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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이 드라마도 바꿀까

“화신이 술값 안 내고 가는데, 우리 정원이 어째요. 김영란법 위반으로 감방 갈 것 같아요. 우리 구명 운동 해요!”

수목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스비에스) 속 친구 사이인 보도국 기자 조정석과 의류회사 재벌 3세 고경표가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을 두고 한 팬이 우스갯소리로 올린 글이다. 덧글이 더 웃긴다. “둘이 사귄다고 하면 된대요~.”

요즘 드라마 팬들 사이 때때로 구명 운동이 벌어진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내 배우’들이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형사한테 음료수 주기 등 드라마에서 흔히 나왔던 익숙한 설정 중에는 법에서 금지하는 것들이 많다. 특히 기자, 경찰, 의사 등 요즘 드라마 속 단골 직업들이 모두 김영란법 적용 대상이다. 방영 중인 드라마 20개(사극, 시대극 제외) 중에서도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는 13편이나 된다. 언론인 2명(<질투의 화신> 기자, <판타스틱> 작가), 공무원 2명(<끝에서 두 번째 사랑><여자의 비밀>), 교육자 3명(<공항 가는 길>, <당신은 선물>, <워킹맘 육아 대디>), 정치인 1명(<더 케이투>)이다. 대학병원 등에 근무할 경우 적용 대상에 드는 의사가 2명(<우리 갑순이><다시 시작해>), 여기에 본인은 적용 대상이 아니지만, 상대하는 사람이 대부분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 해당하는 변호사가 3명(<캐리어를 끄는 여자><불어라 미풍아><좋은 사람>)이다.

드라마는 규범에 어긋나는 내용이 잦을 경우 방송심의위원회 징계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작가들은 우스갯소리를 한단다. “음, 김영란법 때문에 대본도 바꿔야겠네.” 김영란법이 식상한 드라마 속 클리셰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될까? 방영 중인 드라마를 기준으로 김영란법에 흔들리는 익숙한 장면들을 찾아봤다.

■ 형사한테 음료? 최지우 과태료! 형사는 1970년대 <수사반장> 시절부터 한국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범인으로 몰린 내 아이, 내 남편 잘 부탁한다며 형사한테 음료수 한잔 건네는 장면은 흔하게 나왔다. <문화방송>에서 방영 중인 <캐리어를 끄는 여자> 2회에서도 사건을 의뢰받은 법무법인 사무장 차금주(최지우)는 성폭행미수범이 된 파파라치 매체 대표 함복거(주진모)의 사건 정보를 캐내려고 경찰서를 찾아가 에너지 음료를 돌린다. “형사님 오랜만이에요~” 콧소리 상큼하게 냈지만, 차금주는 과태료 대상이다. 형사와 변호사·법무법인 직원처럼 직접적인 직무 관련성이 있는 경우 금액과 관계없이 모든 금품과 선물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 선생님께 케이크? 홍은희 과태료! 홍은희도 최지우와 한배를 탔다. 일하는 엄마들의 애환을 그린 <문화방송>의 <워킹맘 육아 대디> 1회에서 김영란법을 위반했다. 일 때문에 저녁 8시가 넘어야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고, 미안한 마음에 유치원 교사한테 케이크를 건넸다. 소풍 가는 날 이 반 엄마들은 단체로 “선생님 도시락과 음료수 찾으러 가자”고 말하기도 한다. 학교 드라마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장면은 으레 등장했다. 특히 청소년 드라마에서는 학부모들이 진학 상담을 하는 장면에서 빠지지 않고 나왔다. 그러나 이제 엄마들은 도시락을 안 싸도 되겠다. 형사와 마찬가지로 선생님도 커피 한잔 얻어먹을 수 없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와 <워킹맘 육아 대디> 팬들의 구명 논리는 이렇다. “<캐리어> 2회는 법 시행 전인 27일에 방영했다고요!” “<워킹맘> 1회는 5월입니다!”

