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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남편에게 섹스를 요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매우 길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관계는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어느 한 쪽이 이를 거절했을 때 존중해줄 의무가 있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2013년엔 '부부강간'을 인정한 최초의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각 배우자가 섹스를 거절할 권리와 요구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내가 '먼저' 남편에게 섹스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그리 간단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부부 사이 섹스에서 아내는 흔히 '성욕이 없어야 하는 존재'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오랜 시간을 책을 통해 돌아보았다. 무엇이든 저절로 주어지는 건 없는 법이다.

1.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에서 남녀 간의 결혼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결혼 형태로 인정받았을지라도 남편은 결코 성관계 상대를 자신의 아내로만 제한하지 않았다...공식적인 유일한 금단의 열매는 다른 시민의 아내였다...하지만 법은 상처 입은 아내에게 소구권(訴求權)을 주지 않았다...특히 자녀를 낳은 후에는 아내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이혼할 수 없었다."(책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저)

대개의 경우, 고대사회에서 이혼의 권리는 전적으로 남편에게 있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남편은 결혼한 후에도 남자 애인들과 동성애를 즐기거나 다른 여자를 만나곤 했지만, 여성에게 이를 이유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반면 남편은 아내 쪽 집에 지참금을 돌려주어야 하긴 했지만, '단순 변심'만으로 얼마든지 이혼을 할 수 있었고, 여기엔 아마도 '성관계'와 관련된 이유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특별법은 남편만이 아니라 아내에게도 남편에게 적어도 한 달에 세 번 섹스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긴 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오히려 당시 웅변가 아폴로도스가 아테네 남자는 세 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첫째: 후계자를 낳아주는 여자, 둘째: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져주는 여자(첩), 셋째: 쾌락을 즐기기 위한 여자(매춘부))으로 보아 당시 남편들이 한 달에 세 번을 온전히 아내에게 쓸 마음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아내는 후계자를 낳아주는 존재 이상은 아니었다. 욕망의 해소는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

2. 중세 유럽

"...중세 이래로 사제가 결혼식에 참여하기 시작했을 때, 결혼을 인정 받으려면 신방을 차리는 것이 의무 사항이었으므로 교회는 부부의 침실에서부터 결혼의 모든 단계에 영향을 미쳤다. 4세기에 교부들은 부부는 오직 출산을 위해서만 동침해야 한다고 설파했고, 그것은 중세에 강력한 교리가 되었다. 쾌락만을 위한 성생활은 격렬하게 비난 받았다. 특히 아내가 성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금지되었다. 아내는 수동적인 수용자로서 남편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고 남편과 열정을 공유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성관계는 부부간의 빚으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각각의 배우자가 상대방에게 진 빚이며 오늘날처럼 자연스럽게 공인된 즐거움이 아닌 엄숙한 의무였다."(책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저)

중세 유럽에선 이 같은 출산의 의무에 더해 '육체적 쾌락은 죄악'이라는 종교적 고정관념이 더해지기도 했다. 심지어 출산을 위한 성관계만을 가진 여자조차 성관계를 아예 가지지 않은 처녀나, 현재 가지고 있지 않은 과부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다. 기독교 신학자 히에로니무스는 "결혼한 여성들은 처녀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라."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 같은 인식이 상당한 권위를 가진 의견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중세 후기, 아이를 낳은 후 평생 남편과 성생활을 하지 않고 산 마저리 캠프의 자서전이 회자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온 누리에 섹스리스 부부가 넘쳐나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이상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3. 빅토리아 시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했던 여성의 처신에 대한 지침서들은 그녀들이 어떻게 가정에서의 책무를 다할 것인가에 대해 떠들어댔다. 1830년대와 184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출간되기 시작한 결혼지침서들은...여성들에게 가정의 평안을 책임질 유일한 사람은 그녀들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주입했다. 오직 여성들만이 자녀들의 도덕적, 육체적 건강을 책임질 수 있고, 남성들을 사회적 선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그들은 주장했다...그러나...여성을 천사로 취급하는 새로운 관점이 널리 퍼지면서 여성은 모든 육체적 욕망을 거세당했다. 저명한 영국인 의사 윌리엄 액턴은 "여성이 스스로 성적 희열을 추구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여성은 남편의 성행위에 몸을 내맡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성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책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저)

19세기 영국은 따뜻하고 견고한 중산층 가정에 대한 이상이 널리 퍼진 시기였다. 그리고 여성은 이런 가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로 높게 추앙 받았다. 그렇지만 거꾸로 이는 여성의 욕망을 부정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아내는 가정의 '천사'이기 때문에, 오직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행위를 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가르침이 책을 통해 전파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오귀스트 드베의 결혼지침서는 대놓고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르가슴을 연기'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여전히 '욕망하는 아내'라는 단어는 낯설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4. 1970년대 미국

"1970년대에는 여성 해방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와 논란을 일으켰다. 슐러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성의 방언(Dialects of Sex)’에서 남성의 억압으로부터 여성이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사회가 출산과 양육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저메인 그리어(Germaine Greer)는 ‘여자 환관(Female Eunucb)’에서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성적 노리개로 만들었다. 그녀는 여성이 가족과 결혼에 방해 받지 않고 남성이 누리는 것과 동등한 성적 자유를 획득하지 않는 한 완전히 해방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책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저)

196,70년대, 이런 상황을 바꾸는 일대 전기가 마련된다. 서구 사회에서 여성해방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면서 '여성의 욕망'을 긍정하는 다양한 저서들이 출간된 것이다. 여성이 굳이 가정에서 기쁨을 찾을 필요 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주장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와 동시에 보스턴 여성 공동체에서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이란 책을 펴내며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몸을 보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모유 수유, 유방암 등 여성의 건강과 관련된 문제에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는 운동 또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말 스탠포드 대학에서 진행한 여성의 성생활에 대한 보고서는 70년대 여성 해방 운동을 이끈 여성들의 어머니들 또한 '딸에 의해 기존의 성 관념이 바뀌고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예전에 비해 '성욕'이란 말이 비교적 고르게 사용되는(완벽하진 않지만) 사회에 살고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먼저 섹스를 요구하기까지, 적어도 수천 년이 필요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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