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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리우의 빈민들에게 올림픽에 대한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더 크게 소리쳤다

  • 허완
  • 입력 2016.10.16 17:35
  • 수정 2016.10.16 17:36
A resident of a favela protests against the money spent on the WCup 2014, demanding better public services and the end of the Peacemaker Police Program or UPP in Rio de Janeiro, Brazil, Monday, June 23, 2014. (AP Photo/Silvia Izquierdo)
A resident of a favela protests against the money spent on the WCup 2014, demanding better public services and the end of the Peacemaker Police Program or UPP in Rio de Janeiro, Brazil, Monday, June 23, 2014. (AP Photo/Silvia Izquierdo) ⓒASSOCIATED PRESS

리우 데 자네이루 – 2016년 올림픽은 희망적으로 시작했다. IOC가 2009년에 리우 데 자네이루를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했을 때, 지역 공무원들은 남미 최초의 올림픽에 수십 억 달러의 투자금이 쏟아질 것이며, 리우가 ‘훨씬 더 좋은’ 도시가 될 거라고 말했다.

리우를 상징하는 언덕 지대에 자리한 파벨라(공인되지 않은 가난한 지역) 역시 혜택을 볼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정부가 마침내 파벨라에 기본적인 서비스들을 제공할 것이며, 도로, 주택, 하수, 위생, 의료, 교육이 개선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8월의 올림픽 개막식이 다가오면서, 이런 약속들은 공허했다는 게 밝혀졌다. 리우는 대중교통과 인프라에 수십 억을 투자하긴 했지만, 대부분 리우의 부촌에만 집중되었다.

“그들은 올림픽에 390억 레알을 썼다. 그런데 파벨라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리우 최대의 파벨라 중 하나인 호시냐 지역의 저널리스트 미셸 실바의 말이다.

파벨라는 그냥 배제되기만 한 게 아니다. 가끔은 표적이 되기도 했다. 올림픽 경기장을 짓기 위해 불도저로 밀기도 하고, 리우를 (파벨라를 제외한) 모두를 위해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경찰들에게 당하기도 했다. 약속했던 공공 서비스는 찾아오지 않았고, 예전에 파벨라와 리우의 다른 지역들을 연결하던 버스 등의 기존 서비스는 바뀌거나 아예 사라졌다.

그러나 올림픽을 앞둔 몇 년 동안, 리우의 630만 주민 중 거의 4분의 1이 사는 파벨라에서 다른 일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분노, 좌절, 희망 속에서 손을 잡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위해 싸우게 된 것이다. 리우 올림픽과 그에 딸려 온 재난은 파벨라가 정치적 목소리를 찾는 것을 도왔다.

“파벨라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가치를 이해한다.” 리우 지역 발전 단체인 캐털리틱 커뮤니티스의 테레사 윌리엄슨의 말이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세상은 브라질의 시간이 왔다는 것을 인식했다.” 리우가 올림픽을 개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코파카바나 해변 전체에서 축하의 물결이 일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룰라 다 실바는 이렇게 선언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올림픽의 야망에 파벨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룰라의 좌파 노동자당이 실시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은 문맹률, 극단적 기아, 최악의 빈곤을 낮춰가고 있었다. 2010년에 리우의 에두아르두 파에스 시장은 파벨라를 ‘재도시화’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모라르 카리오카 계획을 통해 ‘리우가 버려두었던 이슈들을 의제에 올린다’고 파에스는 맹세했다. 대규모 ‘화해’ 노력으로 이미 경찰들이 여러 파벨라들을 지배하던 마약 갱들을 몰아내고 있어, 파벨라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사회적 서비스를 더 잘 받을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어쩌면 공무원들은 올림픽 개발이 파벨라를 헤집는 동안 이런 약속들이 파벨라를 비교적 조용하게 유지시켜 줄 거라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 올림픽 개최 도시들이 그랬듯, 가난한 주민들은 올림픽 개발의 피해를 입었다. 파벨라 주민들조차 사회적, 인종적 오명에 의해 파벨라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믿음을 주입 받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자신을 두려워했다.” 마레 파벨라의 조날 오 시다다오 소속 언론인 타이스 카발칸티의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에는 파벨라들이 자신을 위해 싸웠다. 지역 기자들이 모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009년에 지역 신문 오 시다다오(시민)가 마레 주민들에 대한 인권 침해 보도를 늘렸다. 특히 당시 리우가 준비하던 2016년 올림픽과 2014년 월드컵에 관련된 사건들을 알렸다. 마레에는 40곳 이상의 파벨라에 설치된 정식 경찰 화해 팀이 없었지만, 강화된 경찰 수사 대상이 되었다. 오 시다다오는 이런 ‘보안’ 프로그램들의 영향을 기록하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정부는 모두를 위한 공공 안전을 개선하려는 것인가, 리우를 파벨라로부터 지키겠다는 것인가?

