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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회고록]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2007년 들어서면서 정국은 서서히 대선 정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2~3월이 되었는데도 MB는 경선 캠프를 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MB에게 "빨리 짜임새 있는 캠프를 꾸려야 한다. 본격적으로 진용을 갖춰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MB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리다가 세 번째로 얘기 했을 때에야 "그러면 이상득 의원과 상의해서 해보세요. 이재오 의원은 절대 모르게 하세요"라고 말했다. MB는 왜 이재오 의원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했던 것일까.

  • 정두언
  • 입력 2016.10.07 10:39
  • 수정 2017.10.08 14:12

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2006년 지방선거 후 급변한 대선판

MB는 자신의 뒤를 이어 누가 후임 서울시장이 되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일 상대당 후보가 서울시장이 되면 자신의 업적을 훼손시키려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세상일에는 밝은 면이 있는 반면 어두운 면도 있지 않은가. 청계천프로젝트에는 적자 덩어리인 가든파이브, 교통개혁에는 서울시의 재정투입이라는 어두운 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면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상대당 후보가 후임 서울시장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시 맹형규, 홍준표 등 한나라당 후보들은 상대 후보였던 강금실에 비해서 모두 열세였다. 게다가 그 중 선두에 있던 맹형규는 소위 친이가 아니었다. MB 쪽에서는 맹형규에게 친이명박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맹형규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자신은 중립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의 기질 상 박근혜 쪽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지방선거일이 가까워 오면서 '강금실 바람', 이른바 '康風'이 불면서 서울시장이 여당에게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MB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경쟁력 있는 제3의 인물을 찾아 나섰다. 정태근은 서울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을 만났고, 나는 삼성증권 사장을 지낸 황영기를 만났다. 정운찬은 총장 임기를 마쳐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양했으나, 실제로는 대권에 뜻이 있는 듯했다. 미국에 있던 안철수에게도 의사를 타진했으나 별무소득이었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오세훈이었다. 사실 정태근은 2006년 초 오세훈을 만나 박세일과 러닝메이트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어떠냐고 의중을 떠본 적이 있다. 당시 오세훈은 일언지하에 "내가 왜 부시장을 하느냐"고 잘랐었다. 어쨌든 박형준과 정병국 등이 적극적으로 오세훈을 추천했다. 정태근은 강남 관세청 사거리에 있는 한 다방에서 오세훈을 만났다.

정태근 : "서울시장 후보에 도전할 의지가 있나", "돌파할 준비가 되어 있나."

오세훈 : "하겠다."

정태근은 MB에게 '오세훈 카드'와 그 동안의 접촉 결과를 보고했다. MB는 환영했다. MB는 겉으로는 중립을 지켰으나, 속으로는 오세훈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나섰다. MB와 오세훈은 인연이 있었다. 오세훈은 MB 서울시장 선거 캠프에서 대변인을 했었다. MB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후에도 오세훈은 정무부시장을 하고 싶어 했다. 훗날 MB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당시는 다들 내가 정무부시장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MB에게 정무부시장을 시켜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오세훈은 강남에서 국회의원을 하다가 국회의원 불출마를 선언하고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예측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는 언젠가는 서울시장을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되었다고나 할까. 국회의원 불출마 선언-서울시장 출마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오세훈은 나름 승부사 기질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그는 대권을 향한 도약을 위해 또 다시 무상급식 문제로 승부를 걸다가 실패를 맛보고 만다.

오세훈은 기업광고에 출연할 정도의 높은 대중적 인기에, 이른바 '오세훈법'이라는 정치개혁을 주도했다는 명분, 그리고 출마하면 당연히 당선되는 지역에서 불출마를 선언했다는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순식간에 서울시장 선거의 흐름을 주도했다. 당시 당내에서는 맹형규가 앞서고 있었지만, 오세훈의 대중적인 높은 인기도는 시·구의원 출마자나 구청장 후보에게 더 많은 표를 견인해줄 시장후보로 작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풍이 강풍을 압도했다. 결국 경선에서 오세훈이 승리했다. 보통 경선은 대의원2 : 당원3 : 국민선거인단3 : 여론조사2의 비율로 치러진다. 당과 국민이 반반이다. 그러나 국민 지지도가 높은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 국민 속으로 가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의 지지를 견인해 내는 것이다. MB도, 오세훈도 결국 그런 방식으로 당내에서 앞선 박근혜, 맹형규를 이겼다.

