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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 원성윤
  • 입력 2016.11.06 08:42
  • 수정 2016.11.06 09:46

이 글은 한국의 안락사 법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쓰는 글이다. 이 시간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환자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나와 엄마를 위해 이 글을 썼다.

엄마가 쓰러진 것은 1월14일이었다. 뇌출혈이었다. 뇌동맥류 파열이었다. 추정을 해보자면 출혈이 있기 6년 전,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게 선행원인이 됐을 것이다. 엄마는 구급차를 타고 근처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응급실에서 만난 엄마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춥다. 춥다"를 연신 외쳤다. CT를 찍었다. 의료진은 다급하게 말했다. 코일색전술이라는, 허벅지쪽 대동맥을 통해 뇌혈관에 코일을 넣어 재출혈을 막는 시술을 제안했다. 동의했다. 3시간의 시술은 성공적이었다. 엄마는 다음 날, 환하게 웃으며 가족들을 맞이했다.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복 받은 모양"이라는 내 말에 웃으며 말문이 터진 사람처럼 지난 선행들을 묘사하듯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웃으며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집도의는 "어머니의 경우는 상위 5%"라며 축복해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끔찍한 병원 생활이 내 앞에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음날, 엄마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두개골에 물이 찼다. 머리에 메스를 댔다. 이후에도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눈을 떴지만,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 날부터는 더는 눈뜨지 않았다. 인공호흡기가 연결됐다. 신장도 고장났다. 수액은 계속해서 들어가는데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패혈증도 왔다. 모든 장기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나는 절망했다. 살려야 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몸무게는 80kg까지 불어났다. 소변줄은 까맣게 말랐다. 주치의는 나를 불러 "마음의 준비를 해라"고 했다. 그날 밤, 아내와 동네 횟집에서 회를 시켜놓고 통음하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매일 밤, 저녁 7시. 병원 중환자실 문이 열리면 30분의 면회 시간이 주어진다.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엄마, 엄마"를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었다. 그 시각, 옆 침대에서는 마지막 심폐소생술이 시작됐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장면들이 이제 곧 내가 겪을 일이라는 것도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말랐던 소변줄에 소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몸무게가 줄기 시작했다. 혈액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기적처럼 나의 부름에 눈을 떴다.

일반병실로 올라가던 날부터 본격적인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당장 간병인을 구하지 못했던 나는, 회사에서 퇴근한 복장 그대로 옷을 입고 간이침대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했다.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소변량을 점검하고 버려야 했다. 시간에 맞춰 경관식(콧줄로 들어가는 식사)과 약을 타 먹여야 했고, 체위를 변경해야했다.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결국 간병인을 써야했다. 1주일에 한 번씩 60만 원에 달하는 돈을 간병인에게 드렸다. 그래도 엄마의 상태는 많이 호전됐다. 5월이 되자 이제 사람들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좋아졌다. 의료진이 손과 발을 들어보라고 하면 동작이 느리지만 정확하게 움직였다.

요양병원으로 퇴원을 준비했다. 그때만 해도 힘들긴 했지만, 재활치료를 하고 퇴원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요양병원으로 간 뒤, 상태는 점차 나빠졌다. 병원의 요청으로 또 다른 요양병원으로 옮긴 뒤, 폐와 혈관계 이상으로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짐 보따리에 기저귀와 물티슈, 휴지, 각종 기구를 싣고 응급실에서 하루를 꼬박 보냈다. 의사는 말했다. "더는 좋아지는 걸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제 이렇게 응급실로 오는 수고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기대와 희망이 절망과 체념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6개월간의 시간이 그저 허무해졌다.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요양병원은 적절한 치료를 할 수 없다며 입원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다른 종합병원을 권유했다. 나는 다시 구급차를 탔다. 처음 수술했던 그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왜 다시 돌아왔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자 처연했다. 싸우기도 하고, 웃고 떠들며 했던 세월이 얼마였는데, 왜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못 하는 신세가 됐는지. 병원은 다행히 받아줬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나자 퇴원을 종용했다. 병원 생활을 전전한 지, 10개월 만이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너무나 지쳐버렸다. 조그만 일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엄마를 향해 "이제 그만 놓고 가야 할 거 같다"고 귀에 대고 말하기까지 했다. "내가 꼭 살려줄게" 하고 말하던 나는 여기에 없었다.

