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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사태와 노예 민주주의

최순실의 파렴치한 행각은 분명 엽기적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지난 4년 동안 청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정부, 여당, 대기업은 물론 학교와 대학에서도 그의 불법-탈법-초법적 행태가 '아무런 저항 없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는 장관들, 대통령의 수족에 불과한 청와대 인사들, 대통령의 '상머슴'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있는 여당 정치인들, 권력자의 한마디에 즉각 수십억원을 갖다 바치는 재벌들, 부당한 압력에 무릎 꿇고 이득을 취하는 교수들-이들의 행태는 주인 앞에서 설설 기는 노예의 모습 그 자체다.

  • 김누리
  • 입력 2016.10.31 06:38
  • 수정 2017.11.01 14:12
ⓒ연합뉴스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최순실 공화국',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 속에 '탄핵', '하야'라는 말이 어린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시국선언과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가히 '혁명 전야'의 분위기다.

최순실의 파렴치한 행각은 분명 엽기적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지난 4년 동안 청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정부, 여당, 대기업은 물론 학교와 대학에서도 그의 불법-탈법-초법적 행태가 '아무런 저항 없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요즘 최순실은 공민왕 시대의 신돈이나 제정 러시아의 라스푸틴에 곧잘 비유된다. 그러나 신돈과 라스푸틴은 '왕이 곧 국가'였던 봉건시대의 인물이다. 최순실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에서 국가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점에서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순실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봉건시대 군주국 수준에도 미치지 못함을 폭로한다.

토론은커녕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는 장관들, 대통령의 수족에 불과한 청와대 인사들, 대통령의 '상머슴'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있는 여당 정치인들, 권력자의 한마디에 즉각 수십억원을 갖다 바치는 재벌들, 부당한 압력에 무릎 꿇고 이득을 취하는 교수들-이들의 행태는 주인 앞에서 설설 기는 노예의 모습 그 자체다. 민주공화국에서 '지도층 인사'란 자들이 사실은 하나같이 권력의 노예였던 것이다.

장관, 재벌, 정치인, 교수 등 '지도층 노예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조직에선 절대권력자들이다. 그들은 윗사람에게 노예로 행세하듯, 아랫사람에게는 잔인한 주인으로 군림한다. 이들의 지배를 받는 공무원, 노동자, 당원, 학생들은 노예처럼 행동하기를 강요받는다. 권력에 굴종하는 노예근성은 다시 굴종을 강요하는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성격'의 인간형이다. 물론 이들은 앞에선 노예인 척하면서 뒤에선 담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궁리만 하는 노회한 무리들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없다. 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선거를 치르고, 법치를 외친다 해도, 그건 허울뿐이다. 권위주의와 노예근성에 의해 굴러가는 사회는 '노예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이 나라의 지배자들이 펼치는 철면피한 거짓말 퍼레이드는 그들이 국민을 노예로 얕보고 있음을 방증한다. 거짓말은 노예를 대하는 주인의 전형적인 버릇이다. 국민을 노예, 심지어 '개돼지'로 보는 그들에게 거짓말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 노예에게 하는 거짓말은 양심의 가책조차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노예 민주주의' 사회에선 선거도 민주주의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 그건 기실 노예들이 4년 혹은 5년에 한번씩 투표를 통해 새 주인을 뽑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문제는 최순실이 아니라 민주주의다. 이번 사태를 한국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실체적 민주주의로, '노예 민주주의'에서 '주권자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최순실 사태로 개헌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제 국민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놓고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오로지 대통령 뽑는 절차에만 초점을 맞추고 국민의 권리 신장은 도외시한다면, 이는 국민의 노예 상태를 영속시키려는 기득권의 책략으로밖에 볼 수 없다. 모든 개헌 논의의 초점은 국민주권을 강화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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