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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회고록]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대선 막바지에 MB 스스로 BBK가 자기 회사라고 말했다는 소위 '광운대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 여기저기 접촉을 하고 다녔다. 내게는 시민단체에 있는 지인을 통해서 '누가 그런 것(광운대 동영상)을 가지고 있는데 팔겠다고 한다'며 연락이 왔다. 나는 박재성을 불러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그들을 만나도록 했다. 일당은 3인조로 파악됐다. 우리는 생각했다. '이들이 분명 정동영 후보 쪽에도 갔을 텐데 그들은 왜 사지 않았을까? 샀다면 왜 공개를 안 할까?'

  • 정두언
  • 입력 2016.10.14 11:16
  • 수정 2017.10.15 14:12

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도곡동 땅 사건과 관련한 수사 결과, 검찰은 이 땅이 제3자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최종 발표했다. 경선은 이명박 후보의 승리로 끝났고 도곡동 땅 사건의 진실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제 남은 것은 BBK 사건이었다. BBK를 둘러싼 MB 캠프의 입장은 BBK는 MB가 세운 회사가 아니고 김경준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BBK 사건은 피해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사건이다. '어떻게 대통령 될 사람이 기업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줬으며, 또 그런 형편없는 놈한테 사기를 당했는가. 또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이 책임도 지지 않고, 자기 것이 아니라고 거짓말까지 했는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 BBK 사건의 쟁점이었다. BBK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먼저 박근혜 쪽에서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파악했는지 등을 알아보았다. 만약 그때 MB가 BBK를 실제적으로 주도한 사실이 드러나면 그것은 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박근혜 쪽에서나 정동영 후보 쪽에서는 BBK가 MB가 김경준과 함께 주도적으로 차린 회사라고 몰아가려고 했으나, 대선이 끝날 때까지 결정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대선 막바지에 MB 스스로 BBK가 자기 회사라고 말했다는 소위 '광운대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 여기저기 접촉을 하고 다녔다. 내게는 시민단체에 있는 지인을 통해서 '누가 그런 것(광운대 동영상)을 가지고 있는데 팔겠다고 한다'며 연락이 왔다. 나는 박재성을 불러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그들을 만나도록 했다. 일당은 3인조로 파악됐다. 우리는 생각했다. '이들이 분명 정동영 후보 쪽에도 갔을 텐데 그들은 왜 사지 않았을까? 샀다면 왜 공개를 안 할까? 어쩌면 그들은 시기를 볼 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충분하게 대처할 시간이 없는 대선 직전에 공개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일당을 접촉 한 다음에 이들을 통해 야당 쪽의 동향을 파악하자.' 이런 생각에서 MB 캠프는 이들과 계속 접촉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어차피 알려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고 확신한 나는 MB에게 전말을 보고하고 결단을 내려달라고 했다. 대선이 임박했던 그 날은 인수위 구성과 관련해 준비한 내용을 처음 MB에게 보고한 날이었다. MB에게 한 시간 정도 인수위 준비에 대해 보고를 했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보고를 마칠 무렵 나는 따로 MB 옆으로 가 조용히 'BBK 광운대 동영상'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이 사람들을 만나서 우리 손으로 고발하는 게 답이다. 어차피 야당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라고 했다. 평소에 신중하기로 소문난 MB가 그날만은 '그렇게 하세요'라며 즉석에서 답을 주었다.

박재성은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3인조 일당을 서교호텔로 유인했다. 그런 다음 마포경찰서에 신고를 하니 홍대 앞 지구대에서 이들을 잡으러 왔다. 지구대 앞 파출소로 3명을 끌고 갔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20분 만에 갑자기 파출소에 나타난 것이다. 내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예상대로 정동영 후보 쪽에서 MB 후보 쪽을 함정에 빠뜨린 뒤 대선 막판에 엎어치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협박범들과 거래를 했다면 판이 완전히 뒤집어졌을 것이다. MB 후보 쪽에서 BBK 사건을 덮기 위해 부정한 거래를 한 것이 되어 대선판이 뒤집힐 수 있었다. MB 캠프로서는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물론 그들을 신고해서 처벌해 달라고 하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우리 후보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담긴 동영상이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공개되는 것을 자초하는 일이 아닌가. 대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보통 같으면 어영부영 설득해서 뭉개며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차피 정동영 후보 쪽도 (BBK 광운대 동영상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니 먼저 선수를 치자'라고 한 것이고 그것을 MB가 받아들이면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의 약점을 스스로가 공개해 버리니 국민들로부터 '큰 일 아니네'하는 반응이 돌아온 것이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는 BBK사건과 관련해 이른바 '김경준 편지'사건도 터졌다. 김경준과 같이 감옥에 있었던 신명이라는 사람이 김경준이 직접 쓴 것이라며 당에 편지를 전달한 것이다. 나도 진작에 그 편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접촉하지 말자는 쪽이었다. 신명 등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만큼 자칫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편지는 나중에 법률지원단장을 맡고 있던 홍준표에게까지 흘러갔는데 그는 편지를 근거로 당시 여당이 정치공작을 했다고 주장했다. 김경준은 홍준표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고소했다. 이러다가 유야무야 되고 말았는데 집권 한 이후에 편지는 다시 문제가 됐다. 훗날 드러난 진실은 신씨 형제의 자작극이었다. 그것으로 돈을 챙기려고 꾸민 것이다. 대선 같은 큰 판에서는 꼭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BBK 주가조작의 핵심 인물로 알려진 김경준씨가 2007년 11월 16일 밤 귀국 직후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되고 있다. © 연합뉴스