병원을 나가기 싫었다. 이제 아무 일도 하기가 싫어졌다. 의사에게 물었다. “외부 자극에 사실상 반응이 없는데, 식물인간 상태가 아닌가요?”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상의 연명치료라고도 했다. 그러면 중단할 수 없는지를 물었다. 물론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엄마는 특별한 치료를 받고 있지 않았다. 이따금 38도의 열이 올라갈 때 스테로이드를 쓰고 평상시에는 항생제 등 일반 약만 처방받고 있었다. 말기암 환자라면 호스피스를 갈 수도 있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2018년 2월부터는 연명치료 중단법에 의해 가족들의 동의로 산소호흡기를 떼거나 투석을 중단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상태도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정말, 무의미한 치료를 하는 상태였지만 가족들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0개월 동안의 병원 생활 동안 수천만 원의 병원비로 들어갔다. 신혼집의 전세금을 빼서 급한 돈을 막았고, 부모님의 노후자금 통장을 헐어가며 병원비를 대 왔다. 무시무시한 얘기를 들은 건 최근 요양병원을 가서였다. 옆 침대의 할머니는 6년째 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족 회의 끝에 엄마를 집으로 모시기를 결정했다. 마지막 임종을 집에서 마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1년 간 병원 생활만 했는데, 그래도 마지막은 집에서 보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나 요양병원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따금 산소호흡기와 약물 등으로 치료 중인 환자를 임의로 퇴원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죽을 수 있는 권리마저도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좌절했다.

현재 연명치료 거부나 중단에 대한 뚜렷한 법적 기준은 없다. 상당수 병원에서는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산소호흡기 거부 등을 할 경우 받아들이는 추세지만, 가족과 의료진 간에 법적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문턱에 가서야 결정하게 되는 이 문제는 노년의 삶의 질과도 연관된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노인의 89%는 연명치료를 반대하고, 집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병원에서 사망할 수밖에 없다. 요양보호사라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시설과 인력이 태반으로 부족한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기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들이 연명 치료 중단을 밝히더라도 환자가 사망하지 않으면 남은 기간의 병원비는 그대로 환자 보호자들의 몫이다. 국내 최초 연명 치료 거부 환자인 김 할머니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2008년 2월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뒤 2009년 6월 23일 산소호흡기를 뗐으나 자가 호흡으로 201일간을 더 생존한 끝에 2010년 1월 10일에 사망했다. 가족들은 진료비 8710만 원 납부를 거부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남은 기간의 병원비를 내라는 판결이 나왔다.

이미 무의미한 생명 연장임이 결정된 상황에서도 환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면 환자 가족들은 치료비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벨기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든 연령대에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17세 불치병 청소년은 안락사로 생을 마쳤다. 미국에서는 5개 주가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고, 20여개 주가 논의 중이다. 2002년 처음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네덜란드는 해마다 사망자 3%의 비율로 안락사로 사망한다. 스위스는 외국인에게도 조력자살을 허용하고 있어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스위스로 향한다.

한국은 오랫동안 유교 국가 전통 때문인지 이런 논의 자체를 불경하게 취급해왔다. 종교계에서는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타인이 대신 판단할 수 없다"며 연명치료 중단마저도 반대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시작도 못했고,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안락사법 입법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본인이 생전에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반대했고,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경우 미국과 유럽의 기준에 따라 생명을 마감하는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한국은 종합병원과 요양병원을 계속 오갈 수밖에 없는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다. 큰 수술을 거친 뒤, 일상생활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런 비참한 병원 생활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보호자는 보호자대로 고통이다. 간병 생활을 비롯해 퇴원 절차를 밟고, 옮겨가는 병원에 전달할 의무기록지와 소견서 등을 때고 구급차를 타고 옮기느라 시간을 꼬박 써야 한다. 병원에 가서도 온갖 잡무들을 보호자들이 다 해야만 한다. 병원을 옮겨야 하는 건, 한 병원에서 장기간 머물면 안 된다는 부조리한 법 문제 때문이다. 노년의 원치 않는 연명 치료를 위해 자신이 모은 재산을 모조리 헌납하고 있는 셈이다.

안락사가 도입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부모의 재산을 노린 범죄에 악용될 소지를 막아야 하며, 의사와 환자 보호자의 오판 등 여러 가지 위험 요인이 있다. 그런데도 식물인간의 장기화와 같은 예외적 상황에 한해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한국은 세계 1위의 노령화 국가이며, 건강보험의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 못하는 환자가 약물과 기계로 생명을 연장하며 누워있기만 한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사회적 공론화를 해야만 한다.

안락사는 약물을 투여해 생명을 단축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필수적인 영양공급이나 약물투여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가 있다. 한국은 식물인간 판정을 받은 환자들에 한해, 보호자와 의사 2인의 동의 때문에 소극적 안락사부터 논의해보면 어떨까.

나는 엄마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손바닥만 한 욕창을 엉덩이에 달고, 가쁘게 호흡을 하며,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10개월째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를 이제는 그만 보내주고 싶어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나는 다음 주에 또다시 요양병원에서 종합병원으로 짐을 들고 옮겨야만 한다. 9번째 구급차를 타고 말이다.

** 안락사 도입에 찬성하는 환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받습니다. sungyoon.won@huffingtonpost.kr로 제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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