 속을 끓이다가 출마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출마하겠다고 선언문까지 메모한 후 김원용에게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교수가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덜컥 그 얘기를 해버렸다. 김원용 교수로부터 MB가 나와 함께 점심을 먹자고 연락이 온 게 3월 4일이다. 대통령 사저에서 밥을 먹는데 MB의 첫마디가 "한 석이라도 아껴야지 무슨 불출마냐. 내게 생각이 있으니 이상득 문제는 내게 맡겨라" 했다. 이상득 불출마와 관련해 무언가 복안이 있다는 뉘앙스였다. MB가 그런 맥락으로 말하니 나는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득은 출마 행보를 계속했다. 2008년 3월 22일 나와 정태근이 만나 '이상득 출마'를 성토하고 있는데 이재오로부터 정태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재오는 "도저히 못 참겠다"고 했다. 당시 언론은 연일 '이상득과 이재오가 공천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을 한다'고 써댔다. 이재오는 실제로는 공개적으로 이상득에게 그만두라고 한 적도 없었다. 언론이 나와 정태근 등이 한 것을 이재오가 배후인 것처럼 오해하면서 이상득 대 이재오의 권력투쟁으로 몰고 간 것이다. 정태근은 "그러면 선배님도 출마하지 말아야 합니다"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며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모이자고 했다. 내가 현장에 도착하니 진수희, 정태근, 공성진, 권택기, 김해수 등이 모여 있었다. 이재오가 밤 11시 호텔에 들어서면서 내뱉은 첫 마디가 "권력투쟁 한다고? 그럼 '하면 될 것' 아냐?"였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출마 안하고 이상득도 출마 안 하면 될 것 아냐?" 라고 했다. 사실 그는 이때 은평 을에서 낙선이 확실시 되고 있었다. 은평 을에서 죽느니, 이상득을 붙들고 죽는 게 명분이라도 얻어 재기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와 정태근이 "대표님만 출마하지 않고 이상득은 출마할 것 같은데, 그럼 대표님은 뭐가 됩니까?" 했더니 "그러니까 너희들이 도와줘야지" 라고 말했다. 그날 밤 나와 정태근은 의원들을 모아서 서명을 받고 이재오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짓기로 하고 헤어졌다.

공성진이 서울시당위원장일 때라서 시당 사무실이 반란군 캠프가 되어 서명 작업을 했다. 일단 24일 오후 4시에 29명의 총선 후보자들이 '이상득 불출마'에 서명을 했다. 나중에 인원이 더 늘어 55명이 돼 이후 '55인의 반란'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청와대로 가 담판하겠다던 이재오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는 이의원의 측근이었던 진수희에게 "대표님 왜 연락이 없냐"라고 물었더니 "대통령이 안 만나준다. 청와대측에서 면담 일정을 안 만들어준다"라고 했다. 나는 청와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정두언 :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왜 이재오의 면담을 안 시켜주나?"

청와대측 : "면담을 안 시켜주는 게 아니다. 이재오가 연락이 안 된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재오는 담판은커녕 오히려 MB에게 설득당한 게 분명했다. 빨리 쐐기를 박아야 했다. 일단 오후 4시에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나보고 입장을 이해하니까 서명 작업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다. 정권 창출 공신인데 서명까지 하는 것은 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성격상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기자실에는 나가지 않고 서명만 했다. 서명파들은 그날 밤 늦게까지 이재오를 성토하며 술을 먹었다. 얼마나 통음을 했는지 나중에 동석한 기자가 술값을 냈을 정도였다.

MB가 55인 서명 사태가 있을 때 박재완 정무수석에게 "그럼 이상득 의원에게 출마하지 말라고 얘기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을 당시 정무비서관이던 장다사로를 시켰다고 한다. 이상득 보좌관 출신인 장다사로를 보냈으니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55인 기자회견이 있기까지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인 이는 김용태 의원이었다. 그날 기자회견 문안도 김용태가 썼다.

그러나 2008년 3월 25일 이상득, 이재오는 출마 선언을 했다. 열을 받은 나는 평소 친분이 있던 연합뉴스 기자에게 전화했다. "인터뷰 하자." 결국 이 인터뷰(※별첨)로 내가 55인 반란 사건의 주동자가 됐다. 처음에는 주동자가 아니었으나, 주동자를 자임한 것이었다. 이상득 한 명 때문에 55인이 다 궁지에 몰렸기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이상득 하고 한번 싸워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당시 55인 기자회견에 나선 이들은 당시 청와대와 당이 인사만 제대로 하면 총선에서 개헌선인 200석 가까이 까지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사 파문 등이 터지면서 하루에 의석 한 석이 날아가는 흐름이었다. 이 흐름을 저지해야 했다. 이것이 극대화 된 것이 55인 파동이다. 당시 실제 사건의 주동자는 이재오였기에 대통령으로부터 설득을 당해 다시 출마하기로 했으면, 우리를 만나서 설명을 해줘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아무 설명이 없었다. MB는 당시 이재오에게 이런 식의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당신이 국회에 있어야 내게 힘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선거 운동 중에 MB는 이재오의 지역구인 은평뉴타운을 방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기에 방문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MB의 은평 방문은 결과적으로 이재오가 낙선하는 데 확실하게 일조를 했다.

