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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피해자'라는 환상

순백의 피해자. 나는 순백의 피해자라는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피해자는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하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과한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자신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허지웅
  • 입력 2016.10.20 11:17
  • 수정 2017.10.21 14:12
ⓒ픽사베이

[허지웅의 설거지] 피해자의 '순수성'을 가리는 시도에 숨은 강자의 의도를 보라

아저씨는 늘 새까맣게 취해서 인사동 입구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면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뭔가 한참 동안 하소연을 하고는 했다. 편의점에 들어와 소주 한 병과 종이컵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는 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 동전을 쏟아내 그중에서 제일 더러운 걸로 값을 치르고는 했다. 비교적 깨끗한 동전은 다시 아저씨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가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소주를 그냥 가지고 나가는 걸 말리느라 실랑이가 커지는 일도 있었다. 아저씨는 보통 늦은 밤에 나타났지만 이른 저녁에 편의점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출근했더니 이전 근무자가 아저씨를 붙잡고 힘겹게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 친구는 아저씨를 향해 꼬박꼬박 존대를 하며 웃어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옆모습을 보며 잠시 동안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그 친구가 생각난다. 인사동에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전역을 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등록금을 내고 월세와 생활비를 빼고 나니 큰일이다 싶었다. 다음 학기 등록금도 모으기 시작해야 해서 수업을 전부 오후로 밀어 넣고 일과가 끝나면 편의점에 나갔다. 새벽 6시에 퇴근하면 고시원에 돌아와서 쪽잠을 자고 오전 11시에 일어나 학교를 갔다. 한 학기를 그렇게 보내고 방학 동안 열심히 벌어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낼 수 있었다. 98학번이었기에 망정이지 요즘 학번이었다면 하루가 48시간이었더라도 결국 등록금과 월세를 내지 못하고 대출을 받았을 거다. 나는 대출이 너무너무 싫다.

그 친구는 오후 근무자였다. 편의점은 세 명의 근무자가 8시간씩 돌아가며 일을 했다. 내가 출근을 하면 친구는 인수인계를 하고 퇴근했다. 딱 한번 세 명이 모여 밥을 먹었다. 밥 먹는 내내 점장 욕만 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휴학을 하고 학비를 벌고 있다고 했다. 내심 형편이 이해가 되어서 장하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제일 연장자라 자연스레 계산을 하려는데 그 친구가 옆에 와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보탰다. 괜찮다고 말하는데 씩 웃고 나가버렸다. 좋은 아이였다.

어느 날 수업을 듣고 있는데 점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의점에 갔더니 그 친구는 없고 점장이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 친구가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당분간은 점장이 오후 근무를 설 텐데 자기가 밤 9시까지밖에는 있을 수 없으니 앞으로 한 시간씩 일찍 와 달라는 이야기였다. 갑작스러웠지만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싶었다. 자정 무렵 그 친구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누군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까만 옷을 입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그 친구였다. 느닷없이 더 이상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그만두는 건 상관없지만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전날 일을 하는 도중 점장 남편이 편의점에 와서 계산대에서 삼십만 원을 가져갔고, 그래서 따로 메모까지 해두었는데 그걸 점장은 자기가 가져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메모를 본 일이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날 정산도 삼십만 원을 빼고 했었다. 폐회로티브이(CCTV)에 녹화가 되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점장 남편이 창고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때 녹화를 잠시 멈추었던 것 같고, "근무자 세 명 가운데 시시티브이가 멈추었던 건 그때밖에 없으니 네가 가져간 게 확실하다"고 점장이 말했다는 것이다. 월급 정산도 삼십만 원을 제하고 주겠다고 말했다며 억울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음날 점장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전에도 남편분이 돈을 가져간 적이 있지 않으냐. 남편과 이야기를 더 해보시는 게 맞지 않느냐. 점장은 남편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고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해서 조사를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 친구가 저렇게 억울하다는데 경찰에 신고를 하든지 아니면 노동청에 부당해고로 진정을 제기하도록 도울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남편과 이야기를 해봐주시라 부탁했다. 점장은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더니 서슬 퍼런 눈을 하고 나가버렸다. 비상연락망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찾아 문자를 보냈다. 그 친구는 "고맙다"는 짧은 답을 보내왔다.

사흘 후에 출근했더니 점장이 없고 새로 뽑은 근무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창고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가 점장의 메모를 발견했다. 그 친구에게 삼십만 원을 빼지 않고 정산을 다 마쳤고 오해가 풀려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그렇게 알라는 내용이었다. 인수인계를 받고 계산대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새 근무자가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 하나를 집어 들어 비닐을 뜯더니 한입 가득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점장님한테 원래 일하다가 잘린 여자애 이야기 들었어요. 전에 술집에서 일했었다면서요?"

나는 한참 가만히 서서 새로 온 근무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당황스러웠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전에 술집에서 일했든 청와대에서 일했든 그게 이 문제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새 근무자는 조금 당황하더니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 친구가 점장에게 어떤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었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 친구에게 잘 해결된 게 맞느냐는 문자를 보내보았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한 달을 더 일하고 편의점을 그만두었다. 그 뒤로 그 친구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여러 모습으로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났다.

배를 타고 가던 아이들이 사고를 당해 구조를 기다렸으나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아서 목숨을 잃었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광장 위에 섰고 철저하고 공정한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본래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였다', '보상금을 노리고 그러는 것이다' 등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위로는커녕 모욕을 당했다.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남자가 오랜 혼수상태 끝에 사망했다. 남자의 가족은 아버지의 존엄을 지키려고 분투했다. 그러나 금세 아버지의 '임종 순간을 지키지 않고 해외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위로와 지지 대신 비아냥과 손가락질을 당했다.

순백의 피해자. 나는 순백의 피해자라는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피해자는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하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설사 흠결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도 얼마든지 인과관계를 만들어내 낙인찍을 수 있다. 나쁜 피해자, 착한 피해자를 나누고 순수성을 측정하려는 시도의 중심에는 의도가 있다. 피해자의 요구나 피해자가 상징하는 것들이 강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라면, 그런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너무나 손쉽게 나쁜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과한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자신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 친구를 더 열심히 돕지 못했다는 이유로 종종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다. 우리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던 그 많은 피해자들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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