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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와 아야는 한국에 메시지를 보내며 왜 눈물을 참았나?

  • 박세회
  • 입력 2016.10.26 14:13
  • 수정 2016.10.27 06:44

도쿄특별구에 속하는 23개 구는 매우 특이한 행정 구분이다. 다른 도시의 구보다 큰 자치권을 행사한다. 구별로 구장을 뽑고 구의원을 뽑아 마치 하나의 독립된 ‘시’처럼 운영된다. 그중에서도 세타가야 구는 특별하다. 특별자치구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다. 대학이 가장 많고, 기업체 대표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일본 내의 정령지정도시(우리로 하면 광역시, ‘오사카’ 등)를 제외하면 행정단위로서는 전국 최대의 인구가 산다. 90만 명(성남시가 100만 정도)에 육박하는 인구와 부유한 지역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비교적 젊은 세대층.

일본 최초의 트랜스젠더 정치인인 가미카와 아야는 이 세타가야 구의 구의원이다.

2003년부터 4선에 성공. 장장 14년 동안 구의원으로 활동 중인 가미카와 씨(이후 '가미카와'로 통일)가 자신의 책 ‘바꾸어 나가는 용기’의 출간기념회 차 한국을 찾았다. 가미카와는 허핑턴포스트가 던진 질문에 눈물을 참았다.

- 허프 : 한국도 일본처럼 성 동일성 장애를 가진 사람이 호적상의 성별을 바꾸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일본과 다른 점이라면 성인도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반드시 성전환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설명해 주세요.

= 가미카와 : 트랜스젠더도 그렇지만 레즈비언인 친구들도 대부분의 경우 가장 커밍아웃하기 어려운 상대가 바로 부모입니다. 그 이유는 관계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죠.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당하는 건 사람으로서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가장 소중한 일을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지금 한국의 요건대로라면) 부모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법률상 성별을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족에게 인정도 받을 수 없는 이중의 고통이 됩니다. 사회 환경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살아가는 게 정말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무척 슬픈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성별에 위화감을 가진다고 해도 그 위화감의 정도는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강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해도 그에 대한 대응 방법, 해결의 방법으로 수술이 유일한 해결법은 절대로 아니에요. 그런데도 하나의 선택에 다양한 사람들을 집약시키려고 하는 일 자체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는 타인이 범접해서는 안 되는 권리입니다. 수술을 성별변경의 요건으로 하는 건 비인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미카와가 성별 변경의 요건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자신이 성별을 변경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1968년생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다. 1980년대에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가미카와는 자신이 왜 남자를 좋아하는지, 울대가 나오고 털이 나는 자신의 몸에 왜 혐오감을 느끼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동성애자인가’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몸에 대해 느끼는 위화감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내 성의 존재 형태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면서도 애써 현실을 보지 않으려 했다. 스스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무서웠다. (중략) 나는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줄곧 내 연애 대상은 남자였다. 그럼 나는 ‘동성애자’인 걸까?”-가미카와 아야/‘바꾸어나가는 용기’

가미카와가 여성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건 대학을 졸업한 후 남자 사원으로 5년 반이나 회사에 다니고 난 뒤였다. 당시 27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호르몬 요법을 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모습과 여성의 자아를 찾아갈 때쯤인 1998년부터 세타가야로 이사해 여성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호적의 성이 남성인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연금과 고용보험, 노동보험, 건강보험조합에 설별이 기재된 서류를 제출할 필요가 없는 회사만을 찾아 4년을 일했다.

그 동안 이면으로는 ‘호적상은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며 고용보험, 건강보험, 연금 수첩의 성별이라도 바꿔 보려고 관공서의 문을 두드렸으나 모두 실패. 결국, 호적을 바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날 '바꾸어나가는 용기'의 출간기념회에는 100여 명의 독자와 취재진이 몰렸다.

