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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성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잘 살 것이다": 고려대 성폭력 피해자의 강력한 대자보(전문)

ⓒ연합뉴스

"너는 아마 잘 살 것이다. 나처럼 소화불량에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불면증에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택시에서 강제추행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로 택시를 타지 않지만 너는 별생각 없이 탈 수 있을 것이다. (…) 네 선배와 네 교수이지만 동시에 나의 선배와 나의 교수도 되는 사람들이 너의 미래만을 생각해 탄원서를 작성하고 감형을 도왔기 때문이다."

고려대에서 성폭력 피해 학생이 가해 학생과 함께 계속 학교에 다니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2일 고려대와 고려대 여학생위원회에 따르면, 2년 전 동료 학생인 서모(24)씨에게 성폭력을 당한 A(여)씨는 이번 학기부터 서씨와 함께 학교생활을 해야 한다.

서씨는 2014년 10월 A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당시 만취 상태였던 A씨의 신체를 만지고, 택시를 서울 성동구의 한 숙박업소 앞에 세운 뒤 모텔로 끌고 가려 하는 등 강제추행했다.(구체적인 범죄 행위는 기사 하단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심 법원인 서울북부지법은 초범인 데다 어린 대학생이며, 지도 교수와 선배들이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서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성폭력 치료강의 80시간 수강과 사회봉사 80시간을 선고했다.

그러나 서씨의 항소로 올해 1월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인 서울북부지법 형사1부(홍승철 부장판사)는 원심이 너무 무겁다며 벌금 700만원에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로 형을 감형했다.

서씨가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했지만, 들뜬 분위기에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며 피해자와 다시 마주치지 않을 방편으로 의무경찰 입대 신청을 했다는 이유였다.

또 피해자가 학교 양성평등센터에 신고해 열린 고려대 학생상벌위원회는 지난해 3월 서씨에 대해 두 학기 정학(지난해 2학기까지 정학) 처분을 내렸다.

피해 학생이 학내에 게시한 대자보

그러나 서씨는 실제로 의무경찰에 입대하지 않고, 항소심 판결이 나온 지 반년만인 올해 9월 학교에 복학했다.

A씨는 최근 학교에 대자보를 붙여 성폭력 가해자와 함께 학교에 다녀야 하는 상황을 고발하고 가해자와 남성에게 유리한 사회적 상황과 주변의 반응을 비판했다.

고려대 여학생위원회는 "서씨가 자숙의 기간을 가지라는 양성평등센터의 지시를 어기고 동아리 활동을 하는 등 교내를 돌아다녀 A씨의 학교생활은 자유롭지 못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서씨 징계와 관련해 A씨에게 주어진 재심의 요청 기간은 단 열흘뿐이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와 위원회는 서씨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해 퇴학 처분하고 재심의 규정을 고칠 것을 학교에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대 측은 이미 징계가 확정된 사건에 대한 재심의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A씨의 대자보 전문

"잘 살 것이다"

너는 잘 살 것이다. 성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잘 살 것이다. 학교는 고작 8 개월의 징계를 내렸고, 법원은 네가 군입대할 경우 피해자인 나와 자동 격리된다는 네 변명을 받아들여 징역 6 개월, 집행유예 2 년을 벌금 700 만원으로 깎아주었기 때문이다. 반성을 위해서 혹은 격리를 위해서 군 입대를 하겠다는 네 궤변은 차치하더라도 너는 입대를 하기는커녕 학교 징계 기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복학해 피해자인 나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격리를 위한다는 그 변명이 무색하게도 지인에게 네가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군 복무 의무를 감형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곳에서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지르고도 너는 잘 살 것이다. 사내새끼가 그럴 수도 있다고 용인되는 곳에서 너는 참 잘 살 것이다. 네가 법원에서 그토록 간절하게 항소한 것과 다르게, 너는 군대도 가지 않아도 되며 학교에서 준 8 개월의 정학을 자격증 시험을 위한 밑거름으로 활용하였다. 범죄자인 네가 복학을 한 이유, 내 지인과 연락을 하는 이유, 떳떳하게 고개 들고 다니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다. 네게 강제추행은 잊혀질 일이고, 한때의 치기인 일이고,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네 부모를 포함해 고소와 관련된 사람을 제외한 네 지인들 중 네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네 부모는 너를 두둔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원치 않는 “사과”가 담긴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해대며 군대 보내서 사람 만들겠다고 말 한 것일 테다.

