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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 신경회로 닮은 컴퓨터 시대 열린다

제로스는 회로 구조만이 아니라 기능도 인간의 학습기제를 모방했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들은 흔히 칭찬하면 그 행동을 더 자주 하고, 야단을 맞으면 그 행동의 빈도가 줄어든다. 이런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 기제를 활용해 로봇을 제어하는 데모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얀색 타일을 찾은 로봇에게 'Good Robot!'(잘했어!)이라고 칭찬 버튼을 눌러주면, 어떤 행동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하얀 타일을 찾아 나선다. 이른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현상을 로봇에게도 주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정재승
  • 입력 2016.10.17 13:18
  • 수정 2017.10.18 14:12

인간 뇌가 슈퍼컴퓨터보다 더 뛰어난 까닭은 신경세포들끼리 바로 연결하는 단순한 구조 덕분이다. 이 때문에 아주 적은 에너지로 1000억개가 넘는 뉴런(신경세포)을 가동할 수 있다(제일 위 그림). 반면에 컴퓨터는 중앙정보처리프로세서(CPU)와 메모리시스템(하드웨어)의 데이터 이동을 버스(BUS)가 일일이 통제하는 방식이다(가운데 그림의 붉은색 화살표). 뉴로모픽 칩은 시피유와 하드웨어를 인간 뇌의 신경세포 연결 구조처럼 병렬적이고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한다(가운데 그림의 파란색 화살표). 뉴로모픽 칩은 인간 뇌처럼 효율적이면서도 자기 학습 기제를 갖추고 있다. 맨 아래 사진은 퀄컴에서 2013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뉴로모픽 칩 '제로스'(Zeroth)의 모습이다. 정재승 교수 제공

[정재승의 영혼공작소] 뉴로모픽 칩

인간의 뇌는 컴퓨터에 비해 정보처리가 훨씬 효율적이다. 인간 뇌는 겨우 20와트의 에너지를 사용하면서도 1000억개가 넘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슈퍼컴퓨터 이상의 성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컴퓨터가 그 정도 정보처리를 감당하려면, 1억배가 넘는 부피를 차지하고 10억배가 넘는 에너지를 쓰고도 턱없이 부족하다.

컴퓨터는 정보를 중앙정보처리프로세서(CPU)에서 처리하고, 저장은 흔히 하드디스크라고 표현하는 중앙메모리시스템에서 이루어진다. 그 사이에서 버스(BUS)가 데이터의 이동경로를 통제하고 데이터가 저장된 위치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인간의 뇌에선 정보를 처리한 신경세포가 정보를 저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정보처리 프로세서와 하드가 분리돼 있지 않고 같이 처리하다 보니, 뇌는 데이터 이동이 훨씬 효율적이어서 속도가 빠르다.

뇌는 중앙 관제탑에서 정보 이동을 모두 통제하지 않고 각각의 신경회로가 정보를 동시에 병렬로 처리하고 저장한다. 신경세포들이 여섯 단계만 건너면 서로 다 연결돼 있는 '작은 세상 네트워크' 구조를 이루고 있다 보니, 수많은 신경세포들이 원하는 신경세포들과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나타난 지 7만년. 인간 뇌는 1500㏄밖에 안 되는 이 작은 두개골 안에서 우리를 둘러싼 복잡한 환경과 어려운 과제들을 너끈히 감당해낼 수 있는 효율적인 구조와 기능으로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온 것이다.

2013년 퀄컴이 최초로 개발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인간 두뇌와 유사한 구조와 기능으로 디자인하면 훨씬 효율적인 컴퓨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 위해 굳이 새의 날개를 흉내낼 필요는 없지만, 지금의 컴퓨터가 비효율적이라면 인간의 두뇌에서 혁신의 실마리를 찾는 것도 유용한 접근이리라.

인간 두뇌의 구조와 기능에서 영감을 얻어 컴퓨터를 디자인하려는 시도는 1980년부터 줄곧 있어 왔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의 세계적인 석학 카버 미드 교수는 오디오나 비디오 파일처럼 대용량 데이터를 적은 에너지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인간 뇌를 모방한 '뉴로모픽 칩'(neuromorphic chips)을 떠올렸다.

