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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충분한' 서재

절대 다수의 장서가는 공간에 대한 한계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책을 사는 일이 두렵고 새로운 좋은 책을 발견하는 일이 불편하게 될 수도 있다. 책을 사다 둘 곳이 없으며 억지로 구겨 넣는다고 해도 제때에 제대로 활용하기가 힘들다. 심지어는 그 책을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기도 한다. 누가 강유원의 '책과 세계'를 강력추천해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드디어 주문했고 배송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책이 넘쳐서 정리되지 않은 책장을 뒤척거리다가 '책과 세계'를 발견했다.

  • 박균호
  • 입력 2016.10.17 12:11
  • 수정 2017.10.18 14:12
ⓒ박균호

정원을 가꾼다는 말이 있듯이 서재를 가꾼다는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원을 좋아한다고 마냥 넓힐 수가 없듯이 보통사람들은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서재용 건물을 가질 수는 없다. '다치바나 다카시'라고 해도 공간에 대한 갈증은 분명 있을 터이다. 서재용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 '작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 권의 책을 저술하기 위해서 관련 서적을 500권 이상 읽는 독서가이자 장서가인 '다치바나 다카시'조차도 분명히 자신의 서재 건물이 더 넓었으면 좋겠고 더 많은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 다수의 장서가는 공간에 대한 한계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책을 사는 일이 두렵고 새로운 좋은 책을 발견하는 일이 불편하게 될 수도 있다. 책을 사다 둘 곳이 없으며 억지로 구겨 넣는다고 해도 제때에 제대로 활용하기가 힘들다. 심지어는 그 책을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기도 한다.

누가 강유원의 <책과 세계>를 강력추천해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필사하기에 매우 좋을 만큼 그 문장도 유려하다니 기대가 많이 되었다. 마침 바쁘고 다른 읽을 책이 많아서 장바구니에 거의 한 달 가까이 넣어두었고 수시로 장바구니에 담긴 그 책을 확인하곤 했었다. 드디어 주문했고 배송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책이 넘쳐서 정리되지 않은 책장을 뒤척거리다가 <책과 세계>를 발견했다.

오래전에 이미 구매를 해서 읽고 책장 구석에 꽂아두었는데 그 사실을 잊고 새로 주문을 한 것이다. 제목이 평이해서 그런가 제목조차도 잊어버린 것이다. 그때 여실히 깨달았다. 내 서재에 있는 책을 내가 얼마나 대충대충 읽었고 재독의 필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공간의 부족 때문이 아니더라도 새 책을 계속해서 사들이는 것보다 사둔 책을 다시 읽는 것이 필요한 나이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이미 우리나라 출판계의 부흥을 위해서 할 만큼 했다고 자평한다. 책을 살 만큼 샀다는 이야기다. 마흔이 넘으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마흔이 넘으면 새로운 생각이나 최신 트렌드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새 책을 둘 공간도 더는 없거니와 자신의 독서 생활의 전성기를 함께 한 옛 친구(책)를 다시 만나고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신의 집을 온통 책으로 채우고 자신의 서재에 어떤 책이 있는지 정확히 잘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나라 출판계를 위해서 책을 더 많이 사라고 충고할 사람은 없다.

흔히 고전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같은 글이라고 해도 나이에 따라, 처지에 따라 생각의 깊이에 따라 새로운 감동과 공감한다는 말인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져서 읽지 않고 넘어가는 구절이 있기 마련이다. 그 책을 다시 읽다가 그 부분을 자세히 읽으면 어찌 되었든 '처음 읽는' 셈이다. 두 번째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부분은 처음 읽는 것이라서 처음 읽을 때 느끼지 못했던 생각과 공감을 하게 되는데 그걸 '읽을수록 새로운 감동이 느껴진다'라는 고전의 미덕의 하나를 경험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처음 읽을 때부터 꼼꼼하게 읽어서 같은 내용을 다시 읽더라도 감동을 할 수 있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고 그런 경험을 하는 독자들도 많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처음 읽은 내용을 잊어버린다든가 건너뛰어서 두 번 이상 읽어야 감동을 처음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읽은 책인데도 그 내용을 궁금해 하면서 읽는 경우도 허다하다. 두 번째 읽는 책인데도 처음 읽은 것과 진배 없이 낯설고 신선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이가 쉰이 다 되었고 집안에 더는 책을 둘 곳이 없다면 더는 새로운 책을 사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는 있는 식구를 다시 찾고 매만져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늘 아래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내가 가진 장서만 해도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지식을 충분히 다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서재의 사진을 보고는 '대체 당신 같은 사람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오나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솔직히 내 서재에 있는 수천 권의 책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남은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이제는 내 서재에 있는 책을 가꾸고 정리해서 오롯이 내가 필요할 때 나를 위해서 봉사하도록 조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책이 필요할 때 최대 15분 이내에 찾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조련이 된 서재라고 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필요한 책을 즉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서재의 주인이 기억력의 천재이거나 장서의 수가 너무 적은 탓이다.

