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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을 감추는 국가, '병사'로 내달리는 사회

출생과 양육의 부담이 여성에게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나 청년층의 소득이 제 자신의 생존만 감당하기에도 빠듯하다는 점, 양육시설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 출산을 결정한 여성은 당장 제 경력을 단절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점, 이 모든 점을 차치하고라도 여성은 원치 않은 임신에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단 점. 이런 이유들은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말의 고려사항으로도 채택되지 못했다. 대신 '임신하지 않는 여성들의 무책임'이나 '낙태하는 여성들의 무책임'만이 출산율 저하의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 백승호
  • 입력 2016.10.14 11:35
  • 수정 2017.10.15 14:12

한 장의 공문, '여기서 죽게 하지 마라'

2012년 6월, 대구교육청은 지역 내 모든 초·중·고등학교에 한 장의 공문을 내려 보냈다. 학생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창문을 20cm만 열게 하라는 지시였다. 이 일이 있기 이전에도 대구교육청은 학교 옥상에서 자살하는 학생이 늘자 옥상 출입문을 자물쇠로 잠그라는 지시를 내렸다. 학생들의 잇따른 죽음에 대한 해법은 고작 그들의 자살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뿐이었다. 학생들의 잇단 죽음의 외부적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없었다.

대구 교육청이 공문을 내려 보낸 그해 9월, 서울시는 마포대교에서 '생명의 다리' 캠페인을 벌였다. 자살 명소(실제 마포대교는 서울시 전체 다리 중 투신 자살 사건이 제일 많다)라 불리는 마포대교의 투신자 숫자를 줄이기 위한 시도였지만, 이 캠페인의 결과로 마포대교는 2년 만에 자살자가 12배 증가했다.

캠페인 내용을 보면 정말 자살을 막고 싶은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마포대교 난간에 '힘든 일들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해 보면 어떨까?'든가 '수영 잘 해요?', '별일 없지?' 등 자살시도자의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문구를 덕지덕지 붙여놓았다. 이런 문구에 대해 박형민 형사정책연구원은 "너무 감성적인 접근은 오히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박탈감을 줄 수 있다."며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보통 결심이 아니다. 시간이나 장소 선택부터 의미 부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살을 결심하고 마포대교에 오른 사람들 중에 먼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의미들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작업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경향신문, 2015. 8. 15.)

12년째 OECD 자살률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은 이 캠페인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아예 마포대교의 난간을 넘지 못할 수준(약 2.5m)으로 올리겠다고 말했다. 올해 말, 이 난간공사가 완료되면 마포대교의 자살자는 확연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 줄어든 숫자는 분명히 누군가의 실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살이 원천봉쇄 된 마포대교를 떠난 자살시도자가 어느 곳으로 발걸음을 돌릴지는 알 길이 없다.

자살 막기 위한 스크린도어, 스크린도어 때문에 죽어간/삭제된 사람들

2003년 서울메트로는 전 역사에 투신자살과 사고를 막기 위한 스크린도어 설치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의 주요 역사 시설공사권과 유지보수권을 따낸 회사는 불과 설립 2주밖에 안 된 신생회사 유진메트로였다. 이 공사 덕에 지하철 자살자는 분명히 줄었고 MB의 최측근이 대표이사로 있는 유진메트로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살이 원천봉쇄 된 지하철 역사를 떠나 그들이 어디로 발걸음을 돌리는지는 알 길이 없다. 유진메트로 소속 비정규직 직원들은 해마다 안전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 부실 시공된 스크린도어를 보수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이 죽음의 원인은 '안전수칙'을 준수하지 않은 노동자 자신의 몫이었다.

쌍용자동차,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던 해고노동자 28명의 죽음

2009년 5월, 쌍용자동차는 대량해고를 자행했다. 사측과 정부는 경영악화와 유동성 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2004년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중국 상하이자동차는 약속한 1조 2천억 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지키지 않았고 핵심기술을 빼가는 데에만 골몰했다. 기술유출의 정황이 확인되자 검찰은 수사를 시작했고 상하이자동차는 '노조 문제'와 '검찰수사'를 이유로 쌍용자동차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정부와 보수언론, 사측과 주채권단인 산업은행 측은 이 모든 결과의 책임이 '노조'에 있다고 표명했다.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은 정리해고에 저항했다. 자신들이 손댈 수 없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덧입혀지는 것에 항의했다.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시작한 노조원들은 경찰의 무력진압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억울한 죄명으로 직장을 잃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복직투쟁을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생존과의 싸움도 시작되었다. 6년이 지난 2015년, 쌍용자동차 사측과 노동자들은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다. 하지만 그 긴 싸움 과정에서 해고자와 그의 가족 중 14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4명은 '병사'했다. 정부는 '운이 나빴던' 해고자들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 대신 기업에 저성과를 명분으로 해고의 길을 열어주는 '성과퇴출제'와 '쉬운해고'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 노인의 비명, 그리고 그의 '병사'

