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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에 잠긴 여의도

여의도가 『빙하는 움직인다』를 타고 표류하는 책임의 반 이상은 문재인에게 있다. 문재인은 잘 기억할 것이다. 2007년 그때, 외교통상부와 청와대에서는 진보좌파를 지향하는 이른바 '탈레반'들이 대북정책을 보수진영 보기에 친·종북으로 몰고 가려고 해서 논란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였기에 2007년 11월 18일 문제의 그날 저녁, 미국이 포함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기 위해 인권결의안에 찬성투표를 하자는 송민순은 '탈레반의 보스들'인 문재인 비서실장, 김만복 국정원장, 이재정 통일부 장관과 1대 3의 격론을 벌였다.

ⓒ연합뉴스

북한 핵·미사일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옥스퍼드 사전"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송민순의 역저 『빙하는 움직인다』(창비사)가 여의도의 진흙탕 정치싸움의 소재가 된 것은 유감이다. 문재인은 침묵으로 부동의 사실(fact)에서 도망을 치고, 새누리당은 우병우·최순실 게이트를 덮을 호재를 만났다고 도널드 트럼프보다 더한 트럼피시(Trumpish)한 저질 색깔 공세로 문재인을 몰아붙인다. 송민순이 책이라는 것이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자체의 생명력을 갖고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줄 몰랐다고 한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빙하는...』의 저자는 1975년 초임 외교관부터 외교통상부 장관이던 2006~2008년까지 33년간 외교의 단역과 조역으로, 마침내는 외교의 주역으로 이 기간에 일어난 주요 외교협상의 성공과 실패에 참여했다. 저자는 그 긴 세월 내내 스스로 참여 또는 주도했거나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사건들을 꼼꼼히 메모해 뒀다. 그는 그 메모들을 인터넷 정보로 재확인하면서 책을 썼다.

한국인들, 특히 한반도 전문가들과 외교안보라인의 관리들은 거의 주로 미국인들이 쓴 회고록이나 연구결과물로 나온 저서에 의존해 한반도 문제를 판단한다. 송민순은 『빙하는...』를 쓸 때의 각오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미국에 대한 지적(知的) 사대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내가 짐을 지자." 그의 도전은 성공했다. 북한과의 협상에 참여한 미국인들, 북한을 연구하는 미국 학자들의 어느 저서보다 『빙하는...』가 훨씬 틀에 있어 포괄적이고 내용에서 풍부하고 통찰에서 한국적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남북 문제에 관한 지식과 정보와 통찰이 가득한 이 책에서 한반도 문제 해결의 지혜를 얻을 생각은 않고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관한 서술 몇 줄에만 매달려 연일 정치적 슬로건만 쏟아내 국민들의 짜증을 돋운다.

여의도가 『빙하는...』를 타고 표류하는 책임의 반 이상은 문재인에게 있다. 문재인은 잘 기억할 것이다. 2007년 그때, 외교통상부와 청와대에서는 진보좌파를 지향하는 이른바 '탈레반'들이 대북정책을 보수진영 보기에 친·종북으로 몰고 가려고 해서 논란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였기에 2007년 11월 18일 문제의 그날 저녁, 미국이 포함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기 위해 인권결의안에 찬성투표를 하자는 송민순은 '탈레반의 보스들'인 문재인 비서실장, 김만복 국정원장, 이재정 통일부 장관과 1대 3의 격론을 벌였다.

송민순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우리는 유럽 국가들이 만든 결의안 초안에서 북한 지도부를 직접 겨냥한 독소조항을 빼고 물타기(tone down)를 많이 했다. 그런 사실을 북한이 알고 우리의 노력을 평가한다는 보고가 유엔 대표부에서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인권결의안에 찬성을 해도 북한의 반응은 수습 가능한 수준이라는 논리로 찬성투표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때 김만복이 제안하고 이재정이 찬성하고 문재인이 그러자고 결정을 내린 것이 바로 북한이 우리의 결의안 초안 물타기를 정말로 유엔 대표부 보고대로 평가해 주느냐를 북한에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다.

참으로 무지몽매한 결정이다. 한국의 노력으로 독소조항이 빠진 초안을 확보한 북한에 의견을 물으면 보따리 하나 더 내 놓으라는 식으로 반대나 최소한 기권을 요구할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1월 19일 노 대통령이 방문 중인 싱가포르에서 안보실장 백종천이 '확인'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라면서 송민순에게 내민 쪽지는 예상한 대로였다. "북남관계 발전에 위태로운 사태를 초래할 테니 인권결의안 표결에 책임 있는 입장을 취하기 바란다."

문재인팀은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때도 회담 날짜가 결정될 때까지 외교통상부 장관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한반도 문제에 큰 발언권을 가진 미국에도 충분히 사전에 통보하지 못했다.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10·4 남북정상선언 제4항에 "남북 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에서 종전선언을 하도록 추진한다"는 구절에도 송민순은 반대했다. 3자라는 말은 북한이 사정에 따라 중국이나 한국을 빼겠다는 전술을 구사할 여지를 갖겠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시험대에 올라 있다. 오늘에 비하면 9년 전의 남북관계는 밀월시대였다. 문재인에게 상황장악력이 있다면 이런 말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야 한다. "남북관계가 좋은 때여서 인권결의에 기권하자고 했다. 북한에 확인하는 것도 그때 상황으로는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판단착오였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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