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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人터뷰] '립반윙클의 신부'의 이와이 슌지 감독

우리는 가족이란 관계가 필연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가족 또한 우연히 만들어진 관계 아닌가. 혈연으로 이어져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해진 운명에 놓인 관계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싸움이 일어난다. 그 운명적 관계 안에서 내가 너를 지배해야 한다는 알력이 형성된다. 사실 그런 관계란 인간과 인간이라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선 존재할 수 없는 폭력 아닌가. 그래서 누구를 만나면 사람이 행복한 것인지, 누구와 함께할 때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지, 결국 그런 행복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되는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동시에 그런 행복이란 결국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 민용준
  • 입력 2016.10.08 09:27
  • 수정 2017.10.09 14:12

<러브레터>로 잘 알려진 이와이 슌지는 감성이라는 단어로 손쉽게 수식되는 감독이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나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같은 작품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립반윙클의 신부>는 이와이 슌지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간만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SNS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던 나나미라는 여자의 기구한 삶을 관망하는 태도로부터 냉정하고 잔인하다는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냉정함과 잔인함은 어느 개인에 대한 혐오로 투영된 감정이라기 보단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은연 중에 감지하는 이 세계에 대한 온도에 대한 공감에 가깝다. 수많은 불행의 좌표를 전전하는 나나미가 끝내 오롯이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공간에 머물게 되는 결말은 이와이 슌지의 시선이 수많은 불행의 좌표들 너머에 있는 행복으로 다다르는 염원임을 깨닫게 만든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이와이 슌지가 <뱀파이어> 이후로 5년 만에 발표한 극영화다. 그리고 2004년에 공개된 <하나와 앨리스> 이후로 12년 만에 발표하는, 일본에서 촬영한 극영화다. 게다가 국내에선 <뱀파이어>가 개봉되지 않았으므로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이와이 슌지의 세계인 셈이다. 그만큼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인터뷰를 위해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고, 준비한 질문의 절반 이상을 삼켜야 했지만 정적인 표정으로 단명한 생각을 전하는 이와이 슌지의 언어로부터 섬세한 결과 단단한 테가 느껴졌다.

<립반윙클의 신부>에서의 '립반윙클'은 W. 어빙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들었다.

특별히 그 소설을 좋아해서 사용한 건 아니다. <립반윙클의 신부>를 구상하고 있던 어느 날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작은 가게 이름이 '립반윙클'이었다. 그 이름을 발견한 순간 그 단어를 발음해내는 소리 자체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립반윙클'은 극중 인물인 마시로(코코)가 SNS '플래닛' 상에서 사용하는 익명인데, 나나미(쿠로키 하루)가 사용하는 '클램본'이나 '캄파넬리' 같은 익명 또한 주변에서 얻은 것일까?

맞다. 우연히 가져오게 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클램본은 실제로 일본에 있는 밴드 이름인데 산책하면서 그 밴드의 보컬이 발표한 솔로 앨범을 듣다가 문득 클램본이란 이름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플래닛(Planet)'이라는 SNS가 등장하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건가?

아니다.

일본에서 개봉된 세 시간 분량의 편집본에선 엔딩크레딧에 종이로 만든 플래닛의 아이콘을 쓰고 눈이 가려진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나미의 모습이 등장한다. 국내 극장에서 상영된 두 시간 분량의 인터내셔널 편집본에는 등장하지 않은 장면이지만 한국에서는 예고편에 편집돼 쓰였다. 고양이 형태의 아이콘을 생각한 계기가 궁금하다.

음, 솔직히 특별한 계기는 없다. 그냥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고양이 모자의 형태를 일종의 상징처럼 활용하고 싶었고 극중에서 필요한 이미지가 아니라 해도 영화의 한 부분에서는 고양이 모자를 쓰고 헤매는 인물의 모습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플래닛'의 아이콘을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다 결국 그 고양이 모자의 형태로 결정됐다.

<립반윙클의 신부>를 단순히 정리하자면 나나미라는 여성의 성장드라마라 할 수 있는데, 영화의 말미에 다다르면 나나마의 성장이 목소리로도 느껴진다. 물리적으로 더욱 커졌다는 느낌이랄까.