2006년 추석 전까지 대선 후보 지지도는 고건-박근혜-MB 순이었다. 그런데 추석 전에 스커드미사일, 대포동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했던 북한이 2006년 10월 9일에는 1차 핵실험을 했다. 이를 계기로 대선 후보 순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북한 변수'가 발생하기 전부터 MB는 대운하를 이슈로 들고 나와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대선 같은 큰 싸움은 담론적 이슈를 갖고 싸우는 사람이 유리하다. 상대가 "안 돼!" "문제가 많아!"라고 하는 이슈를 들고 나와야 한다. 대운하가 그런 이슈였다. MB가 대운하 이슈를 내세워 달려갈 때 박근혜는 4개월 이상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본격 선거전에 들어가기 앞서 컨텐츠를 채우는 기간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때맞춰 북한 이슈가 터지면서 MB의 공세적인 이슈 주도는 힘을 받았고 박근혜는 정체 상태에 머물면서 순식간에 지지도가 역전됐다. 동시에 정권 말기의 노무현 피로도가 커짐과 동시에, 체감 경기가 안 좋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MB에게는 행운이었다. 그 틈을 타 MB는 '경제를 살리는 대통령' 이미지를 가지고 다양한 현장 이벤트를 계속 진행했다. 그 일환으로 간 곳 중의 하나에 안철수 연구소도 있었다.

2007년 2월 안국포럼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명박 후보. © 연합뉴스

풍수지리에 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으로 여유를 찾은 MB는 안국포럼 준비에 들어갔다. 대선을 향한 본격적인 도전이었다. 안국포럼 사무실은 조계사 앞 안국동에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 재밌는 일화가 있다. 사무실을 구하는데 풍수지리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는 종교가 무엇이든 신앙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

당시에 풍수가는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정병국, 정태근, 최시중 등이 제 각각 풍수가를 데려와 사무실 자리를 두고 '여기가 좋다, 저기가 좋다' 갑론을박했다. 나중에 이노근까지 등장했다. 그때 이노근은 종로구 부구청장을 하고 쉬고 있었다. 이노근은 자신이 풍수지리를 많이 공부했다며 북악산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인왕산이 있고 왼쪽에는 낙산이 있는데 풍수적으로 봤을 때 인왕산은 바위산이라 기가 세고 낙산 쪽은 온유하고 부드럽다고 했다.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봤을 때 오른쪽에 살던 최형우, 김현철, 이종찬, 이회창 등을 예로 들며 다 실패했고, 낙산 쪽에 살던 노무현, 고건 등을 예로 들며 무난하다고 했다. 원래 유력하게 거론됐던 사무실은 광화문 동화면세점 건물이었다. 교통도 좋고 위치도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노근은 거기도 북악산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라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조계사 맞은편에 있는 신한은행 빌딩에 사무실을 얻었다. 원래 이곳은 사무실로 쓰기에는 매우 한산한 자리였다. 하여간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안국포럼이 생겼다.

사무실만이 아니라 MB가 살 집도 새로 구해야 했다. 여기에도 풍수가 작용했다. 풍수적으로 좋은 집을 찾기 위해 혜화동부터 가회동까지 집들을 다 뒤졌다. 집을 구하기까지 엄청 말들이 많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풍수가들마다 말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가회동 한옥집으로 정했다. 주인은 인사동에서 한정식집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원래 그곳에 게스트하우스를 만들려고 사두었던 집이다. 그런데 MB가 들어온다니 원하는 대로 수리까지 해주고 세를 내주었다. MB는 대통령에 당선이 된 뒤 이 집을 나와 청와대로 들어갔다.

안국포럼의 발전

나는 당시 일인다역을 하고 있었다. 비서실장, 대변인, 정책위의장, 조직위원장, 기획위원장 등등. 하지만 계속 그렇게 갈 수는 없었다. 국회의원 신분이었으니 캠프 일에 전력투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보도 주로 밖을 돌아다니니 연설문이나 보도자료 같은 것을 차분하게 챙겨줄, 일종의 사무장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안국포럼에 첫 번째로 끌어들인 사람이 경기도 행정부지사를 지낸 백성운이었다. 나는 이를 위해 MB의 가회동 집을 찾았다.

정두언 : "그동안은 제가 이것저것 다 챙겨왔는데, 아무래도 역부족이니 사무실 일을 총괄하는 누군가를 영입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명박 : "누가 좋겠어?"

정두언 : "백성운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백성운을 추천했던 이유는 이명박 시장이 의장으로 있는 시도지사협의회 사무처를 백성운이 맡았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직에 있던 사람이니 경험과 균형감각을 가지고 중간에서 일을 잘 챙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백성운은 포항 출신이기도 했다.

