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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 회고록은 편파적이다. 의도적으로 중요한 맥락을 생략했다

2007년 1월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대화하는 송민순 전 장관(오른쪽)과 김만복 전 국정원장
2007년 1월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대화하는 송민순 전 장관(오른쪽)과 김만복 전 국정원장 ⓒ연합뉴스

기억은 주관적이다. 서로 충돌하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한 전직 관료의 회고록이 폭풍을 일으켰다. 기억의 혼선은 회고록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그것을 활용한 ‘북풍’은 전혀 다른 문제다. 회고록을 쓰면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협의했다면 오류를 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의적 기억은 북풍의 근거가 되었다. 송민순의 기억은 과연 사실일까.

도대체 이렇게 쓴 이유가 뭘까

우리 사회는 회고록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모호하다. 한-미 정상회담을 포함해서 모든 정상회담의 대화록은 30년이 지나야 공개한다. 그러나 송민순 회고록을 포함해 대부분은 비밀문서 공개에 대한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는다. 정상회담의 발언을 따옴표를 치고 인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기밀문서를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선진국에서 전직 관료들의 회고록은 정보공개에 대한 법적 절차를 밟고, 충분한 협의를 거쳐 나온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보공개 법률은 있으나 마나다.

송민순 회고록에서 문제가 된 ‘북한인권결의안’을 다룬 부분은 8쪽에 불과하다. 그 앞부분은 문제가 없을까? 이 시기를 다룬 회고록은 적지 않다. 송민순의 기억과 다른 사람의 기억은 상반되고 충돌한다. 여기서는 주로 쟁점이 되고 있는 북한인권결의안 부분만 평가하고자 한다. 객관적으로 설명하면서도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개인의 소감을 강조할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서술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북한인권 문제를 둘러싼 정부 내부의 의견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매년 북한인권결의안을 둘러싸고 외교부와 통일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외교부는 언제나 찬성 입장이고, 통일부는 기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유엔 차원의 인권결의안에 2003년 불참했고, 2004년과 2005년 기권을 결정했다. 그때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부처 협의에서 부딪혔고 장관급 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으로 기권을 결정했다.

찬성을 결정한 2006년의 경우는 좀 다르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고,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통일부는 강력하게 기권을 주장했다. 그때 송민순은 청와대의 안보실장이었다. 그는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오랜 소신인 찬성 입장을 관철할 수 있었다. 통일부를 비롯한 다른 부처들이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특수한 상황이었다.

송민순의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한 기억은 편파적이다. 특히 2004년부터 2007년까지 통일부가 일관되게 기권을 주장한 중요한 맥락을 생략했다. 의도적이 아닐 수 없다. 송민순은 통일부가 기권을 주장한 이유를 남북관계, 즉 북한의 반발을 의식한 결정이라고 본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부차적이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생략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노무현 정부의 기본 입장이 있었다.

11월16일 삼자대면이 이뤄진 과정

노무현 정부는 북한인권 개선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실질적 방법이라고 강조했고, 자유권뿐만 아니라 사회권도 중요하며 ‘접촉을 통한 변화’를 중시했다. 통일부가 왜 기권을 주장한 줄 아는가? 유엔의 결의안이 한국 정부의 북한인권에 대한 기본 입장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5년의 경우 표결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북한인권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기권한 것이다. 이런 맥락을 알면 ‘북한에게 물어보고’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송민순은 “인권결의안에 찬성 못하면서 어떻게 북한 핵과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우리의 방안에 협력해달라고 다른 나라들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강조한다. 그럼, 기권한 2004년과 2005년은 뭔가? 송민순 6자회담 대표가 회고록에서 자랑스럽게 강조하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주도한 ‘외교적 성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권결의안의 기권과 한국 정부의 외교적 역할은 분리될 수 있음을 앞부분에서 사실상 설명해놓고, 뒷부분에서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논리적 모순이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상회담 직후였고, 11월14일부터 16일까지 남북총리급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총리회담은 정상회담의 후속 조치와 이후 일정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다.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한 정부 입장을 결정하는 안보정책 조정회의는 바로 11월15일에 열렸다.

통일부와 국가정보원, 그리고 회의를 주재한 안보실장은 ‘정상회담 후속 대책’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기권을 주장한 것이다. 찬성을 주장하는 외교부 장관의 발언에 반박했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결국에는 큰소리를 냈다.

회고록에서 의도적으로 생략한 부분도 있다. 송민순은 개인의 소신과 정부의 방침을 혼동했다. 회고록을 보면,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한 정부의 방침이 결정되기 전에 유엔 한국 대표부가 북한과 접촉을 진행했다. 누가 외교부에 그렇게 하라고 했는가?