너는 “별 거 아닌 일”로 고소까지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왜 고소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고 처음 양성평등센터로 호출 당했을 때 본인을 “범죄자 취급”해서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네게는 별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별 것 아닌 일"은 나를 2 년 내내 꼬박 따라다녔다.

너는 아마 잘 살 것이다. 나처럼 소화 불량에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불면증에 괴로워 하지도 않을 것이다. 택시에서 강제추행이 일어났기 때문에 난 그 이후로 택시를 타지 않지만, 너는 별 생각 없이 탈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강제추행을 저지른 성북동 모텔 앞을지나야할때 고개를 돌리는 나와 달리 너는 거부감없이 지나다닐 것이다.

계속해서 말한다. 너는 잘 살 것이다. 네가 주민등록증 앞에 말한다. 너는 잘 살 것이다. 네가 주민등록증 앞에 1을 달고 태어난 덕분이고, 나름 좋은 대학을 온 덕에 법원에서 미래가 있다고 본 까닭이고, 술을 먹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감형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네 선배와 네 교수이지만 동시에 나의 선배와 나의 교수도 되는 사람들이 너의 미래만을 생각해 탄원서를 작성하고 감형을 도왔기 때문이다. 자격증 시험 준비 때문에 미루었던 군 복무에 대하여, 뻔뻔하게도 법원에 “격리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편”으로 의경 입대 신청을 했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범죄자의 장래를 걱정하고 범죄자의 장래 만을 위하는 곳에서 너는 잘 살 것이다.

그리고 나도 잘 살아갈 것이다. 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성폭력과 성추행을 소비하는 것처럼 자아에 깊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네가 트라우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망가지지도 않았고 "수치심"에 절여 지지도 않았다. 비록 간간히 억울해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그렇게 선 딱딱 긋고사는거 아니라는 소리를 들어도 나는 잘 살 것이다. 티를 내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으므로 나는 잘 살 것이다.

너의 부모는 네게 전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계속 자격증 공부를 하게 해주었고 비싼 변호사를 선임해주었다. 나의 부모는 아직까지도 이 일에 대해서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잘 살 것이다. 잘 살아갈 것이다. 잘 살아가려 노력할 것이다.

너는 잘 살 것이다. 나도 잘 살 것이다. 두 문장의 차이가 나는 불쾌하다. 나의 잘 살 것과 너의 잘 살 것은 왜 이다지도 다른가. 나의 “잘 살 것이다”는 내가 버텨내야 하는 현실에 기반하는데, 너의“잘 살 것이다”는 왜 법원과 학교로부터 당연하게 주어지는가. 역겹다. 너의 잘 살 것임이. 그리고 나의 잘 살 것임이. 너는 잘 살 것이다. 술 먹고 저지른 일이기에, 기억 안 난다고 우기면 기억이 안나는 것이기에, 남자이기에, 고려대에 다니기에, 선배와 교수가 너를 위해 기꺼이 탄원서를 써주기에. 너는 잘 살 것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너는 이미 너무나도 잘 살고 있다.

고려대 여학생위원회의 입장

성범죄자와 함께할 수 없다

여학생위원회는 해당 사건(“잘 살 것이다” 대자보)을 사건 당사자로부터 제보 받았다.

여학생위원회는 제보자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해당 사건의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건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2014년 10월 12일 : 성범죄자 A는 새벽 5시 경, 정기 고연전 뒤풀이 자리가 끝나고 B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B의 의사에 반하여 B의 얼굴, 가슴, 음부 등 신체를 강제 추행하고, 술에 취한 B를 성동구청 부근 모텔 앞에서 내리게 한 다음 강제로 모텔로 끌고 들어가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발기된 성기를 B의 신체에 비비는 등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언행과 욕설을 하였다.

2014년 10월 13일 : B가 A를 양성평등센터에 강제 추행(성추행) 가해자로 신고했다.