2006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이명박 후보가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이명박 : (잠시 생각하더니) "뭐, 그것도-"

MB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MB는 늘 그랬다. 나는 늘 그랬듯이 이때에도 좀 앞서갔다. 백성운에게 연락해 빨리 와서 일하라고 말했다. 백성운이 오기 전까지 안국포럼은 위계질서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국회의원이었지만 실무자들과 똑같은 책상을 놓고 썼다. 그런데 백성운이 처음에 와서 한 일이 자신의 자리를 큼지막하게 만든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일하는 스타일도 자유로웠는데 백성운이 오자 사무실이 공무원 특유의 권위적인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공무원 출신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나, 나는 속으로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내가 자초한 일이니 뭐라 하겠는가.

백성운에 뒤이어 두 번째로 들어온 사람은 이성권 전 의원이었다. 경선 후보 입장에서 한반도 주변 3강 원수들을 만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MB 캠프는 아베 총리를 만나는 계획을 세웠다. 우여곡절 끝에 아베를 만나기로 결정되어 일본에 가야 하는데 당시 MB는 아무 직책이 없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현역 의원인 나를 초청하고 MB가 따라가는 식이 됐다. 그런데 나 혼자 가기에는 좀 옹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본 의회에서 보좌관도 했고 일본어에 능통한 당시 이성권 의원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이성권도 가겠다고 했다. 일본에 도착했는데, 아베 총리를 만나는 일정이 전날까지도 확정이 안됐다. 애를 태우고 있는데 MB는 느긋해 보였다. MB는 서울시장 시절에 아베 측근이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마침내 아베 쪽에서 연락이 와서 총리실에 들어가게 됐는데, 대사관 등 외교부 쪽 수행원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MB가 아베와 대화하는 중에 이성권이 사진을 찍고, 내가 기록을 하는 서기 역할을 했다. 나는 아베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이성권에게 "서울 가서 찍새 했다고 까발린다" 며 농을 했다.

안국포럼에서 전략기획은 박형준, 정병국이 맡았고, 나중에 안철수 의원의 핵심이 된 이태규가 실무적인 뒷받침을 했다. 이상득이 역할을 해 주호영도 끌어들여서 대변인 역할을 맡겼다. 이성권, 정병국, 박형준, 주호영 등이 들어오면서 안국포럼은 제법 조직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2007년 2월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에 참석한 강재섭 대표와 이재오 최고위원. © 한겨레

이재오, 대표 경선 패배 충격으로 뒤늦게 MB 캠프행

2006년 1월, 이재오는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김무성을 물리치고 당선했다. 나는 나름대로 이재오 당선에 기여를 했다. 이재오가 김무성한테 확연히 밀릴 때였는데, 내가 초·재선 의원들을 불러 모아 후보 간 토론을 제안하자고 했다. 정태근의 아이디어였다. 원내대표 경선과정에서 후보자들을 불러 토론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국가발전전략연구회', '새정치수요모임(개혁성향 소장파)', '초지일관(초선의원)', '푸른모임(중도성향 의원)' 등 각 의원모임은 사학법 무효화 투쟁 등 정국 현안에 대한 각 후보들의 입장을 밝히는 토론회를 요구하면서 이를 통해 지지 후보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토론을 마치자 김무성이 앞서던 판이 뒤집어졌다. 결국 이재오가 승리했다. 판을 뒤집는 정태근과 나의 '한 수'가 통한 셈이다. 이때 드러났지만, 김무성은 공식석상의 연설이나 토론에 약하다. 평소에는 말도 잘하고 조리 있는 편인데, 꼭 공식석상에 서면 사전에 써온 것을 읽는 등 허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재오 의원이 MB 캠프에 가담한 것은 2006년 추석 직전이다. 이재오는 그 해 7월에 있었던 당대표 경선에서의 패배에 크게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재오는 한나라당 대표 자리를 놓고 강재섭과 맞붙었다. 이때 이른바 '박근혜 퇴장 사건'이 일어났다. 이재오가 체육관에서 연설하는 도중 빨간 옷을 입고 가운데에 앉아 있던 박근혜가 나가 버린 것이다. 당원들은 박근혜가 '이재오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했다. 표는 당연히 강재섭에게 쏠렸고 이재오는 낙선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이재오는 박근혜와 척을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원내대표로 있을 때도 박근혜가 대표였는데 대표가 결정한 사항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 등 극진히 모셨다. 대표 경선에서 낙선하기 전까지는 MB와 동지라고 말은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다.

