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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고대, 중세 사람들에게 '음식' 이상이었다.

빵은 우리에게도 보편화된 음식 중 하나다. 빵 소비가 해가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한국 사람들이 빵을 접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100년 남짓 될까? 1885년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소개한 빵이 최초라고 하니 길게 잡아도 130년 안팎이다. 우리와 달리 서양인들에게는 빵은 오랜 역사 그 자체다. 그래서 빵을 둘러싸고 벌어진 에피소드나 역사적 사건들도 우리보다 훨씬 많다. 서양에서 빵을 두고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빵이 가진 문화적 맥락을 살펴보았다. 한 음식이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받아들여지다 보면 음식 이상의 위치에 도달하는 법이다.

1. 이집트에서 빵은 화폐로도 쓰였다.

"이렇게 '제조'된 제품, 빵은 이집트인에게는 식량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문화적 수준의 척도였고 측량의 척도였던 것이다. '빵의 개수'는 부를 의미했다. 이집트 방방곡곡에 있는 오븐은 실질적인 화폐 주조공장이었다. 오븐에서 구워낸 밀가루 반죽은 마침내 전국의 화폐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임금은 빵으로 지급되었는데, 농민은 대개 하루에 빵 3개와 맥주 2병을 받았다(전설적인 영웅, 데디는 하루에 빵 500개와 맥주 100병을 받았다.)...구걸하는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는 것은 가장 추악한 범죄였다. 저승에서 양심의 심판을 받을 때도 한 영혼은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생전에 모두에게 빵을 주었다.""(책 '빵의 역사', 하인리히 E.야콥 저)

타민족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을 '빵을 먹는 사람들'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그만큼 이집트인들에게 빵은 자신들의 주식이었고, 동시에 문화와 기술적 수준을 자랑하는 일종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빵이 단순한 음식으로 취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빵은 이집트인들에게 곧 '돈'을 의미했다. '돈'을 받아 빵을 사먹는 게 아니라, '빵' 자체를 '돈'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대 이집트인들의 기록에는 '빵을 제때 주지 않았다.'는 내용의 불평이 자주 등장한다. 즉, 당시에도 임금체불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물론 파업도 있었고, 뇌물 또한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빵'으로 이루어졌다. '먹을 수 있는 갓 구운 따뜻한 돈', 아마 세상에서 가장 친환경적이면서도 관능적인 화폐가 아닐까 싶다.

2. 유대인들은 신에게 맛없는 빵만 골라 바쳤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빠져 나올 때 가져온, 발효가 덜 된 반죽으로 빵을 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집트에서 급하게 도망치느라, 달리 먹을 것을 준비하지도 못했던 터여서, 발효되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이윽고 모세가 말했다...해마다 이때를 기념하라...신은 다른 빵은 먹으려 하지 않았다. 야훼는 성막(聖幕)에서 백성들에게 제물을 받을 때, 제단에 오직 발효시키지 않은 빵만 올리도록 했다. 발효시킨 빵에 대한 금기는 계속 되풀이된다...." (책 '빵의 역사', 하인리히 E.야콥 저)

유대인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일부러 발효시키지 않은 빵만을 골라 바쳤다. 막상 자신들은 나머지 날들 동안 발효시킨 맛있는 빵들을 실컷 먹었으면서 말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도망치는 과정을 기록한 성경 출애굽기를 보면, 유대인들이 미처 제대로 된 반죽을 가져올 시간이 없어 발효가 덜 된 반죽으로 빵을 만들어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모세는 앞으로 이 날을 기념할 때는 발효되지 않은 빵을 먹으라고 지시한다. '역사적 재현 의식' 차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고대인들의 인식 속에서 '발효'와 '부패'의 과학적인 차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록 본인들은 맛있게 잘 먹어도, 감히 신에게 '썩은 음식'을 바칠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지 신선한 음식을 드려야 한다는 정성이 깃든 금기가 결론적으로 발효되지 않은 빵을 바치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의식은 그대로 한 민족의 문화가 되었다.

3. 로마에서 빵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공무원에 임명되었다.

"...이들의 노동은 고도로 숙련된 기능으로 인정받았다. 오늘날로 치자면 대중들에게 디자이너와 비슷한 직업으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이들의 기술이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것으로 여겨진 만큼, 사람들은 이를 '제빵기술'이라고 불렀다. 제빵소의 주인은 주로 해방된 노예로서, 지금까지도 로마에 그 비석이 잘 보존되어 있는 베르길리우스 에우리사케스처럼 정당하게 부를 쌓은 인물로 존경받았다...로마황제는 이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민생복지에 중요한 사람들'이라며 제빵사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특혜는 야망을 잉태했고, 마침내 그 야망이 실현되었다. 제빵사들이 시정 관료가 된 것이다..." (책 '빵의 역사', 하인리히 E.야콥 저)

예나 지금이나, '민생복지'의 첫 시작은 '걱정 없이 배불리 먹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더구나 여러 면에서 생산성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고대 국가에서 국민들이 먹을 식량을 가공, 생산하는 제빵사들이 특별한 취급을 받았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는 그래서 이들을 국가의 관리 하에 두기로 결정한다. 모든 제빵사들을 지금으로 치면 '농림부 장관' 휘하 하급관리들로 임명한 것이다. 자연스레 이들이 가지고 있던 258개의 빵 가게는 가게가 아닌 '국가기관'으로 격상되었다. 식량 수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로마 나름의 고심이 담긴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길드 조합원으로서, 장인으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제빵사들은 빵의 생산량을 국가가 정해주고, 이윤 없이 봉급만 받는 '사회주의적 방식'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 시장의 통제를 받지 않은 빵은 국가에 의해 과소, 혹은 과대 공급을 반복하며 여러 사람들만 애를 먹인다. 역시 '내가 나서면 해결될 것이다.'란 환상을 쉽게 가져서는 안 된다.

4. 빵 때문에 질 전쟁을 이기기도, 멀쩡한 사람이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빵이 피를 흘린다며 몇 백 년 동안 사람들을 전율시킨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미세한 생물이 온 인류를 천치바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제 이 무해한 미세균(피를 흘리는 빵도 다른 보통 빵처럼 소화시킨)이 인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조건을 밝히기 위해 실험에 착수했다. 브로츠와프 태생의 콘은 이 간균-그의 이름을 따서 '기적의 콘'이라고 교과서에 실린-이 일정한 습도와 따뜻한 온도가 유지되는 곳에서 붉은 색을 띤 물질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세인들은 왜 빵이 피를 흘리는 일이 겨울에는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책 '빵의 역사', 하인리히 E.야콥 저)

1501년 베를린, 유대인 38명이 화형 당했다. 성찬용 빵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이유였다. 불경죄였다. 더 예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항구도시 티투스를 포위 공격할 때, 빵 가운데에 붉은 피가 묻어있다는 사실이 고립된 티투스를 멸망시키라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져 순식간에 티투스가 함락된 일이 있었다. 때때로 신에게 바치는 빵에서 피가 흐르는 일은 신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로 받아들여졌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특히 유대인들-이 죽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독일 박물학 교수 에덴베르크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는 (당연하게도) 피가 아니었다. 간균이라 불리게 될 미생물이 특정 온도와 습도 하에서 붉은 빛을 띠었을 뿐이었다. 어이없는 미신이 억울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었다. 빵은 그처럼 서구인들에게 신과 인간 사이 매개체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음식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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