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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6개월 차에 '낙태'를 선택했다. 후회는 없다

  • xoJane
  • 입력 2016.10.25 09:04

작성자: Lindsey Averill

소셜 미디어에서 여성들에게 낙태를 선택한 데 대한 수치를 버리길 권하는 '#네 낙태 경험을 말해봐(#shoutyourabortion) 해시태그가 돌고 있다. 나도 할 이야기가 있다.

2014년, 남편 랜디와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병원 진찰실에 들어갔다.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갔다. 나는 임신 21주였다. 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매디슨, 렉시 등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다.

와!! 임신이다!!

20주와 21주 사이의 초음파 검사는 마법과도 같다. 작은 화면에 뜨는 스캔 이미지가 물방울이나 팔다리 달린 올챙이가 아닌 진짜 아기 같아 보이는 시점이다. 척추, 손가락, 발가락,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올리는 초음파 사진이 이때의 사진이다.

기술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랜디와 나는 신나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나는 내 배에 시원한 젤을 바르는 그녀에게 내 아버지가 산부인과 의사라고 말했다. 우리의 작은 딸이 벽의 스크린에 떠올랐다. 유쾌하고 친절한 그녀는 초음파 사진을 찍으며 우리 아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 작은 손이 보이시죠.” 산부인과 의사의 딸인 나는 초음파를 많이 봤지만, 이걸 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랜디를 보았더니 그는 황홀한 표정으로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가리켰다. “이게 발입니다.”

임신을 알았을 때 우리가 찍은 사진

그때 뭔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기의 머리를 재 보더니 다시 쟀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녀는 내게 자세를 바꿔 보라고 했다. 측정기를 내 배에 세게 댔다. 아플 정도였다.

“임신 몇 주시죠?” 그녀가 물었다.

“21주요.”

“확실해요?”

확실했다.

그녀는 스캔을 마쳤고, 기계에서는 우리가 가져갈 사진들이 출력되어 나왔다. 그녀는 랜디에게 사진을 주고 미소를 지으며 몇 분 안에 의사가 들어올 거라고 했다.

우리 둘만 남자 나는 떠들기 시작했다.

“다 괜찮을 거야.” 내가 말했다.

“이미 정말 나쁜 경우는 아닌 걸로 밝혀졌잖아.” 내가 말했다.

“별거 아니지?” 나는 랜디를 보았다. 랜디는 걱정말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을 팔에 안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괜찮지 않았다.

뇌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심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의사가 설명하는 동안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질문을 했다. 의사의 딸다운 임상적 질문이었다. “그러면 이 아기가 건강할 가능성은 없나요?”라고 묻는 내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언짢아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정말이지 의사답게 대답했다. “가능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에는 발달이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멍한 상태로 병원에서 나왔다. 몇 시간 뒤 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내 산부인과 의사, 아버지, 신생아 신경학자와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이들 모두 초음파 이미지를 보았는데, 모두 좋지 않다고 했다. 아무도 내게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해 주지도, 해줄 수도 없었지만, 모두 내 아기, 내 뱃속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지는 내 아기가 전혀 괜찮지 않다고 했다.

랜디와 나는 우리 딸을 낳지 않기로 함께 결정했다.

미국 플로리다 남부에서 임신 21주가 넘어서 낙태를 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 집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클리닉이 있는데, 낙태 반대론자들이 매일 같이 시위하는 곳이다. 그때 나는 그들이 가리키는 모든 단어에 다 해당되었다. 나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며, 나를 향해 증오의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 앞을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점의 수술은 오래 걸리고 복잡하며 나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병원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플로리다에는 그런 게 없다.

나는 운이 좋다. 선택할 수 있는 돈이 있었고,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코네티컷과 뉴욕에 아는 의사와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계획을 세웠다.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는 6일 후 오후 1시에 뉴욕 주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정했고 비행기 표도 샀다.

나는 배 속의 아이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 선택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먹을 수도 없었다. 가끔은 숨쉬기가 힘들게 느껴졌다. 랜디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랜디는 내내 잠만 잤다. 우리는 엉망이었다. 우리는 극장에 가서 ‘아메리칸 셰프’를 보았다. 해피 엔딩이라 화가 났다.

며칠이 지났고, 내 몸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때문이다. 내가 정보가 부족한 상태로 결정을 내리는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았다. 너무나 두려웠다. 인터넷에서 통계 자료 검색을 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진단을 받고 건강한 아이를 낳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의사들이 틀렸을 가능성이 있나? 온라인에는 임신 20주에 무서운 초음파 검사 결과를 받고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주무셨다. 우리는 몇 시간 후에 뉴욕에 가는 비행기에 같이 탈 예정이었고,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진찰을 받아보지 않고 수술을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 당일 아침 7시에 뉴욕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다.

무사히 수술을 끝내고 회복 중일 때다.

뉴욕의 의사는 확고했다. 내 아기는 뇌 일부가 없었고, 심장에 연결된 혈관이 전부 엉망이었다. 코가 없었고 출생 후 생존 가능성은 제한적이었으며 고통스러울 거라 했다.

나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낙태했다. 아기 미래의 고통, 내 고통, 내 남편의 고통,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내가 아기를 낳는다면 아기는 죽을 것이고, 내가 미쳐 버릴 것이기 때문에 낙태했다.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나는 낙태했다. 나에게 있어 그건 유일한 선택이었다.

낙태 수술 1주일 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또한 내가 교육받은 상위 중산층의 딸이었고, 그에 따른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 나는 늘 낙태권을 지지해 왔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얻은 의학적 지식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험 이전에는 임신 중후반기의 낙태에 대해 확고한 의견이 없었다. 사람들이 임신 중후 반기의 낙태에 대해 '야만적이다'라고 느끼는 걸 이해했었다.

하지만 이 경험을 거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생각은 잘못 되었다는 걸. 지금, 나는, 임신 중후 반기의 낙태 역시 '합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의 온전한 낙태권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

아기를 보낸 것은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아직 '좋은 결말'은 오지 않았다. 아직 우리는 건강한 아기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게 한 가지 있다. 안전한 낙태를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내게 축복이었다는 걸. 나는 내 선택에 수치를 느끼지 않으며, 같은 상황에 처한다 해도 결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 위의 글은 The Huffington Post US에서 소개한 This Is What It’s Really Like To Have A Late-Term Abortion를 한국어로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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