2015년 11월, 한 노인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뒤 중태에 빠졌다. 이 노인의 죽음에 대해 '폭력시위에 대한 정당한 진압과정 중 벌어진 사고'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누구도 그가 왜 시위 현장에 나갔는지는 묻지 않았다.

백남기. 그 노인의 이름이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 쌀값 수매가를 17만 원에서 21만 원까지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이 지켜지기는커녕 쌀값은 더 떨어졌고 농민들은 생존의 기로에 내몰렸다. 정부는 FTA가 누군가의 손해를 담보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해의 당사자'들은 살게 해달라고 애타게 소리쳤지만,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향했다. 자신들이 체결한 적 없는 FTA란 계약 때문에 자신들이 받아야 할 벌이 지나치게 가혹했기 때문에, 해결해 달라고 했다.

노인은 쓰러진 지 1년이 다 되어서 결국 사망했다. 그날 그 노인이 어쩌다 죽게 됐는지, 그 죽음의 광경을 많은 이들이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이 노인의 죽음은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처리되었다. 이 노인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자들은 사라졌다. 그가 하필 그날 그곳에서 '불법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 치부되었다. 그 노인이 그날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싶어서 올라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생명존중에 팔 걷어붙인 정부, 그리고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모자보건법을 위반해 임공임신중절(낙태)수술을 하는 의료인에게 기존 1개월에서 1년으로 자격정지 기간을 늘리는 의료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에 반발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지난 9일, 이 같은 개정안이 수정되지 않을 경우 낙태 수술을 완전히 중단하겠다고 밝혔고 같은 달 11일 보건복지부는 불법 낙태가 '비도덕적 의료행위'라며 개정안을 수정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간 낙태 수술을 묵인해 온 정부가 왜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낙태를 규제하겠다는 것인지, 정말 낙태를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해서 내놓은 정책인지는 의문이다. 다만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21명에 불과했고 이 낮은 숫자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속내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출생과 양육의 부담이 여성에게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나 청년층의 소득이 제 자신의 생존만 감당하기에도 빠듯하다는 점, 양육시설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 출산을 결정한 여성은 당장 제 경력을 단절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점, 이 모든 점을 차치하고라도 여성은 원치 않은 임신에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단 점.

이런 이유들은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말의 고려사항으로도 채택되지 못했다. 대신 '임신하지 않는 여성들의 무책임'이나 '낙태하는 여성들의 무책임'만이 출산율 저하의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이 개정법이 통과된다면 가시적인 낙태율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으로 고통 받는 여성이 얼마나 늘어날지, 국내 법망을 피해 원정낙태를 감수해야 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더 늘어날진 알 길이 없다.

'외인'을 감추는 국가, '병사'로 내달리는 사회

창문을 닫아버리고 난간을 높여 빈곤과 고통에 시달리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자살자를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버리는 동안, 명백한 외인사이자 타살이었던 사건을 '병사'로 둔갑하며 명백한 귀책자인 국가의 책임을 외면한 동안,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부부가 왜 임신을 결정하지 못하는지 이유를 듣는 대신 여성과 낙태 시술자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는 동안.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택하고, 누구는 밖으로 탈출하고, 누구는 출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위기가 온다'는 피상적인 말만 반복될 뿐, 보기에 거북한 것들을 낙인찍거나 치워버리는 일들만 반복할 뿐, 누구도 이 문제들의 '진짜' 원인을 진단하거나 책임지려 하진 않는다.

국가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며 스스로가 '완전무결'함을 선언했고, 우리는 그 사이 절망과 비명, 그리고 서로를 향한 폭력만이 감도는 '아수라'를 감당해야 했다. 우리에게 어떤 사건 사고의 '외인'을 묻는 것은 금기이자 도전이 된 지 오래다.

행복과 생존을 운에 내맡긴 사람들 손엔 시한폭탄이 하나씩 쥐어져 있다. 너무 자주 터진다. 우린 죽어가고 있고 이 나라는 병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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