계속 여당에서 BBK 공세를 취하니 MB 캠프에서는 너도나도 'BBK 방어'를 맡겠다고 나섰다. 이미 김백준을 팀장으로 한 BBK팀이 경선 전부터 있었다. 실무는 은진수, 제승완 등이 맡고 있었다. 경선 후 뒤늦게 캠프에 합류한 홍준표는 고승덕, 정선태 등을 데려다가 BBK 대응팀을 별도로 꾸렸다. BBK 대응이 분산되다보니 엄청난 혼선이 생겼다. 그래서 후보와 상의하여 지금은 김앤장에 있는 김원용 전 이화여대 교수와 실질적인 대책반을 새로 만들었다. 김상희 전 법무차관을 팀장으로 해서 김필규(전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장용석(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이 실무를 맡았다. 결국 BBK와 관련한 실질적인 결정이나 조치, 처리, 검찰 접촉 같은 일은 다 이 팀에서 처리했다.

MB 집권 후에 BBK 사건과 관련해 의아스러운 일이 있었다. 2011년 김경준의 누나인 에리카 킴이 한국에 왔다. 당시 김경준은 감옥에 있었다. 그 해 2월 1일, 김경준이 소유한 회사의 스위스 계좌에서 다스로 돈이 입금된다. 과거 김경준이 횡령했던 140억 원이었다. 그리고 2개월 뒤인 4월 11일 다스는 8년 간 끌어온 모든 소송을 취하했다. <한겨레>는 2011년 5월17일 '다스, 김경준한테 140억 돌려받았다'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이때 MB 측은 에리카 킴에 대해 제기했던 몇 가지 소송도 함께 취하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그 일이 문제가 됐다. 왜냐면 그 회사가 소위 지불정지 상태에서 돈을 빼내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해괴한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다스는 MB가 대통령이 된 뒤 과거 김경준에게 사기 당해서 떼인 돈을 다 받아낸 셈이 됐다. 그 엄청난 물의를 빚고도 다스는 결국 단 한 푼도 손해를 보지 않은 셈이다. 숱한 논란을 일으켰던 BBK 사건은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2007년 12월 5일 서울 중앙지검에서 김홍일 3차장검사가 BBK 사건 수사 결과 발표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BBK의 실소유주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BBK 사건과 관련해 벌어진 물밑 대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야말로 진짜 역사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 2007년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이명박의 물밑 대화가 있었다. 도곡동 땅과 BBK 사건으로 대선 정국이 요동치던 2007년 초가을, 나는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한 한정식집에서 김병준 대통령 정책실장을 만났다. 나는 국민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실질적인 지도교수가 김병준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오래 전부터 그와 친밀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나는 "내용상으로 보면 사실 대선은 이미 끝난 것 아니냐. 그러니까 청와대가 가급적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깨끗하게 손을 떼고 있는 게 낫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김병준 실장은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또 노무현 대통령은 정동영 후보를 밀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청와대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MB를 밀어줄 수도 없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답했던 것 같다.

대선 종반 무렵이었다. MB 대선 캠프에서 일하던 추부길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선이 닿았다. 추부길은 박연차를 통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을 만났다. 추부길은 노건평에게 "이상득을 만날 수 있느냐" 물었다. 추부길은 선거를 치를 때마다 MB의 홍보를 도맡았던, 그리고 당시에는 이상득의 측근 인사였다. 노건평은 "못 만날 일이 뭐 있냐. 좋다. 만나자"라고 했다 한다. 추부길이 내게 이상득-노건평의 만남에 대해 말하며, 노무현-MB 간에 물밑 핫라인이 가동되고 있다고 했다. 추부길은 이상득-노건평의 만남에 대해 MB에게도 보고했다고 말했다. 훗날 언론은 이 사실이 보도되자 이상득과 노건평은 격이 맞지 않다며 추부길의 증언에 신뢰를 주지 않았다. 노건평은 노무현 대통령의 형이었지만 그냥 형이 아니다. 동생을 위해 고생한 형, 동생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형이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상득-이명박', '노건평-노무현' 관계는 닮은꼴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검찰은 계속 도곡동 땅 문제와 BBK사건을 수사했다. 물론 정동영 후보에 비해 MB 후보의 지지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검찰이 억지로 사건을 만들어서 대선에 개입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사태까지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것이 참모들의 역할이다.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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