그는 먼저 신경과학자들과 함께 신경세포가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트랜지스터들을 신경세포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해 피드백 네트워크를 만들고, 매우 낮은 전압으로 구동하는 새로운 형식의 칩을 디자인했다. 이렇게 제작된 뉴로모픽 칩은 망막이나 달팽이관의 데이터 처리 회로를 흉내내어 물체의 윤곽을 검출하거나 특정한 패턴의 소리를 찾아내는 작업에 응용됐다. 물론 결과가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카버 미드 교수의 연구는 그 후 많은 뇌공학자들에게 '뇌를 닮은 컴퓨터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영감을 주는 데 기여했다.

21세기 들어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측정하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신경세포들이 무슨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이해가 깊어졌다. 한편 반도체 기술은 한계에 다다른 듯 보이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에서 차세대 프로세서로서 뉴로모픽 칩의 가능성에 다시 눈을 돌리게 됐다.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로는 2013년 퀄컴이 내놓은 '뇌에서 영감을 얻은 프로세서'인 '제로스'(Zeroth)가 있다. 퀄컴의 제로스는 신경세포처럼 스파이크 형태의 신호를 주고받고 시냅스 연결 강도를 조절해 정보를 처리하는 프로세서다.

제로스는 회로 구조만이 아니라 기능도 인간의 학습기제를 모방했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들은 흔히 칭찬하면 그 행동을 더 자주 하고, 야단을 맞으면 그 행동의 빈도가 줄어든다. 이런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 기제를 활용해 로봇을 제어하는 데모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들이 보여준 데모 영상은 놀랍다. 예를 들면, 바둑판 모양으로 타일이 깔린 바닥에서 로봇이 움직인다. 간혹 하얀색, 노란색, 혹은 파란색 타일이 깔린 영역이 있는데, 제로스를 탑재한 로봇은 색깔이 칠해진 타일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로봇은 바닥에서 색상이 다른 타일을 찾아낸다. 특히 하얀색 타일을 찾은 로봇에게 'Good Robot!'(잘했어!)이라고 칭찬 버튼을 눌러주면, 어떤 행동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하얀 타일을 찾아 나선다. 이른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현상을 로봇에게도 주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 국방부, '인공두뇌 만들기 프로젝트' 지원

뉴로모픽 공학 분야에서 가장 선두에 선 기업은 단연 아이비엠(IBM)이다. 아이비엠은 인지 컴퓨팅이라는 이름의, 인간 뇌를 닮은 컴퓨터를 만드는 데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여왔다. 미국 국방부가 연구지원을 하는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인공 두뇌 만들기 프로젝트', 즉 '시냅스'(SyNAPSE: Systems of Neuromorphic Adaptive Plastic Scalable Electronics)에 참여해서 아이비엠은 '트루노스'(TrueNorth)라는 뉴로모픽 칩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트루노스 칩은 무려 54억개의 트랜지스터를 내장한 4096개의 프로세서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회로 소자들을 인간의 신경망처럼 연결해 인간 두뇌 활동을 흉내냈다는 뜻이다. 사용되는 전력 역시 기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1만분의 1밖에 되지 않아, 매우 효율적이다.

아이비엠은 트루노스 칩이 간단한 비디오 게임을 수행하고 영상 패턴을 인식하는 데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향후 인간 뇌의 10분의 1 정도 되는 신경세포들을 회로로 재현하고 그들의 연결망을 흉내내서, 인간 뇌처럼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인지 컴퓨팅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다.

컴퓨터 회로는 처음부터 고정돼 있고 이미 프로그래밍된 대로만 작동하지만, 인간 뇌는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새롭게 신경세포를 만들고 그들 사이의 연결 강도를 바꾸어줌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학습하고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적절한 의사결정을 수행한다. 끊임없어 네트워크 구조를 바꾸면서 변화에 대응해나가는 구조가 인간 두뇌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학습을 통해 자기 스스로 네트워크 구조를 바꾸는 능력을 컴퓨터에게 넣어주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자극이 들어올 때마다 시냅스가 새롭게 생성되기도 하고, 잘 쓰이지 않는 시냅스는 끊어지기도 하는 그런 자기 조직화된 컴퓨터 말이다.

