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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날

우리의 결혼으로 세상이 당장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결혼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각을 조금은 바꾸었다. 이성애자들에겐 '한국에서도 동성 결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 동성애자들에겐 '우리도 결혼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대한민국에서 동성 결혼은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 혹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게다가 우리의 결혼으로 대한민국이 조금 더 로맨틱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 김조광수
  • 입력 2016.10.14 12:33
  • 수정 2017.10.15 14:12

1970년, 초등학교 취학 전인 내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소꿉놀이였다. 다방구, 자치기, 술래잡기, 오징어. 놀이가 참 많았지만 내게는 소꿉놀이를 따라갈 만한 게 없었다. 그런데 소꿉놀이는 남자아이들보다는 여자아이들의 놀이였다.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밖에서 뛰어노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난 소꿉놀이가 좋았다. 꼬마들이 어른인 척 연기하는 것이 좋았고 무엇보다 싸우거나 경쟁하지 않고 그냥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면 되는 놀이라서 좋았다. 짝을 이뤄서 하는 놀이인지라 난 인기가 꽤 많은 편이었다. 남자아이들이 밖에서 놀았기 때문에 짝을 맞추기엔 남자아이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를 차지하려고 여자아이들은 경쟁했고 때때로 가위바위보를 해야만 했다. 난 그렇게 뽑혀서 누군가와 짝을 이뤘고 가상의 부부가 되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결혼했어요>와 비슷한 콘셉트다! 하하, 내가 재밌어 할 만했다!

다른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결혼 후에 벌어지는 가상 부부 놀이, 밥 짓고 반찬 만들어 먹는 거였는데, 난 결혼식 하는 걸 좋아했다. 아마도 동화를 읽은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짝이 정해지면 여자아이에게 먼저 동화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개구리 왕자와 공주, 콩쥐팥쥐 등등 동화 속 공주를 하나 고르면 그에 맞게 대본을 짰고 피날레는 항상 결혼식이었다. 내가 읽은 동화의 결말이 그런 것처럼. 나는 언제나 가상의 성을 만들었고 짝을 이룬 여자아이와 함께 마차를 타고 입장했다. 수많은 하객이 모여들고 팡파르가 울리고 축포가 쏘아지는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물론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거였지만)을 올렸다. 그때만큼은 공주가 될 수 있는 나의 짝꿍도 너무나 좋아했다. 밥 짓고 상 차려서 맛있게 먹고 있던 다른 친구들도 다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행복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그렇게 결혼하리라 마음먹었다.

1981년 7월 29일, 세기의 결혼식을 보았다. 영국의 황태자 찰스와 그의 연인 다이애나의 결혼식이었다. 성과 마차, 수많은 하객의 축복. 바로 내가 꿈꾸던 것이다. 게다가 동화 속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벌어지는 결혼이라니! 그날 이후 나의 꿈은 더 커져만 갔다. 그들과 똑같은 결혼식은 아니더라도 꼭 수많은 하객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 꿈은 산산조각 났고 난 우울해졌다. 난 신랑이 될 수 없었다. 신랑이 되려면 신부가 있어야 하는데, 난 신부와 짝을 이루는 이성애자가 아니다. 세상은 이성애자들의 결혼을 축복했지만 나 같은 동성애자들의 결혼은 축복은커녕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받아주지 않았다. 누구보다 행복한 결혼식을 꿈꿨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면서 우울한 날을 보냈다. 꿈 많던 사춘기 게이 소년은 좌절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결혼 제도가 가진 문제도 알게 되었다. 꼭 결혼을 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란 것도 비혼이라는 단어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애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결혼이란 것에 늘 목말랐다. 그럴수록 냉혹한 현실에 몸서리쳐야 했다. 형과 여동생 둘, 친구들과 아는 이들이 결혼했고 난 언제나 결혼을 축하해주는 하객으로만 있어야 했다.

그런데 커밍아웃하고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하는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아직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지만 동성 커플의 결혼을 법적으로 보장하거나 파트너십을 인정하는 나라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혼을 꿈꾸다 좌절한 소년은 이제 어느덧 중년이 되었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지금도 늦지 않았어! 하지만 다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하고 관계가 무르익으면 연인에게 결혼 얘기를 슬쩍 꺼내곤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단호하게 "노!"였다. 나처럼 결혼을 꿈꾸는, 아니 실제로 결혼하려는 게이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렇게 꿈이 사라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2005년 1월, 겨울 칼바람이 매서웠던 날, 김승환이라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친구사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는 빛났다. 그때부터 가슴앓이가 시작되었고 내가 끈질기게 구애하면서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2008년 1월, 그가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떠났다. 금방 사귀고 금방 헤어진다는, 아무하고나 만나 섹스하는 것에만 관심 있다고 이른바 '동성연애자'로 불리는 우리들에게 육 개월간의 이별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육 개월 동안 매일 아침과 밤 화상 채팅을 하는 닭살 행각을 벌였고 밸런타인데이에는 파리에서, 학기를 마친 여름엔 뉴욕에서 만나 사랑을 불태웠다. 그렇게 서로 더 깊이 사랑하면서 욕심이 생겼다. '아, 이 사람과 평생 함께하고 싶다!'

2010년 4월, 장편 데뷔작으로 준비한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으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치 앤 캐치에서 상을 받았다. 상을 받을 때 소감으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사람의 얼굴이 빅 클로즈업되어 떠올랐다. 영화제의 폐막식에서 수상자로 호명되어 무대에 올랐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객석에 앉아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는 그 사람, 화니를 향해 외쳤다. "나와 평생 함께해줄 수 있겠어? 난 그러고 싶어!"

2013년 5월, '당연한 결혼식'을 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많은 사람이 물었다. 왜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대답은 "사랑하니까요!". 더 필요한 게 있나? 우리도 여느 부부들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함께하고 싶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많은 기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의 결혼은 놀라운 뉴스가 되어 퍼져나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는 우리의 결혼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결혼하기까지, 그리고 결혼 후에도 우리 앞에는 항상 난관이 있었고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란 걸 너무나 잘 알았지만 2005년부터 지금까지 쌓아왔던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는 그 어떤 커플보다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다른 커플들처럼 많이 싸웠고 또 많이 행복했다. 걱정보다는 기대하면서 준비한 결혼식, 대한민국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을 하려니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많은 분이 내 일처럼 도와주어서 힘들 때보다는 행복할 때가 더 많았다.

2013년 9월 7일 결혼을 했다. 사랑하니까 하는 '당연한 결혼'에 수천 명의 하객이 참석해 축하해주었다. 내가 내민 손, 덥석 잡아준 많은 분께 정말 감사드린다.

© 정택용

결혼한 후 거리에서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소녀를 만났다. 그 소녀는 대뜸 내게 다가와서 "감독님 덕분에 저도 결혼이란 걸 꿈꾸게 됐으니 제가 결혼할 때쯤엔 우리나라도 동성 결혼이 합법화될 수 있도록 책임"지라고 했다. 하하, 귀여운 소녀의 당돌한 이야기에 웃음이 터졌다. 행복한 나의 결혼이 누군가에게 꿈을 준다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우리의 결혼으로 세상이 당장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결혼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각을 조금은 바꾸었다. 이성애자들에겐 '한국에서도 동성 결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 동성애자들에겐 '우리도 결혼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대한민국에서 동성 결혼은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 혹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게다가 우리의 결혼으로 대한민국이 조금 더 로맨틱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자뻑했나?

* 이 글은 <광수와 화니 이야기>(김조광수, 김승환 저, 시대의창)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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