지나치게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여, 또는 정리정돈 하는 것을 좋아해서 서재의 책꽂이에 정확히 들어갈 만큼의 책만 두고 나머지는 정리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책꽂이를 튼튼하게 꾸며서 그 용량의 2배만큼의 책이 적당한 것 같다. 즉 책을 두 겹으로 꽂아 둘 만큼이 좋다. 늘 같은 책의 등을 수십 년 동안 보는 것은 좀 지겹다.

계절이 바뀌면 이불을 바꾸고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처럼 서재도 가끔 두 겹으로 서 있는 책의 앞뒤를 서로 변경을 해서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책을 전면에 배치하는 게다.

친구를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 든다. 아! 내가 이런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감탄도 하게 된다. 그 감탄은 종종 그 책을 재독하는 계기가 되곤 한다. 뒤쪽에 숨어 있는 책들을 정리하는 것은 마치 미지의 동굴을 처음 답사하는 것과 같은 설렘이 느껴진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이 금방 잊어버린다고 한탄할 이유가 전혀 없다. 숨겨져 있는 책을 발굴하다 보면 오히려 그 점이 축복으로 다가온다.

서재를 가꾸고 정리하다 보면 나의 북러시(book rush)시대 때에 무분별하게 수집을 일삼았던 부작용의 결과물을 만나게 된다. 그런 책들은 자식 보기에 부끄러우니 더 깊숙이 감추거나 다른 수집가에게 양도하곤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붐붐하우스'라는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 <여자 사용 설명서>다. 무슨 문학적이거나 반어적인 제목이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여자를 사용하는(?) 방법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을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목차 몇 개만 살펴보면 된다. 여자를 폐기 처분하는 방법, 번식을 위한 입문, 육체적 불량품과 대처 방법, 결혼하여 구속하는 방법 등 그나마 소프트한 것만 고른 게 이 정도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19금인 이 책이 일부 내용은 일본어 원문으로 그대로 있는데 한·일간의 성의식의 차이를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번역된 부분만으로도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는 부들부들 분노할 만한데 일본어 원문으로 된 내용은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 그 내용을 삭제하지 않고 굳이 원문을 그대로 실어서 출간한 이유를 출판사는 '독자들의 알 권리'를 존중한 결과라고. 참으로 독자에 대한 배려심이 뛰어난 출판사다. 나는 그냥 이 책이 희귀본이라고 해서 어렵게 구한 죄밖에 없다.

여성독자들이 이 출판사를 항의 방문할 수는 없다. 이미 이 출판사는 문을 닫았으니까. 더구나 출간 예정 목록에 <남자 사용 설명서>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성별에 따른 균형 감각(?)은 있으니 너무 불쾌해하지 마시라. 아쉽게도 <남자 사용 설명서>는 출간이 되지 않았다. 그 전에 출판사가 문을 닫아서인지 아니면 <여자 사용 설명서>의 출간에 따른 후폭풍이 거세서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여자 사용 설명서>보다 더 시급하게 퇴출하거나 땅에 묻어야 할 책이 있다. 내가 비밀 서고를 가지게 된다면 일 순위로 입주하게 될 책들이다. 제목의 면면은 이렇다. < The big book of breasts >, < The big penis book > , < The big book of legs >. 큰 판형의 사진집이다. 물론 제목의 사전적인 의미에 해당하는 사진들로만 채워져 있다. 사진집을 열심히 수집할 시절의 유물인데 내가 성적인 성향 때문에 이 책을 어렵게 미국 이베이에서 구매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무려 독일의 세계적인 예술 서적 전문 출판사 '타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계적인 예술 서적 전문 출판사인데 설마 별다른 의미 없이 가슴, 허벅지, 성기 사진만 모아서 출간할 리는 없고 뭔가 예술적인 감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방심의 결과는 참혹했다. 내가 예민하지 못한 눈이라서 그런가 '그냥 의미 없이 가슴, 허벅지, 성기' 사진만 가득한 이 책을 처리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일단 예술을 보는 심미안이 턱없이 부족한 나를 원망해야겠지만 남의 시선은 어찌할 것인가? 당장 나의 딸아이가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한다면 그야말로 지옥문이 열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제 아빠를 변태로 취급하지 않겠는가? 동네 창피해서 재활용 통에 버리지도 못하겠다. 내 경우만 봐도 무작위로 책을 모으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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