1년 후 윌리엄슨과 캐털리틱 커뮤니티스는 리우 올림픽 네이버후드 워치(리우 온 워치)라는 뉴스 사이트를 만들었다. 파벨라들의 다른 지역 신문들과 더불어 이런 매체들은 올림픽 준비 과정을 감시하고 리우의 가장 가난한 주민들이 받는 영향을 살폈다.

정부의 약속이 깨지고 노골적 침해를 받자 파벨라 주민들이 맞서기 시작했다. 이런 매체들에서는 시민들의 외침을 널리 알렸다.

2010년 10월에 있었던 최초의 시위들 중 하나에서 리우 북부의 파벨라 두 메트로 주민들은 파에스 시장의 집까지 행진하며 마라카낭 스타디움 주차장 건설에 반대했다. 파벨라 두 메트로에서 내려다 보이는 상징적인 마라카낭 스타디움 주차장 때문에 무려 800가구가 쫓겨날 위험에 처했다.

곧 올림픽 공원으로 가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철거하기로 한 리우 서쪽의 작은 파벨라 빌라 아우토드루무 주민들이 예정된 퇴거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6년 동안, 올림픽과 관련된 주택 파괴와 퇴거, 올림픽과 관련된 인프라 개선의 일부로 기본적 서비스를 파벨라에까지 넓혀주지 않은 것, 평화 시위에 대한 진압, 파벨라를 안정시키려는 경찰들의 폭력에 항의하는 파벨라 주민들의 시위가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다.

올림픽 시위는 사람들이 공동의 이슈에 대해 단합하도록 도왔다. 2011년에 퇴거와 경찰의 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월드컵과 올림픽에 대한 대중 위원회 등의 단체들은 지역 행사를 조직했다. 예를 들어 2013년에는 퇴거 위협을 받고 있는 여러 파벨라들의 팀이 참여한 축구 경기 '피플스 컵'이 열렸다.

이러한 새 단체들은 언론인들의 작업을 사용해 파벨라들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를 기록하는 보고서도 만들었다. 대중 위원회가 2015년 12월에 발표한 최종 보고서는 100건이 넘는 사례를 담고 있다. 이런 침해를 해결하기 위한 제안 사항 16개 중에는 리우 주민들 전부가 사용할 수 있는 더 나은 대중 교통, 더 많은 공공 주택, 집회와 시위의 권리 보호, 이윤 추구만이 아닌 ‘교육, 건강, 레저’를 증진시키는 스포츠 행사 장려 등이 있다.

시위자들은 성공을 거두었다.

호시냐 주민들은 호시냐가 위치한 언덕을 오를 예정이지만 주민들의 이동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케이블 카의 건설을 막았다. 이들은 그 돈으로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물 회사가 대로 옆에만 배달을 해주기 때문에 골목 주민들이 설치한 수도관 여남은 개를 교체하거나, 위생 시설과 하수를 개선하는데 돈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호시냐 주민 중 케이블 카가 필요한 사람은 없었다.

호시냐 주민들은 경찰의 폭력에 맞서 싸운 최초의 주민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2013년 여름에 경찰들이 심문을 위해 데려간 뒤 사라진 주민 아마릴두 데 수자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아마릴두는 어디 있는가?’는 가난한(그리고 흑인인) 주민들만 불균형적으로 표적이 되는 경찰 살인이 증가하는데 대한 시위들의 슬로건이 되었다. 결국 데 수자를 고문하고 살해한 혐의로 경찰 10명이 기소되었다.

파벨라에서의 경찰 폭력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 운동가들이 올해 7월에 미국에서 브라질로 찾아와 비슷한 싸움을 벌이는 단체와 만났다.

빌라 아우토드루무와 리우의 싸움도 전세계 매체에 보도되었다. 2016년 봄에는 이 지역의 약 600가구 중 90% 이상이 집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남아있던 20가구는 정부가 새로 지은 집에서 살 수 있다는 협의가 4월에 이뤄졌다. 작지만 의미있는 승리였다.