행정 기관들에 수차례 거절을 당하고 사법부의 문을 두드렸지만, 사법부는 완강했다. 2001년 5월 6명의 성 동일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일제히 가정 법원에 성별 변경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결과는 전부 '각하'. 법원은 ‘국민 전체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별을 바꾸려면 ‘입법’으로 해결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가미카와는 이 일로 크게 실망했다. ‘행정과 사법이 대응해주지 않는다면 입법부(국회)를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본격적인 진정활동에 뛰어든 것이 2002년.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법을 입안해 주십사 정치인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지만 좀처럼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 바로 최초로 HIV 감염자임을 밝히고 의원에 당선된 ‘이에니시 사토루’ 당시 중의원이다. 1980년대에 일본 후생성이 미국제 비가열 혈액 제제가 HIV에 오염된 사실을 알고도 이를 판매 허가하면서 1,800여 명이 HIV에 감염되고 그중 6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니시 사토루 의원은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당시 이에니시 사토루 의원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법을 만든다는 건 국가를 움직이는 걸 의미해요. 그렇게 하려면 여론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지요. 그러려면 당사자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호소하면서 사회의 공감을 얻어야 합니다.”-‘바꾸어 나가는 용기’/한울 엠플러스

오랜 고민 끝에 거주하던 세타가야 구의 구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성별은 가미카와의 발목을 잡았다. 호적엔 남성, 나는 여성. 어떤 성으로 출마할 것인가? 그녀는 여성을 택했고 관공서에선 난리가 났다. 아직 시절은 2003년. ‘호적엔 남성인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성으로 구의원에 출마하려 합니다’라고 상부에 보고하는 세타가야 구의 직원은 진땀을 꽤 흘렸을 것이다.

- 허프 : 당시 출마 신청서에 ‘여성’으로 표기하는 심정이 어땠나요?

=가미카와 : 그때까지 쭉 비밀로 해오던 일인데, (사실상)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었고, 매스컴까지 와서 보도하는 바람에 널리 알려져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선거에 나온 이상 이겨야 하기에 인터뷰에 참여하는 게 괴롭기도 했지만, 힘을 내서 취재에 응했습니다.

- 허프 : 여성으로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하자 아버님께서 ‘돈키호테가 되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그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셨나요?

= 가미카와 :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 진의, 그 진짜 목적을 이해받지 못하고 단순히 이상한 사람이라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끝내지 말아달라. (이왕 한 이상) 너의 진심을 이해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해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트랜스젠더 정치인! 당시의 아사히 신문 등의 주요 매체가 ‘성 동일성 장애인이 출마하다’ 등의 헤드라인을 뽑았을 정도로 센세이셔널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미카와는 이왕 그렇게 된 거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느 사이엔가 가미카와 선거 캠프에선 “저는 호적상 남성입니다”라는 임팩트 있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2003년 4월 27일 시행된 투표에서 가미카와 아야는 일본 최초의 트랜스젠더 선출직 정치인으로 세타가야 구의원에 당선됐다.

‘행정과 사법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입법으로’라는 가미카와의 꿈은 생각보다 일찍 이뤄졌다. 2003년 7월 10일 일본은 보수적인 자민당의 주도로 '성 동일성 장애인 성별취급 특례법'을 통과시킨다. 물론 쉬웠을 리가 없다. 가미카와는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자민당의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해야 했다.