이렇게 컴퓨터가 자기 스스로를 좀더 정교한 형태로 조직하고 스스로를 프로그래밍하는 칩도 이미 등장했다. 우주항공기술로 유명한 휴스 항공의 에이치아르엘(HRL)연구소(Hughes Research Laboratory)는 경험을 통해 학습하는 칩을 선보였다. 매우 간단하게나마, HRL 칩 안에서 신경세포는 다른 신경세포로부터 신호를 자주 받으면 둘 사이의 연결 강도를 강화하고 신호가 뜸하면 연결 강도를 줄여 영향력을 없애는 방식으로 학습을 한다. 데이터 신호가 오는 횟수와 타이밍에 따라 연결 강도를 변화시키는 이런 신경 메커니즘은 이미 '인공 신경망'이라는 분야에서 소프트웨어적으로는 구현되어 왔다. 하지만 인간의 뇌처럼 실제로 하드웨어적으로 칩 자체가 그런 방식으로 학습을 하도록 만들어야, 비로소 우리는 뇌를 칩으로 구현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이 다양한 실험에서 근사한 성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뉴로모픽 칩의 발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전망된다. 실제로, HRL 칩을 비디오 게임 '퐁'(Pong)에 적용한 데모 영상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해 주었다. HRL 칩에는 따로 게임의 규칙을 넣어두거나 게임을 하는 법을 프로그래밍해 놓지 않았다. 단지 공을 감지하도록 하고, 성공적으로 샷을 했을 때에는 보상을 하고, 놓쳤을 때에는 벌을 주는 단순한 방식으로 저절로 학습하게 했다. 이 단순한 칩이 내장된 인공지능 에이전트가 비디오 게임 '퐁'에서 선보인 학습능력은 실로 놀라웠다.

컴퓨터 칩 자체가 인간의 신경회로처럼 구성돼 있어 정보처리나 에너지 사용 측면에서 탁월하게 효율적이고, 스스로의 네트워크 구조를 바꾸어가면서 학습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다면, 이 칩을 두뇌에 삽입할 순 없을까? 인간의 신경회로처럼 작동하는 칩을 두뇌에 삽입해서 실제 신경세포들과 소통하게 한다면, 중풍이나 치매 등으로 신경회로가 손상된 환자의 두뇌 기능을 회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치매 질병 치료에 유용할 수도

실제로 뉴로모픽 칩을 개발하는 연구자들은 사고로 시력을 잃은 환자들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하거나, 치매로 인해 기억력을 잃어버린 환자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이 칩을 응용할 계획이다.

일명 '메모리 임플란트'라고 불리는 이 칩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넘기는 해마(Hippocampus)가 손상된 환자들에게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해마 신경회로의 손상으로 기억의 저장 및 인출이 힘겨운 환자들에게 뉴로모픽 칩을 이식하면 장기 기억 저장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술은 알츠하이머 치매 등 기억 관련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뉴로모픽 칩 기술이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우선 인간의 신경회로가 어떻게 데이터를 처리하는지 시스템 수준에서의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간단한 수준에서 단일 신경세포들을 흉내내고 그것을 연결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 인간 두뇌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뉴로모픽 칩 안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회로를 '멤리스터'(memristor)라고 부른다. 이를 고용량으로 집적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는 기존의 트랜지스터 집적 기술과는 다른 차원의 연구다. 다시 말해, 인간의 뇌와 같이 복잡하고 집적도 높은 구조를 가지기 위해서는, 단위 면적 안에 고밀도로 시냅스 연결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도체 집적기술 전반에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뇌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로 발전해온 컴퓨터가 이제라도 인간 뇌의 구조를 흉내내고자 했다는 사실은 뇌공학자들을 설레게 한다. 뇌의 놀라운 정보처리 능력의 핵심은 뇌의 기막히게 정교한 그 구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잡하면서 오묘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뇌의 신경회로 구조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전체 지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 두뇌의 놀라운 정신 작용이 그 복잡한 구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첫걸음마를 뗀 뉴로모픽 칩 기술은 20~30년 뒤 화려하게 꽃필 것으로 전망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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