2014년 11월 18일 : 양성평등센터 조사위원회 심의결과가 나왔다. 학생상벌위원회에 A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기로 했다.

2015년 3월 2일 : 학생상벌위원회 심의결과가 나왔다. A를 2015년 2학기까지 정학 처분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A는 정학 상태로 CPA를 준비하고 의무경찰 복무신청을 했다.

2015년 5월 28일 : 형사소송 판결이 선고되었다.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명령 및 80시간의 사회봉사명령.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피고인을 지도하는 교수, 피고인의 선배 등 많은 사람들이 피고인의 장래를 걱정하며 피고인의 잘못에 대한 선처를 탄원하고 있는 등 긍정적으로 고려할 양형요소가 있다.”

2016년 1월 14일 : 항소 판결이 선고되었다. 원심판결 파기, 벌금 700만 원.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피해자가 재학 중에는 피해자와 다시 마주치지 않도록 사실상 격리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편으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입대할 수 있는 의무경찰 복무신청을 한 것으로 보이는 점 및 …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보면, 원심이 피고인에게 선고한 형은 다소 무거워서 부당하다.”

2016년 9월 1일 : A와 B는 함께 복학했다. 학교는 이에 대한 어떠한 고지도, 대비도 하지 않았다. B는 이 사실을 학기 시작 며칠 전에야 지인을 통해 인지했다.

2년 동안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건조하게 정리된 사건 개요에조차 구멍들이 산재한다. 사건 개요에 포함되지 못한 구멍들은 더욱 많다. 가령,

- 양성평등센터와 변호사를 통해 연락하지 말라는 의사를 강력하게 전달했음에도 A와 A의 가족들은 B에게 수차례 연락을 하여 2차 가해를 저질렀고,

- 양성평등센터에서 자숙의 시간을 가지라고 했음에도 A는 동아리 활동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교내를 돌아다녔고,

- A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B는 2014년도 2학기를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보내야 했으며,

-그러한 상태인 B에게 허락된 재심의 요청 기간은 단 10일뿐이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피해자보다 성범죄자에게 훨씬 더 친절한 고려대학교 사회는 돌아온 성범죄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그들의 시선에서 성범죄자는 이미 충분한 벌을 받았고,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되었다. 이는 2년 전, 성범죄를 저지른 학생/후배의 장래를 걱정하여 탄원서를 써주었던 교수/선배들이 고려대학교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피해를 입은 자는 아랑곳없이 성범죄자의 미래를 걱정해주는 고려대학교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문제 해결의 시점조차 가해자를 중심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은 가해자가 반성의 의미가 담긴 언어를 말하고 징계를 받는 시점이 아니다. 가해자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가 끝이라고 인정할 때까지,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에 요구한다.

“학교는 해당 성희롱 사건을 전면 재검토하고,

그간에 발생했던 모든 미흡했던 부분들을 직접 찾아내 사과하고 시정하라.”

이 요구에 성실히 응한다면, 이내 아래의 질문들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고려대학교는 단 한 번이라도 학내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해결한 적이 있는가?

- 고려대학교는 학내 성폭력 사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 인지하고 있는가?

- 학생사회는 가해자를 가해자답게 대하는가?

- 교수.강사.교직원들은 성폭력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있는가?

- 학생상벌위원회와 가해자에 대해 아무런 강제력도 갖지 못하는 양성평등센터의 위상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 군 입대, 휴학 등으로 대체될 수 있는 정학 처분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 10일이라는 재심의 요청 기간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반성하는 동안, 우리는 함께하자.

이러한 질문들은 해당 사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당 사건을 넘어 확장될 것이다. 부당한 사례가 한 군데로 모인다면 승산은 커진다.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는 당신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당신을 녹아들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가 틀렸다. 당신이 옳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훨씬 더 친절한 학교와 학생 사회가 틀렸고, 가해자를 위해 절절한 탄원서를 제출하는 교수들이 틀렸고, 이 모든 걸 옹호하는 ‘법의 논리’가 틀렸다. 당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바로 녹아들어서는 안 될 존재다.

우리는 고립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기력을 버리고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가 모이고 나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

고려대학교 여학생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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