의도한 부분이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나나미의 목소리도 결국 커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나나미의 실제 가족들은 화목하지 않지만 나나미와 함께 가족 행세를 하는 이들로 구성된 가족들은 대단히 화목해 보인다. 그런데 <립반윙클의 신부>가 그런 세태를 비판하는 영화처럼 보이진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그런 것들이 더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실 결혼을 했다거나 가족의 구성원이라면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마치 어떤 롤모델에 맞춰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이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그런 걸 느낄 때마다 숨막힌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성질은 다양하기 때문에 가족의 형태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가족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남들이 봤을 때 독특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있을 수도 있고. 영화를 만들 때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그런 다양한 관계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나나미는 SNS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타인을 통해서 인생의 표류와 모험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떤 의미에선 가족이라는 울타리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가족이란 관계가 필연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가족 또한 우연히 만들어진 관계 아닌가. 혈연으로 이어져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해진 운명에 놓인 관계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싸움이 일어난다. 그 운명적 관계 안에서 내가 너를 지배해야 한다는 알력이 형성된다. 사실 그런 관계란 인간과 인간이라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선 존재할 수 없는 폭력 아닌가. 그래서 누구를 만나면 사람이 행복한 것인지, 누구와 함께 할 때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지, 결국 그런 행복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되는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동시에 그런 행복이란 결국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나나미의 삶에 큰 전환점이 찾아올 때마다 아무로(아야노 고)라는 남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는 나나미의 삶을 망치는 존재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삶을 회복할 계기가 될 만한 시련을 주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로는 현대사회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서비스의 화신에 가깝다. 그 서비스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늘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사람이라 항상 '~할까요?'란 식으로 묻는 말버릇을 갖고 있다. 결국 다른 인간에게 무언가를 제공하는 인간으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존재인데 결국 그에게 사람이란 등가교환의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나나미는 유약하고 소심해 보이지만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뒤 호텔로 쫓겨갔을 때 호텔 종업원에게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 여자의 단단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나나미는 늘 얕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우울해 보이는 인상이기도 해서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데 익숙해진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선 이 영화는 나나미라는 여자가 리트머스 종이처럼 세상의 감정을 흡수하고 배워나가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어떤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나나미를 보게 된다면 그녀는 매우 여려 보일 거다. 게다가 결코 긍정적이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나미의 성격이 정확히 어떻다고 정해놓고 그것을 표현해주길 바라진 않았다. 오히려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제시되는 상황 속에서 나나미가 보여주는 리액션이란 이럴 것이다라는 것을 정해가며 표현하도록 요구했다. 영화를 찍어가면서 나나미는 이렇게 변해갈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걸 설정해 나가면서 인물을 표현했다.

나나미를 연기한 쿠로키 하루가 그런 모호함을 잘 표현한 것 같다. 그녀를 TV 오디션장에서 만났다고 하던데.

사실 그녀를 처음 본 건 연극무대였다. 무대에 선 보습을 보고 매력적인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어느 TV 오디션장에서 쿠로키 하루를 만나게 됐고, 그녀가 연극에서 봤던 그 배우라는 걸 깨달았다. 오디션에서 굉장히 적극적이면서도 밝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후로 함께 방송을 진행하면서 그녀가 대단히 섬세하고 여린 면까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연기가 가능한 배우라는 걸 알게 됐다.

공중에서 부유하듯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점 덕분에 종종 유령과 같은 시선으로 인물들의 삶을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

그런 느낌을 주겠다는 의도는 없었지만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한다. 인물의 어깨 높이에서 촬영한 신이 많기도 하고, 카메라가 공중에 떠있다는 느낌을 받을 만한 움직임을 구사하기도 했으니까. 카메라를 숨겨놓고 몰래카메라처럼 보이도록 촬영한 신도 있고. 다만 신 별로 각기 다른 촬영 방식을 동원하기도 했고, 일관성을 부여해서 찍자는 방침을 세운 건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러브레터>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같은 전작들에선 풍부한 자연광이 부각된 이미지들이 주로 쓰였는데 <립반윙클의 신부>의 이미지는 좀 더 매끈해진 것 같다.

아마 <립반윙클의 신부>를 촬영할 때는 필터를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 같다. 과거 내 작품을 대부분 촬영한 시노다 노보루는 필터를 많이 썼다. 사실 나는 필터를 써서 촬영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터를 쓰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시노다 감독은 어느새 카메라에 필터를 끼운 채 촬영하곤 했다. 그래서 시노다 감독과 자주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시노다 감독도 내 영화가 아닌 다른 작품의 촬영 현장에선 필터를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하더라.