그리고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이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송민순은 북한인권결의안 찬성 입장을 전제로 사전에 일본과 협의했다. 최소한 안보정책 조정회의에서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했다. 명백한 일탈행위다. 이재정 당시 장관이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강력히 항의했다는 사실은 왜 회고록에 쓰지 않았는가?

기권 결정은 언제 결정됐을까? 11월15일 안보정책 조정회의에서 송 장관은 찬성 입장을 주장했지만, 다수의견은 기권이었다. 15일 회의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공식 회의이기 때문에 회의록도 있다. 문제는 16일의 기억이다.

송민순은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회의처럼 묘사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16일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청와대 안보실장이던 송 장관이 북한인권결의안 찬성을 관철한 2006년의 기억 때문에 혹시나 그가 공식 결정을 무시할까 걱정돼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대통령을 만나러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송민순 장관이 와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을 앞에 두고 이재정 장관과 송민순 장관은 다시 격렬한 언쟁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듣고 있다가 ‘기권으로 합시다’라고 말했고 회의를 마쳤다. 당연히 이날의 만남은 공식 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기록도 없다.

‘북한 쪽지’ 아닌 국정원 보고서

송민순은 11월15일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16일의 만남에서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했다. 그래서 돌아와서 대통령에게 재고해달라고 자필 편지를 쓴 것이다. 물론 송민순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정부 방침이 기권으로 결정됐다고 생각했다. 15일 회의의 다수의견이 기권이고, 대통령은 대체로 공식 회의 결정을 존중하는 편이고, 16일 확실하게 기권 결정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후 송민순의 기억은 과장되고 모순적이다. 18일 서별관 회의가 열렸다. 다시 송민순이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른 참석자들은 “왜 이미 결정된 사항을 자꾸 문제 삼느냐고 불만을 터트렸다”고 회고록은 적고 있다. 이 문장은 매우 중요하다. 송민순 스스로 ‘이미 결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일 서별관 회의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기억이 엇갈린다. 송민순은 이 회의가 이 문제를 재론하는 회의라고 또다시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참석자들은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 19일 싱가포르에서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의 점검회의였다. 싱가포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중·일 정상회담을 주재하고 한·중, 한·일 정상회담을 열 예정이었다. 논의해야 할 사안이 많았다. 서별관 회의는 비공식 회의이고 참석자도 현안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다.

그날 회의의 주재자는 백종천 안보실장이었다. 그러나 송민순은 결정적 착오를 일으킨다. 문재인 비서실장이 회의 주재자고, 회의 성격을 결의안에 대한 정부 방침을 재논의하는 자리라고 적었다. 이런 회의에 늘 비서실장이 참여한 것도 아니고, 문재인 실장이 주재자도 아니었고, 연배로 보나 역할로 보나 문 실장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낼 만한 자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회고록은 문재인 비서실장의 역할을 과장했다. 왜 이렇게 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북풍의 결정적 근거를 던졌다. 11월20일 싱가포르에서 백종천 실장이 북한의 반응이 적힌 쪽지를 갖고 왔고, 그것을 근거로 대통령이 ‘북한에 물어보니 반대하더라’고 회고록은 주장했다.

그날 저녁 방에서 이루어진 송민순 장관과 대통령의 대화는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기에 확인이 어렵다. 다만 ‘북한에서 보낸 쪽지’라는 서술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국정원이 작성한 동향보고서의 일부였다. 송민순 장관도 당시 국정원이 작성해서 주요 장관에게 배포하는 동향보고서를 기억할 것이다.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문제다.

오히려 ‘북풍’ 종식시킬 기회

문재인 비서실장의 역할을 과장한 부분과 회고록 안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은 ‘북한에 물어보고 결정했다는 내용이 없었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전직 외교관의 회고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회고록에 대해 정말 할 말이 많다. 다만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한 말을 소개한다. “국무장관은 중요하지 않다. 외교정책은 대통령이 한다.”

송민순 회고록은 북풍의 근거가 되었다. 다만 회고록을 근거로 북풍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기억은 편파적이고 때로는 사실이 아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시점에는 어느 정도 사실관계가 확인돼, 당시의 객관적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송민순 장관이 양식이 있는 분이라면, 사실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러면 의도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한반도의 빙하가 움직일 것이다. 어찌됐든 새누리당은 최순실을 덮자고 너무 성급하게 덤볐다. 송민순 회고록은 나라를 흔들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북풍을 종식시킬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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