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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 그 천의 얼굴 | 문화계 성추행 사건을 보며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어떠한 일을 하든, '어쨋든 생물학적 여자'라는 시선은 이미 여성혐오사상(misogyny)에 근거한 성차별주의(sexism)적 의식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여성혐오사상은, 여성차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혐오나 여성차별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서 행사된다. 노골적인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매우 은밀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도 행사되는 것이다. 그 소설가가 "내 나름으로는 다정함을 표현하고 분위기를 즐겁게 하느라..." 라고, 자신의 성희롱적 행위를 묘사한 것은 사실상 우연한 것이 아니다.

  • 강남순
  • 입력 2016.10.22 07:12
  • 수정 2017.10.23 14:12
ⓒShutterstock / ArtFamily

1.

최근 한 소설가와 시인의 성추행 사건이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난 성추행이 어디 문화계 뿐인가. 한국사회 특유의 접대문화나 음주문화를 통해서 이러한 종류의 성추행은 각계 각층에 '일상화'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학은 물론 종교계에서의 성추행사건도 끊이지 않고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사건을 통해서 표면에 드러난 특정 사건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성차별적 의식과 가치가 한국사회 전반에 마치 공기처럼 퍼져 있어서 어떻게 많은 남성들속에 '자연화'되어 있는지, 또한 여성들 스스로에게도 '내면화'되어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그 소설가가 "내 나름으로는 다정함을 표현하고 분위기를 즐겁게 하느라..." 라고, 자신의 성희롱적 행위를 묘사한 것은 사실상 우연한 것이 아니다.

2.

성희롱/성폭력/성추행의 대상은 주로 남성에 의하여 여성에게 행하여지고 있으며, 이러한 일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어떠한 일을 하든, '어쨋든 생물학적 여자'라는 시선은 이미 여성혐오사상(misogyny)에 근거한 성차별주의(sexism)적 의식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여성혐오사상은, 여성차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혐오나 여성차별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서 행사된다. 노골적인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매우 은밀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도 행사되는 것이다. 그 소설가가 "내 나름으로는 다정함을 표현하고 분위기를 즐겁게 하느라..." 라고, 자신의 성희롱적 행위를 묘사한 것은 사실상 우연한 것이 아니다. 가해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성희롱/성폭력/성차별의 '의도가 없었다'는 레토릭을 사용하곤 한다. 성희롱/성폭력에서 가해자/행위자의 '의도성'이 아니라, 피해자의 '경험/느낌'이 특정한 행위가 성희롱/성폭력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는 이유이다.

그 여성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에 상관없이, '어쨋든 여자'라는 가부장제적 시선은 그 여성들을 '사회적 여성'이 아닌 '생물학적 여자'로만 보게 한다.

3.

화제의 주인공인 그 소설가는 70대 시인과 30대 제자, 열 일곱 살 소녀의 관계를 그린 <은교>라는 소설의 저자이다. 그는 자신과 합석한 여성들을 나이에 따라서 '늙은 은교' 또는 '젊은 은교'라고 호명했다고 한다. 그 여성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에 상관없이, '어쨋든 여자'라는 가부장제적 시선은 그 여성들을 '사회적 여성'이 아닌 '생물학적 여자'로만 보게 한다. 따라서 생물학적 나이에 따라서 분류되고 호명되는 '성차별적 호명장치'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에 따라서 여성들을 분류하고 호명하는 것이 그 소설가 개인만의 우연한 호명방식일까. 가부장제 사회일수록, 성차별적 시선에 의하여 남성의 나이는 '연륜'으로 존중되지만, 여성의 나이는 사회적 가치가 떨어지는 '추함'으로 비하된다. 즉 여성이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여성들은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로만 분류됨으로서, 생물학적 나이나 외모에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4.

현대 세계를 조명하고자 하는 이들이 이제 차용해야 하는 분석적 틀이 있다. 대표적인 분석적 틀은 성(sex/gender), 인종, 사회적 계층, 장애 여부, 그리고 성 정체성(sexual identity)등이다. 이러한 틀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각 집단간의 우월-열등의 원리에 의한 소위 '지배의 논리'에 의하여 작동되면서, 한 사회의 다층적 차별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이러한 다양한 차별들에 대한 인지가 어떻게 그 사회의 각계 각층에 확산되어 있는가라고 나는 본다.

성차별은 천의 언굴을 가지고 구성되고, 제도화되고, 행사되어왔다. 문화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적 관습과 덕목의 이름으로

5.

그런데 여기에서 성차별이 다른 종류의 차별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특성이 있다. 다른 종류의 차별은 대부분 '공적 공간'에서 경험되는 차별이다. 그런데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사적 공간'에서는 물론, 공적 공간에서도 작동되는 것이 성차별이다. 예를 들어서 같은 인종 또는 계층의 가족끼리 사는 사적 공간에서 서로 차별을 하거나 받지 않는다. 즉 인종차별이나 계층차별등은 공적 공간에서만 경험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차별은 사적 공간은 물론 공적 공간에서도 경험되고 작동되는 매우 복합적인 중층의 차별이다.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정치사회적인 차원에서 작동되고 있는 것이 성차별인 것이다. 그래서 성차별은 '침실에서부터 백악관까지' 경험되고 일어나는 것이라고도 한다.

6.

인류의 역사에서 성차별은 천의 언굴을 가지고 구성되고, 제도화되고, 행사되어왔다. 문화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적 관습과 덕목의 이름으로, 여성을 단지 사적이고 생물학적인 존재로만 간주하고 그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총체적 모습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폄하해 온 것이 인류의 성차별 역사이다. 따라서 여성혐오나 성차별은 결코 '상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중층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많은 여성들이 '나는 성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 라고 하거나, 작가, 종교인, 정치인, 교육인들이 성차별/성희롱을 하면서도 '나는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하는 이유이다. 성희롱/성폭력/성차별을 넘어서는 사회가 되기 위하여 이러한 문제가 상식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학습되고 조명되어야 하는 매우 복합적인 문제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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