■ 의사한테 특진 요청? 장모 친구 벌금형! 드라마에서 특히 많이 나오는 장면이 소소한 일상의 특혜다. 특히 ‘의사 빽’으로 검사 날짜를 당겨 잡는 건 의료 드라마의 단골 장면이다. 8월 끝난 <닥터스>에서도 엄마가 딸한테 병원 진료를 먼저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에스비에스>에서 방영 중인 <우리 갑순이>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병원장 아내 여시내(김혜선)의 친구들이 여시내와 그의 의사 사위 신세계(이완)한테 “우리 엄마 특진 좀 받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아무리 티브이라도 배 아팠다면 이제 안심해도 되겠다. 이런 장면도 “안녕~”을 고해야 한다. ‘빽’으로 검진을 당기거나, 병실을 차지하는 것도 다 법규 위반이다. <에스비에스>의 <끝에서 두 번째 사랑>은 우리시 부시장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식당 주인이 “시장님을 위해 특별히 룸을 비워놨다”고 안내하기도 했다. 위반 여부를 두고 다툼이 일 수 있는 사안이다.

■ 공무원과 회식? 지진희·김희애 벌금 또는 징역형! 이제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들이 나오는 드라마에서는 회식 장면을 빼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시청 지역관광과 5급 공무원 지진희와 방송사 드라마 책임 피디 김희애의 사랑을 그린 <끝에서 두 번째 사랑>은 줄줄이 벌금 물게 생겼다. 어쩌면 징역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시에서 드라마를 공모했고, 김희애 팀은 지원했다. 그런데 공모 제출이 끝났다고 두 팀은 한우 집에서 단체 회식을 한다. 지진희는 심사 담당자는 아니지만, 우리시청의 과장이다. 직무 관련성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는 관계다. 누가 돈을 냈다는 얘기는 없지만, “많이들 드세요”(김희애) “잘 먹겠습니다”(일동) 오간 대사로 봐 김희애로 추정된다. <끝에서 두 번째 사랑>은 드라마 공모에 작품을 낸 또 다른 드라마 책임피디(시피)와 심사위원인 교수, 우리시청 담당자인 팀장이 술자리를 갖기도 한다.

■ 기자 친구와 술? 조정석 과태료! 김영란법이 가장 애매한 부분이 바로 친구 사이다. 업무 연관은 있지만, 오래전부터 친구였던 우리는 무조건 더치페이를 해야 할까? <에스비에스>에서 방영 중인 <질투의 화신> 조정석과 고경표도 그런 고민에 휩싸였을려나. 어릴 때 친구였지만 조정석은 지상파 보도국 기자이고, 고경표는 의류업체 재벌 3세다. 두 사람은 슈퍼 앞에서 소주를 한 박스 이상 마셨다. 누가 돈을 냈을까? 조정석의 한 팬은 “누가 돈 냈는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며 구명 운동을 펼치지만, 멋진 옷을 보며 “화신이 앵커 할 때 입히면 되겠다”고 친구부터 생각하는 고경표의 마음 씀씀이로 봐선, 고경표가 아닐까? <질투의 화신> 제작진은 그저 “하하하” 웃었다.

이런 장면들도 과하게 반복되면 방송심의위원회의 심의에 걸릴까? 방심위 쪽은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된 건 없지만, 너무 심하지 않다면 단순히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심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영란법 때문에 드라마 내용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드라마 작가는 “대본 쓸 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현장의 우스갯소리가 늘어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고 있단다. 방영 예정인 한 드라마의 현장 스태프는 “이러다 김영란법에 걸리는 거 아니냐며 웃곤 한다”고 했다. 작가들이 디테일에 신경 쓰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설정이 등장하는 건 아닐까. 이 드라마 작가는 “그건 모르겠고, 드라마에선 일단 부정부패로 걸리는 대목은 사라지겠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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