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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또 하나의 '알탕 영화'

이런 영화들에 대한 비판에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 개별영화가 아닌 이런 부류 영화의 유행과 흐름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알탕 영화들은 대부분 여성혐오적이지만 그와 별도로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영화들이 비정상적으로 많고 그 비정상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풍토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 듀나
  • 입력 2016.10.13 10:52
  • 수정 2017.10.14 14:12
ⓒ사나이픽처스

결국 인터넷은 '알탕영화'와 '개저비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알탕영화는 남자들만 부글거리는 영화란 뜻이고 개저비엘이란 여성혐오가 너무 심해 여자들을 배재하고 개저씨들만 등장시키다보니 의도치 않게 남자들의 사랑을 그린 장르, '비엘물' 비슷해진 영화라는 뜻이다. 인터넷 유행어가 대부분 그렇듯 이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이 있다. 그 전에 이 개념을 보다 진지하게 다루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영화들에 대한 비판에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 개별영화가 아닌 이런 부류 영화의 유행과 흐름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알탕 영화들은 대부분 여성혐오적이지만 그와 별도로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영화들이 비정상적으로 많고 그 비정상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풍토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김성수의 신작 <아수라>도 알탕영화/개저비엘에 포함된다. 전자는 의도이지만 후자는 (여기에 속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듯) 의도가 아닐 것이다. 그가 알탕영화를 만든 것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이야기꾼은 해야 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가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김성수의 전작들(<영어완전정복>, <중천>, <감기>)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설득력 있는 여성 캐릭터를 만드는 데엔 신기할 정도로 재주가 없다. 특히 <감기>를 보고 있으면 주변에 어떤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암살>과 <타짜>의 최동훈의 경우 그의 여성 캐릭터 활용을 비판하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훌륭한 여성 캐릭터를 만드는 능력이 있어서 올바른 방향으로 조금만 등을 밀어도 성과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김성수의 전작들을 보고 있으면 그는 그냥 알탕영화를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가 만든 가장 극단적인 알탕영화인 <아수라>는 확실히 <감기>보다는 김성수의 개성을 더 잘 살린 영화이다. 좋은 영화인가는 또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여유는 없고, 딱 한 가지만 건드리기로 한다. 그건 대부분 개저비엘 영화가 의도와 상관없이 개저비엘 영화가 된 것처럼 <아수라> 역시 원래 의도와는 다른 식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성수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한국남성문화에 대한 비판을 의도하고 있다는 건 자명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폭력적인 알탕영화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는 그의 진지함은 의미를 잃게 된다. 파괴적인 남성성은 그 자체가 익숙한 장르적 쾌락이 되고 아무리 강도를 높이고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다고 해도 감상의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오래 전에 이 모든 것이 습관화된 관객들은 굳이 그런 식으로 영화를 읽을 필요가 없고, 이들 영화 속의 개저씨들은 감독의 의도 따위는 사뿐하게 즈려밟을 수 있는 자기만의 권력을 얻었다. 결국 넘쳐나는 알탕영화들은 개별 알탕영화들의 의미를 약화시킨다.

아, 공간이 남았으니 한 가지 더. 김성수는 간신히 대사를 얻은 두 여성 캐릭터가 남자들보다 조금 멀쩡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들을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알탕영화에서 이런 여자들의 '정상성'은 '무존재'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 생색은 변명의 핑계가 되지 못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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