재밌는 건 당시 민주당 측에서도 이 법안에 대해 '여당이 차려놓은 정식을 우리가 먹을 순 없다'며 일단 반대의 뜻을 비쳐, 민주당 의원까지 설득하러 다녀야 했다는 점이다. '막상 성 동일성 장애가 뭔지 전혀 모르고 있던 의원들이나 완강하게 반대하시던 분들도 직접 당사자(가미카와)를 만나고 나면 마음을 바꾸시더군요'. 가미카와의 말이다. 가미카와가 첫 선거를 통해 이미 스타 정치인의 반열에 올라, 의원들을 예전보다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 허프 :호적상의 성별을 바꾸는 ‘성 동일성 장애인 특례법’을 통과시킬 때 앞장서서 양원에 초당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안다. 당시 도움을 준 이에니시 사토루(민주당), 후쿠시마 미즈호(사민당), 아오키 미키오(자민당) 등은 전부 다른 당 소속이다.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 가미카와 : 당시 총 214명 중에서 100명을 만났습니다. 그중에는 역시 전혀 이해 못 하는 사람도 있었고 완전히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을 소개받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당내의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반대하던 의원들이라도 (법안의 대상인)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이 법안을 가미카와가 혼자 이뤄낸 것은 아니다. 가미카와는자신의 저서에서 ‘시기가 우리 편이 되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썼다. 이 법안을 낸 자민당에서 노오노 치에코 참의원의 주도로 2000년 9월에 ‘성 동일성 장애 공부회’가 열리며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됐다. 2001년 10월에는 TV 드라마 ‘제3학년 긴파치 선생님’에서 ‘성 동일성 장애’를 겪는 학생의 이야기가 그려져 화제가 되었다. 2002년 3월에는 모터보트 선수인 안도 히로사마 씨가 성 동일성 장애를 공표하고 여성에서 남성으로 선수 등록을 변경했다.

세상은 아무런 귀띔도 없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바뀌려면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 허프 : 사이타마 의과대학이 큰 계기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가미카와 : 1995년에 사이타마의 의과대학에서 ‘성전환 수술’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사회적 관심이 있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시 사이타마 의과대학의 한 교수님(하라시나 다카오)께서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 곤란함을 듣고, 사회적으로 성전환 수술이 용인되지 않는다는 얘기에 분노해 ‘성전환치료의 임상적 연구’를 신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이런 계기가 절실하다. 아직 한국은 법적 성별 변경을 위한 요건을 규정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2006년 사법부에서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변경이 인간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비롯한 헌법상 기본권을 보장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해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에는 대부분 성별 정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절차와 요건이다.

1. 대한민국 국적자·19세 이상 행위능력자·현재 혼인 중이 아니며 미성년인 자녀가 없는 경우.

2. 성전환증(성 동일성 장애) 여부.

3. 성전환 수술을 받아 외부 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이 반대의 성으로 바뀌었는지 여부.

4. 생식 능력을 상실하거나 향후 종전의 성으로 재전환할 개연성이 있는지 여부.

5. 범죄 또는 탈법 행위에 이용할 의도나 목적이 있는지 여부.

6. 이를 증명하기 위한 각종 서류와 부모의 동의서 필요.

-허핑턴포스트(2016년 06월 07일)

성 소수자 유권자 단체인 '레인보우 보트' 등 여러 단체가 무자녀 요건, 과도한 외과적 수술 등의 조건을 강요하지 않는 '성전환자 성별변경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계기를 당사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중요하다. 가미카와는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소수자로서 정치에 관여해본 사람의 말이라 더욱 설득력이 있다.

-허프 : 소수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 가미카와 : 사회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면 ‘여기에 바꿔야만 할 요구가 있다’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그 방법으로 ‘출마’를 택한 거지요. 그것으로 매스컴의 주목을 모으는 데 성공해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는 있었지만, 이게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저는 한국의 법률은 모르지만, 일본에서는 자신의 필요를 관공서에, 법원에 호소할 때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는 지켜집니다. 그러니 괜히 두려워하지 말고 프라이버시를 지켜가면서 침묵하지 않는,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포기에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으니 먼저 제도를 알 것, 제도를 아는 것으로 무엇이 쓸 수 있는 도구인가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많은 사람이 단순히 두려워만 해 그 두려움의 실체, 리스크의 끝이 어디인지 찾아내 도달하려는 것을 먼저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이너리티는 절대로 무력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길도, 선택할 수 있는 길도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최초의 트랜스젠더 정치인 가미카와 아야가 남긴 말이다.

편집자 주 : 'Gender identity disorders'는 우리나라에서는 '성주체성 장애'로 번역합니다. 다만 이번 인터뷰의 경우 법률 등에 고유명사로 표현되어있어 일본에서 사용하는 번역어 '성 동일성 장애'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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