이와 관련해 내가 아직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 게 있다. 그때 박사모가 힘이 무척 셀 때다. 총선에서 이재오, 이방호, 전여옥, 박형준을 날린 게 박사모였다. 사실 한나라당의 대통령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를 유일하게 공격한 건 나였다. 그런데 박사모가 나는 왜 총선에서 건드리지 않았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2008. 3. 25 연합뉴스]

정두언 "충신들은 결국 승리한다"

"55인 생육신 당과 대통령 위해 나서... 이재오, 총선출마 너무 황당하다"

(서울=연합뉴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25일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당 일각의 불출마 요청을 뿌리치고 총선 후보 등록을 강행한 것과 관련, "우리의 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은 총선 후에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정 의원은 이날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 부의장 불출마를 요구한 55인은 오직 당과 대통령을 위해 나선 만큼 `생육신'으로 불러줬으면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특히 "역사를 보면 충신들이 일시적으로 패배할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항상 승리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장파들의 이 부의장 불출마 요구에 합세한 배경에 대해 "그 길만이 진정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며 "손해를 보는 것은 참아도 이치에 안 맞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내 미래가 불투명해져도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일에 명분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 같은 발언은 이 부의장 불출마 등을 촉구한 공천후보 55인의 `거사'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명분을 갖고 있었다는 점과 이 부의장의 출마가 `잘못된 선택'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는 한편, 4.9 총선이 끝난 뒤에도 계속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정 의원은 이날 이재오 의원이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 출마를 택한데 대해서도 일종의 `배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이 의원의 총선 출마 회견을 접하고 모두 황당해 하고 있다. 이 의원은 자신이 `바른 길이니까 함께 갑시다'라면서 먼저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출마하겠다고 하니 너무 황당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 의원과의 일문일답.

-`이상득 불출마 성명 거사' 주도자가 정두언이란 분석이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남경필 의원이 문제제기를 한 뒤 더 이상 상황 변동이 없자 수도권은 계속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반응이 커지는 가운데 수도권을 위주로 사정이 어려운 의원들이 남 의원을 뒷받침하자고 해서 나섰으나 잘 안 됐다.

이후 이재오 의원이 불출마하겠다고 나서자 이 의원 혼자 희생물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소장파들이 뜻을 모으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장파들이 나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했고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어 돕게 됐다.

-이 부의장 불출마 요구에 참여하게 된 본질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그 길만이 진정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손해를 보는 것은 참아도 이치에 안 맞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또한 후배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미래가 불투명해져도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일에 명분이 있었다.

-이상득 부의장은 총선에 출마하게 됐다.

▲우리는 원래 이상득 부의장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라왔다. 그렇기 때문에 불출마가 이상득 부의장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존경받고 사랑받는 원로로 남을 수 있다고 봐서 불출마를 요구한 것이지 개인적으로 배척한 것은 아니다. 권력투쟁의 요소도 전혀 없는 것이다.

-결국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 소장파들이 상처를 입은 것 아닌가.

▲어느 정도 상처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득 부의장의 불출마를 요구한 55인은 오직 당과 대통령을 위해 나선 만큼 `생육신'으로 불러줬으면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용기있게 얘기했다는 점 자체는 평가해줘야 한다. 한나라당도 살아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 부의장이 그러한 충정을 받아줬으면 총선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수 있었는데, 우리의 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은 총선 후에 평가받을 것이다.

-이상득 부의장의 출마가 총선에 악영향을 주게 되나.

▲이미 오래 전부터 악영향을 줘 왔다. 당 지지율이 60%대에서 30%대까지 떨어졌으니 한달 전부터 사흘에 1명씩 국회의원이 날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현장에서는 그런 악영향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크게 이기고 있다가 역전당한 후보가 한 둘이 아니다. 이는 과반 의석 확보에 비상이 걸리면서 대통령에 누가 되는 것이다. 이를 우려해 우리가 한나라당과 대통령을 위해서 나선 것이다.

-이번 사태의 결말이 총선 이후 당내 권력구도에 영향을 줄까.

▲자꾸 권력투쟁으로 몰고 가는 시각은 잘못됐다. 굳이 얘기하면 충신들이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충신은 주군만을 생각하고, 간신은 주군을 위하는 척 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게 간신이다. 역사를 보면 충신들이 일시적으로 패배할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항상 승리한다. 총선 결과가 모든 것을 평가해줄 것이다.

-이재오 의원은 결국 출마키로 했는데.

▲모두 황당해 하고 있다. 이재오 의원 같은 경우 자신이 `바른 길이니까 함께 갑시다'라면서 먼저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출마하겠다고 하니 너무 황당하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국정운영과 인사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 너무나 할 말이 많지만 총선 승리가 중요한 이 시점에서 참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끝)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치는가

9. 대선캠프의 변질

10. 백해무익한 정권 인수위

11. 인수위 시절의 어두운 비화들

12. 남북관계를 절단 낸 비밀 접촉

13. 한반도 대운하의 포기, 4대강 살리기로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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