“저항했던 20가구는 이 도시의 상징이다. 이 상징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건 가치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은 퇴거에 대한 저항의 사례였다.” 퇴거에 맞서 아우토드루무 주민들과 함께 일했던 국선 변호인 조앙 엘베시오 데 카르발료가 올림픽 전에 허핑턴포스트 브라질에 한 말이다.

올림픽 준비 중에 파벨라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은 IOC가 리우를 선택했을 때 생긴 게 아니다. 그리고 올림픽 개막과 함께 끝나지도 않았다.

경찰과 군대의 보안 작전은 계속 되었다. 올림픽 첫 2주 동안 경찰은 마레에서 최소 9명을 사살했다고 지역 활동가는 말한다. 올림픽 기간 중 리우에서 총격적은 92번 일어났다. 31명이 죽고 51명이 다쳤다고 국제앰네스티의 온라인 앱 프로젝트인 크로스파이어는 밝혔다.

올림픽은 파벨라에 경제적 타격도 주었다. 공공 서비스에 들어갈 돈이 올림픽에 들어갔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토지 투기와 개발 증가가 호시냐의 주택가를 확 끌어올려, 주민들의 거주 비용이 올라갔고 감당을 못해 떠나는 사례도 나왔다. 파에스 시장의 야심찬 파벨라 개선 계획 모라르 카리오카는 전반적으로 실패했고 거의 완전히 폐기되었다.

더 큰 단계의 정치에서도 파벨라의 미래는 별로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올림픽이 끝난지 9일만인 8월 31일에 브라질 상원은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통과시켰다. 새 대통령인 브라질 민주운동당의 미셰우 테메르는 우파로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대표한다. 테메르는 이미 파벨라의 삶을 조금이나마 좋게 만들어 주었던 문맹 퇴치 프로그램 등을 폐지했다.

오 시다다오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마레 주민 지젤리 마친스는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이 끝났으니 이제 ‘더 나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파벨라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때론 [이런 싸움들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런 침해를 매일 겪으며 살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들은 전부 범죄자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다른 선택은 없다.

오 시다다오는 이 지역에서 계속 언론인들을 훈련시키고 파벨라 외부 사람들이 파벨라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워크숍과 행사를 조직할 계획이다. 리우 온 워치는 올림픽 후 없어질 계획이었으나, 올림픽 기간 중에 인기를 얻어 윌리엄슨과 캐털리틱 커뮤니티스는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브라질의 인권 침해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행동에 있어 주변부의 저소득층 젊은이들의 매체 행동주의만큼 고무적인 것은 없다.” 핀란드 탐페르 대학교의 브라질인 연구원 레오나르두 쿠스토주 박사가 올림픽 후에 말했다.

7월에 20개 이상의 씽크 탱크, 비정부 단체, 시민 단체들이 모인 카사 플루미넨세는 48페이지 분량의 계획서 어젠다 2017을 발표해 파벨라와 리우 전역의 위생과 교통, 개발과 인권 조건 개선을 촉구했다. 다른 좋은 의도의 정책 계획들과는 달리 이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 리우 시장 후보 중 3명은 어젠다 2017에 서명했다고 윌리엄슨은 말했다. 그리고 그 중 노동자당에서 떨어져 나온 좌파 집단의 마르셀루 프레이수 후보는 10월 2일 1차 투표를 통과했다.

파벨라의 일부 단체들은 2020년 올림픽을 앞두고 도쿄의 비슷한 단체들과 함께 행사를 조직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마친스는 말한다. 주거 퇴거, 보안 단속, 약속 불이행은 브라질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현대 올림픽의 특징이다. 도쿄는 이미 가난한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있다. 리우의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경험으로 너무 늦기 전에 도쿄 주민들을 도울 수 있길 바라고 있다.

호시냐는 올림픽 폐막식에 달아올랐다. 유명한 펑크(funk) 파티가 그 날 저녁에 열렸기 때문이다. ‘도시의 핏줄 속의 피’인 펑크 랩을 들으려 리우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아티스트들은 마약 전쟁, 경찰 폭력, 파벨라 방치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데 오래 전부터 음악을 사용해 왔다.

리우 시는 월드컵과 올림픽 전부터 호시냐와 다른 파벨라들의 펑크 파티들이 범죄 활동의 온상이며 지역 갱들이 돈을 벌고 반정부 정서를 조장하는 곳이라며 단속해 왔다. 그러나 호시냐와 파벨라들은 파티 금지에도 맞서 싸웠다.

“파벨라는 저항의 장소다.” 언론인 실바의 말이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의 Nobody Asked Rio’s Poor About The Olympics. So They Yelled Louder.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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