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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문학은 그런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긴 싸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예 싸움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머릿속이 꽃밭인 인간들에게는 '평화롭고 사이좋았던' 시절, 난데없이 여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밥줄을 끊으려고 하고 커리어에 똥물 튀기는 걸로만 보이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매끈한 세계보다 훨씬 낫다. 갈등 없는 세계는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내가 사랑하는 문학은 그런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 짐송
  • 입력 2016.10.26 10:32
  • 수정 2017.10.27 14:12
ⓒGettyimage/이매진스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도 며칠을 기다렸다. 다른 사회적 이슈에는 기민하게 대응하던 소위 '문단'이라는 것의 실체인 작가회의에서는 애매한 입장표명만 하고, 소수의 시인들만 개별적인 자성과 각성의 목소리를 낼 뿐이다. 성폭력에 관한 내규를 만들고 조직 차원에서 대응하지 않으면,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는 치들은, 더 높은 권력에만 복무하면서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문학 운운하는 가해자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안일함이 세대를 바꿔가며 예술가의 탈을 쓴 성폭력 가해자를 '계승'해왔다. 실망스럽다. 그러나 비관하거나 좌절할 수는 없다. 용기 있게 피해 사실을 폭로하여 이 폭력의 고리를 끊고자 한 피해자들이 있기에.

가해자를 '흠집 내기'의 방식으로 성범죄를 선택한다는 환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누구를 파괴해왔는지를 생각하면 곧바로 알 수 있다.

나는 꾸준히 가진 것 없는 피해자가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하는 폭로라는 형식의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폭로자가 그에게 원한을 갖고 그를 망치기 위해 사실을 날조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도 피해자의 말하기가 가해자의 변명만큼 '진실성' 있는 것으로 여겨진 적 없으며, 가해자의 미래와 밥줄이 언제나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피해자는 언제나 가해자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감당해야 하며 수많은 2차 가해(권김현영 선생님의 글로는 이 표현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일단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쓴다)에 노출된다. 꽃뱀과 무고한 지목인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이지만, 이것은 그만큼 무엇에 무게가 실려왔느냐를 증명한다. 가해자를 '흠집 내기'의 방식으로 성범죄를 선택한다는 환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누구를 파괴해왔는지를 생각하면 곧바로 알 수 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 먹고 경찰서에 갔을 때 형사는 왜 그 글이 사실이라고 판단했는지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약자의 위치에 있는 피해자이다. 피해자는 그 당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나 이 사람은 바로 나를 명예훼손으로 걸었다. 권력이 이렇게 기울어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내던지며 폭력이 있었음을 고발하려는 시도를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밤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결과는 '무죄, 혐의없음' 이었다)

잘못은 글을 쓰는 작가에 대한 선망을 착취한 가해자들에게 있지, 연락을 받거나 시를 가르쳐주겠다는 말을 믿은 피해자들의 것이 아니다.

국문과에 입학하고 꾸준히 문학의 근처를 기웃거리는 삶을 살면서 언제나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이야기들. 출판계에 은교가 넘쳐난다는 말, 시인들 모이는 술자리에는 가지 말라는 조언, 개인적으로 연락하면 무조건 튀라는 단속. 내가 왜 그래야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그대로 했고 이러한 일에 관한 태도는 언제나 방어적이었다. 그러나 작년 겨울 동아리 행사로 윤이형 작가님과 만나고, 뒷풀이를 하면서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 작업을 지속해온 사람과 이야기하는 경험이 얼마나 설레고 행복한 일인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더 마음이 아프다. 피해자들은 무수한 나의 변주이자, 내 가까운 사람들이기도 하다.

성범죄가 아니라는 증거로 가해자들은 종종 '호감이 있는 사이'나 '친밀했음'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사람에 의한 성범죄일 뿐이지 성범죄가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성범죄를 더욱 용이하게 하고, 은폐하는 훌륭한 알리바이다. 잘못은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과 설레는 글을 쓰는 작가에 대한 선망을 착취한 가해자들에게 있지, 연락을 받거나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시를 가르쳐주겠다는 말을 믿은 피해자들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피해자들은 대부분 가해자의 '몰락'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을 선언하고, 자신이 겪은 것이 폭력이며 그로 인한 고통은 오롯이 가해자의 탓임을 직시하고, 말하기를 통해 정치화하고 공유하고 연대하고 재발을 막으려는 몸부림이다.

글자를 읽지 못하던 시절부터 나는 책이 좋았다. 기억의 시작은 어두컴컴한 시립 도서관 아동 서가에서 펼쳐본 토끼가 소풍 가는 그림책.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갖고 싶다고 떼를 썼고 빌려서 집에 오는 길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직 기억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관련된 필드가 얼마나 취약하게 젠더 불평등에 노출되어 있으며 근본부터 뒤틀려 있는지 재능 있는 여성 작가들이 어떻게 매장되고 조롱당하고 평가절하되고 지워져 왔는지, 진실을 묘사하고 세계를 재구성하며 미학적 윤리를 추구한다는 문학이 집요한 카르텔 안에서 어떤 부조리와 폭력을 은폐하고 옹호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깨닫고 회의하고 고통 받고 무기력감에 시달렸다. 대다수의 문학이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에 여성은 없었고, 문학이 고발한다는 인간의 고통과 고독 세계의 참혹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나가야 하는 생의 고귀함은 모두 남성의 것이었다. 맞고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여자친구보다, 그를 때릴 수밖에 없는 남성 화자의 울분이 우선인.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엄마로서의 여성보다, '위대한 모성'을 타자화하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은 없는 남성화자의 연민에 초점이 맞춰지는.

그러나 나는 어쨌든 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기로 결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치열하게,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인간과 창작물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게까지 해서 존중되어야 할 대단한 성취는 글쎄, 있었나 모르겠다.

지금의 이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문학을 방패 삼아 자신의 저열한 본성을 례술가의 속성으로 포장하는 이들과 그에게 일거리를 주고 모르는 척 하고 쟤는 원래 그래, 하면서 묵인하는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주도해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폭발적인 말하기 이후는 이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달라야 한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만 타인을 착취하여 문학의 자양분으로 쓰는 인간들의 작품은 보지 않을 것이다. 록산 게이의 질문처럼 인간과 창작물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게까지 해서 존중되어야 할 대단한 성취는 글쎄, 있었나 모르겠다. 게다가 예술적 성취란 언제나 사후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었으니 설령 천재라고 해도 잃으면 어떤가. 또 다른 천재가 나타날 텐데.

피해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연대하고, 가능하다면 금전적인 지원도 할 것이다. 2차 가해하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막을 것이다. 누군가 압도적인 권력차를 바탕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려고 한다면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그건 연애도 예술도 실수도 아닌 성범죄라고. 피해를 입은 여성을 보면 할 수 있는 한 돕고 말해줄 것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긴 싸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예 싸움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머릿속이 꽃밭인 인간들에게는 '평화롭고 사이좋았던' 시절, 난데없이 여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밥줄을 끊으려고 하고 커리어에 똥물 튀기는 걸로만 보이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매끈한 세계보다 훨씬 낫다. 갈등 없는 세계는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내가 사랑하는 문학은 그런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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