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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있었던 기괴한 섹스에 대한 관습 4가지

유럽의 중세라고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다. 엄격한 신앙, 암흑의 시대, 무지에서 비롯된 미신과 공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지만 어떤 시절이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빼먹고 지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후손을 만들고 즐거움을 누리는 일은 언제나 한 세대도 거르지 않고 반복되어 왔다. 다만 시대에 따라 그 즐거움을 누리고, 인정하는 방식을 조금씩 달랐는데, 중세 시절 또한 마찬가지였다. 섹스와 결혼을 둘러싼 중세의 관습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1. 찾아가는 밤

"...마을 총각들은 때로는 지붕을 통해서, 처녀 방이 다락방 곁에 있을 경우는 다락방 창문을 통해서 처녀의 방에 들어갔다. '찾아가는 밤'의 총각들은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보다도 더 위험한 방법으로 처녀의 방을 찾아갈 수 있을지 고심하였다 가급적이면 모험에 찬 밤의 방문을 하고자 한 이유는 중세의 기사를 흉내 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처녀의 방을 어렵게 찾아가면 갈수록 처녀에 대한 사랑의 크기 또한 크다고 생각했으므로 가급적이면 기이한 방법을 택하려고 애를 썼다." (책 '중세의 뒷골목 사랑', 양태자 저)

중세 시대 남자들은 여자에게 구혼하기 위한 시험을 거쳐야 했는데, 그 중 한 가지 절차가 찾아가는 밤이었다. 찾아가는 밤은 남자가 여자에게 구혼을 하기 위해 집에 찾아가는 일을 뜻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시간은 밤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문을 통해 들어가서는 안 되고 벽을 기어 올라가든, 지붕을 타고 위에서 내려오든 하여튼 어렵고 위험한 방식으로 여자의 방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사랑의 크기'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시험하는 하나의 방편이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그냥 자식을 쉽사리 내주고 싶지 않은 부모의 심술이 만들어낸 풍습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단, 그렇게 찾아간 그 날 밤은 절대 밤은 지새면 안 되고 몇 시간 동안 잡담만하다 나가는 것만 허용되었다고 하니, 생각보다 매우 건전한 풍습이었던 셈. 물론 찾아가는 밤 이후 임신을 한 채 결혼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디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2. 결혼을 도와주는 남자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할 때는 이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여자는 생식 능력이 있는데 남자가 생식 능력이 없을 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피해를 막고자 나온 풍속이 있었다. '결혼을 도와주는 남자'라는 풍속이었다. 중세에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확실하게 남자에게 있다면 아이를 낳는데 도움을 줄 남자를 찾아 나섰는데 이런 남자를 '결혼을 도와주는 남자'라고 칭했다. 자손을 만들기 위해서 이웃 남자의 정자를 빌린다는 뜻이다. 발하우스에 의하면 주로 이웃집의 친구에게 의존했다고 한다." (책 '중세의 뒷골목 사랑', 양태자 저)

보통 임신 능력이 없는 여성을 집에서 쫓아내는 걸 우리 말로 '소박 맞는다'고 표현하는데, 이런 '소박'은 유럽의 중세에도 존재했던 모양이다. 다만 남성이 임신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방법이 조금 달랐다. 대리모 대신 '대리부'를 남편이 직접 찾아 나섰던 것이다. 주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남자에게 찾아가 부탁했고, 대개의 경우 부탁 받은 사람은 흔쾌히 청을 받아들여 이웃집 아내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남편은 첫날밤이 끝내기를 기다렸다 닭 요리를 만들어 둘을 대접했다고 하니, 기상천외하긴 해도 자손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중세 시절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를 악용해 먼저 자신의 아내와 하룻밤을 보내달라 부탁해놓고 중간에 들어와 간통을 저질렀다고 난리 치며 돈을 갈취하는 부부 공갈단 또한 존재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간혹 사회면에 등장하는 기사와 레퍼토리가 흡사한 것을 보면 공갈범들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다.

3. 마을의 왕

"...풍요와 수확을 기리는 게르만족의 5월의 축제가 다가오면 마을에서 가장 힘 세고 건강한 남자를 선발하여 '마을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왕은 이때 처녀를 제공(?)받았는데 선택된 처녀는 여왕이라고 불렸으며 그들은 공식적으로 성애를 여러 차례 가져야 했다. 왕과 여왕이 성애를 많이 가질수록 비례해서 그 마을이 풍성한 농작물을 거둘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책 '중세의 뒷골목 사랑', 양태자 저)

사람의 다산과 곡식의 풍작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꼭 중세가 지구 곳곳에서 발견된다. 중세 시절 유럽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중 게르만 족은 이를 아예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풍습을 하나 만들었는데, 마을에서 가장 건장하고 힘 센 남자를 하나 골라 '마을의 왕'이란 칭호를 붙여주고, 마찬가지고 여자를 한 명 골라 '여왕'이란 칭호를 붙여준 후 섹스를 최대한 자주, 많이 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당시 게르만 족들은 이들이 열심히 섹스를 할 수록 마을의 그 해 풍작이 보장된다고 믿었다. 막상 왕으로 뽑힌 남자, 그리고 여왕으로 선택된 여자의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해 보면 그리 좋았을 것 같지는 않다. 본인이 원하는 상대를 고르지도 못하고, 섹스 횟수 역시 마을 사람들이 체크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그게 왕과 왕비의 숙명(?)인지도 모르지만.

4. 교회가 정해준 '하면' 안 되는 날

"교회에서는 성애를 해서는 안 되는 날을 정해 주었다. 크리스마스 20-40일 전, 부활절 전 40일간, 성신강림절 2주 전과 그 1주일 후, 금요일부터 토요일, 일요일은 금지했고, 축제일 전후, 심지어 교회에서 영성체를 받아먹기 3일 전부터는 성애를 하지 말락 했다. 결혼식 당일 밤과 그 이후 3일간 성관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다. 이런 교회법을 계산해 본 게오르그 덴젤러는 당시 부부가 교회의 지시대로 했다면 1년에 3분의 2는 성애를 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 '중세의 뒷골목 사랑', 양태자 저)

중세 시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이었고, 육체적 쾌락은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일까? 교회는 교회법으로 온갖 기념일을 정해놓고 그 전후로는 잠자리를 가지지 말 것을 법으로 공표하기도 했다. 어겼을 경우 3일간 빵과 물만 섭취하게 하거나 26솔리드(화폐 단위)의 벌금을 내게 시켰다고 하니, 진짜 구속력이 있는 '법'으로 부부의 섹스를 통제했던 셈이다. 너무 잦은 성교를 하면 일찍 늙고 빨리 죽을 뿐 아니라 뇌가 쇠약해진다는 설교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곧이곧대로 지켰으면 1년 중 3분의 2는 섹스를 하지 못했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이렇게 붐비는 우리들의 숫자가 그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란 것을 말이다. 많이 하면 일찍 죽는다는 설교가 이뤄졌다지만, 까짓 거 '죽어도 좋아!'를 외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북적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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