익명성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립반윙클의 신부>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시대에서는 컴퓨터 앞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익명의 대화가 가능한 시대이지만 <립반윙클의 신부>의 시대에서는 저마다 쥐고 있는 스마트폰의 액정을 통해 익명의 상대와 대화할 수 있다. 그래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의 익명 대화는 풍경 사이에 자막으로 교차편집돼 있고, <립반윙클의 신부>에서의 익명 대화는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리한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것으로 노출할 수 있다. 그 차이가 시대의 변화를 대변하는 느낌이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시대와 <립반윙클의 신부>의 시대는 인터넷과 같은 가상의 망을 통해 이어진 관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두 작품 사이의 변화 또한 명확히 느껴질 것 같다. 단말기나 컴퓨터 혹은 어떤 기계 안에서만 존재했던 가상의 세계가 지금은 현실로 구현된다. 이를 테면 핸드폰으로 주문을 하면 물건이 오고, 심지어 사람도 오고, 택시도 온다. <립반윙클의 신부>에서도 핸드폰으로 뭔가를 하니까 결혼식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처럼, 아르바이트나 직업도 핸드폰으로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과거에는 컴퓨터 안에 있는 세상, 컴퓨터 안에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이 가상의 세계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실물로 구현되는 세상이 됐다. 나나미가 남자친구도 핸드폰을 통해 얻게 됐다고 말하는 영화 속 세계는 이미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단말기나 기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꿔나가는 최첨단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결국 이 영화 자체가 SNS의 다양한 특징을 반영한 세계라고 생각한다.

나나미가 신혼집에서 짐을 싸고 쫓겨나듯 나올 때 바흐의 관현악이 우아하게 들려진다. 나나미의 누추한 상황이나 참담한 감정과 역설적인 선곡이다. 영화 전반적으로 피아노곡이나 기악곡 바탕의 클래식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인물의 감정이나 상황과 역설적인 감상을 주는 음악적 사용이라 생각했다.

아이튠즈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로 검색했을 때 1위부터 100위까지의 순위 안에 놓인 음악을 영화에 쓰자고 정해놓고 선곡을 정했다. 그러니까 <립반윙클의 신부>의 OST는 결혼식에서 자주 사용하는 스탠다드 넘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음악들이 슬프고 힘든 장면에서 등장했을 때 어떻게 느껴질지, 어떤 반응을 얻을지 테스트해봤는데 결과적으로 괜찮게 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까 말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나 멘델스 존의 곡처럼 극적인 분위기와 상반된 음악을 다양한 신에 사용했다. 그런 방식을 통해 역설적인 감정의 격함을 표현해보고자 했다.

결혼식 장면이 세 번 등장하고, 장례식과 제사도 한 번씩 등장한다. 전작들에서부터 이어지던 삶과 죽음이란 주제의식이 이번 작품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작들을 만들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니까. 게다가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여전하다.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다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삶과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생각해왔다. 특별한 생사관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내 영화 속에서도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투영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내가 만든 모든 작품에서는 크건 작건, 삶과 죽음에 대한 표현은 꼭 드러나게 돼있는 것 같다. 결국 삶과 죽음은 내 영화가 항상 품고 있는 주제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만들었고, 3.11 대지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도 자주 해왔다. 혹시 <립반윙클의 신부> 또한 그로 인한 영향으로부터 만들어진 영화라 말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3.11 대지진이 없었다면 일본을 배경에 둔 실사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도 않았을 것 같다. 결국 그 대지진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현대사회를 배경에 둔 영화를 담겠다고 생각하게 된 셈이다. 게다가 3.11 대지진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일본에 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5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내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순 없겠지만 영향을 받은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혹시 차기작을 보려면 또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준비하는 작품은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언급할 때는 아닌 거 같다.■

사진_장성용

<모닝 캄>을 비롯한 다양한 매거진에서 풍경과 인물 사진을 찍어 왔고, 현재는 색다른 콘셉트의 베이비 스튜디오 그린비(http://www.studiogreenbee.com)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_민용준

영화웹진 '무비스트'에서 영화기자로 밥벌이를 시작하며 'beyond'와 'ELLE KOREA' 에디터로 잡지를 만들고 기사를 쓰고 다양한 취재원을 만나 인터뷰를 해왔습니다. 현재에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문장을 팔며 밥벌이를 이어나가는 한편, 올레 TV <무비스타소셜클럽>의 배우 인터뷰 코너 '스타케치'와 KBS 라디오 월드 <생생코리아>의 '시네마토크'에 출연 중입니다. 주로 영화에 참견하고, 대중문화와 갖은 이슈에 종종 말과 글을 보탭니다. 한량의 삶을 추구하며 끊임 없이 놀고 먹으며 즐길 수 있는 노하우를 탐색해 왔으나 이번 생은 망했다는 결론을 얻고 나름대로 게으르게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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