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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체제'의 붕괴

한 시대가 무너지고 있다. 무너지는 것 대부분은 '72년 체제'의 산물이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과 중화학공업과 수출주도 성장 전략과 저부담 저복지 체제가 들어온 시기다. 반대자에게는 폭력을, 측근에게는 특권을, 재벌에게는 독점을, 노동자에게는 저임금 일자리를 주는 전략으로 지탱하던 국가가 심은 씨앗들이다. 국가는 경제성장이라는 꽤 그럴듯해 보이는 대가를 얻었다.

  • 이원재
  • 입력 2016.11.02 11:02
  • 수정 2017.11.03 14:12
ⓒ연합뉴스

한 시대가 무너지고 있다. 대통령의 비선실세 의혹, 그리고 청와대 측근들의 일탈은 무너지는 시대의 중요한 상징이다. 하지만 무섭게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사실 한국 경제체제 전체다.

조선업과 해운업의 상처는 국민의 세금으로 지혈 중이다. 철강과 석유화학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3분기 실적은 재앙 수준이다. 제조업 전체가 마이너스 성장에 진입했다.

분양권 열풍에 편승한 건설투자를 빼면 연간 경제성장률은 1%대로 추락한다. 전세계 교역량이 줄면서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구호는 이제 짐이 됐다. 수출이 줄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무너지는 것 대부분은 '72년 체제'의 산물이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과 중화학공업과 수출주도 성장 전략과 저부담 저복지 체제가 들어온 시기다. 반대자에게는 폭력을, 측근에게는 특권을, 재벌에게는 독점을, 노동자에게는 저임금 일자리를 주는 전략으로 지탱하던 국가가 심은 씨앗들이다. 국가는 경제성장이라는 꽤 그럴듯해 보이는 대가를 얻었다.

그 체제가 붕괴 중인 지금, 사고를 수습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도록 도와야 할 책임을 진 정부는 사라지고 없다.

정부는 대우조선을 연명시키기로 결정했다. 바로 지난해 분식회계 의혹을 받으면서 5조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청와대 서별관회의 결정으로 4조2천억원이 투입됐던 기업이다. 10억원 이상을 들여 받았던 컨설팅 결과도 가볍게 무시한 채 조선업계는 3사 체제를 유지하게 됐다. 위기는 몇 년 뒤로 연기됐다. 그 몇 년 동안 정부가 새로 배를 주문하기 위해 투입하는 세금 11조원이 그들의 일용할 양식이 될 것이다.

부동산 정책도 위기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2년 전까지도 빚내서 집 사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던 정부는, 요즘은 부동산 안정대책을 내놓겠다고 말만 꺼내놓고 미적거리는 중이다. 그사이 서울 강남지역에는 평당 4천만원이 넘는 곳이 속출하고, 전월세 가격 상승 속도는 그야말로 파동 수준이 됐다. 아파트 분양 붐이 가라앉으면 경제성장률의 절반 이상이 날아간다는 진실이 두려울 뿐이다.

다들 대통령과 측근들의 처신에 눈과 귀가 묶여 있는 듯하다. 그런데 지금은 한 시대를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까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이전 세대의 시대가 잘 정리되어야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게 된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정부는 정리할 힘도 능력도 의지도 잃었다. 새로운 시대는 영영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구시대를 정리할 힘을 잃은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국정에서 손을 떼야 한다. 국회에서 추천하는 국무총리를 임명해 당분간 국정을, 특히 어려워져 가는 경제 상황을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다만 이 총리의 권한은 과거 시대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일에 전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2017년에 새 권력이 세워지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이들이 새로운 비전을 들고나와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72년 체제'는 이제 완전히 물러날 때가 됐다. 그 구성물과 그들을 지탱하는 사람과 관행을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고체계부터 시작해 재벌체제도, 수출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도, 부동산에 목매는 경제구조도, 민간에 군림하는 정부시스템도 정리되어야 한다. 이들을 정리하는 것이 '72년 체제'를 살아온 산업화와 민주화 세대에게 마지막 남은 일이 되어야 한다.

그 뒤 어떤 시대가 열릴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낡은 것이 버티고 서 있는 한 새로운 것은 싹을 틔우지도 못한 채 말라 죽을지 모른다. 모두가 말라 죽고 나면, 과거를 만들고 운영한 이들은 다음 세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것인가. 그때까지도 남 탓만 하고 있을 것인가.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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