2006년 10월, 시청 앞에서는 하이서울페스티벌이 열렸다. 이를 계기삼아 MB는 서울에 있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을 다 불렀다. 경선에 대비해 스킨십을 넓혀 가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날 행사에서 이재오는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가 MB 옆에서 비서실장처럼 움직이며 서울 지역 의원들을 챙겼다. 이재오의 본격 등장이었다. 2007년 1월에는 안국포럼 옆에 있는 공평빌딩에 자기 사무실까지 내서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2007년 5월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국가발전전략연구회의 토론회에 참석한 이명박 후보,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 이재오 최고위원. © 한겨레

시작부터 삐걱거린 경선 캠프

2007년 들어서면서 정국은 서서히 대선 정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2~3월이 되었는데도 MB는 경선 캠프를 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MB에게 "빨리 짜임새 있는 캠프를 꾸려야 한다. 본격적으로 진용을 갖춰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MB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리다가 세 번째로 얘기 했을 때에야 "그러면 이상득 의원과 상의해서 해보세요. 이재오 의원은 절대 모르게 하세요"라고 말했다. MB는 왜 이재오 의원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했던 것일까. MB는 이재오가 캠프를 꾸리는 것을 불편해 하고 못 미더워 했다. 이재오에게 너무 힘이 실리는 것을 걱정해 내게 '이상득과 상의해서 하세요' 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이상득과 롯데호텔 비즈니스룸에서 수시로 만나며 캠프의 인사 작업을 했다. 실무는 김해수, 박재성, 경윤호가 맡았다. 대강 윤곽을 잡았을 때인데 사건이 터졌다. <경인일보>에 자료가 통째로 유출돼 캠프 구성원 명단이 보도된 것이다.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이재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MB에게 항의하고 난리가 났다. 내게 화살이 쏟아졌다. '그 자료가 보도 되면 제일 손해 보는 사람이 나인데 내가 유출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간신히 고비를 넘겼는데 <문화일보>에 또 다시 보도되면서 MB는 폭발했다. "도대체 너희들은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중간에 낀 나만 곤혹스런 상황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캠프 주도권을 잡은 이재오는 내가 그려놓은 그림을 뒤흔들었다. 이를테면 원래 그림은 박형준이 기획본부장이었는데 이재오는 나를 기획본부장으로 바꿨다. 나름대로 적임자라고 판단해 역할을 규정했던 캠프의 인사안이 다 틀어졌다. 자연히 일이 잘 돌아갈 리가 없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캠프는 계속 삐걱거렸다. 이재오도 그것을 알았다. 할 수 없이 경선을 2~3개월 남겨 놓고 정두언, 정태근, 박형준, 신재민 중심으로 캠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오후 회의팀'이었다. 오후 2시 회의를 따로 만들어 여기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캠프가 돌아갔다. 아침회의는 그냥 형식적인 회의일 뿐이었다. 이때부터 캠프는 제자리를 찾았다.

2007년 2월 이명박 후보의 안국포럼 사무실에서 정두언(가운데)등이 이 후보의 캐릭터 선정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정치권의 캠프에서는 항상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진다. 이회창 캠프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때는 강재섭이 했다가 다른 때는 서상목이 하는 등 주도권이 계속 바뀌었다. 따라서 캠프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자리를 보존하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데에 온 힘을 다 했다. 하루 일과가 100이라면 그 중 일은 20~30 하고, 나머지 70~80은 자기 자리를 철벽수비 하는데 쓴다. 나는 그 폐해를 이회창 캠프에서 두 차례나 본 후 캠프를 저런 식으로 운영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기득권을 버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캠프에 새로 들어오면 내 역할을 나누어 주고, 충실히 뒷바라지 해주려 노력했다. 경선이 종반에 이를 무렵이었다. 경선 캠프에 몇 명이 추가로 영입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조선일보 출신으로 정태근에 이어 디지털팀을 새로 맡게 된 진성호였다. 그런데 이미 사무실이 꽉 찬 터라 진성호의 자리가 없었다. 나는 이미 진작에 있던 내 자리를 양보하고 사무실 한 귀퉁이에 책상을 놓고 있던 터였다. 난감해 하는 진성호를 불러 내 구석자리 마저 내주었다. 진성호가 "형님은?" 하기에 "나는 어차피 자리에 붙어 있을 시간이 별로 없다. 핸드폰만 가지고 왔다 갔다 하면 되지 무슨 자리가 필요하냐"고 했다. 캠프의 최고 실세가 자기 자리도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루는 차명진 전 의원이 내게 "형, 나는 실세라는 사람이 형처럼 하는 것 처음 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나는 그것이 자신의 힘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자기 자리를 보존한다고 철벽수비를 하다가는 누구한테 당해도 당한다는 것을 한두 번 보았는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권력은 나누면 커진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권력은 나누면 작아진다 생각하고, 자기가 가진 권력을 쥐려고 발버둥 치다가 넘어지곤 한다." 만일 내가, 이회창 캠프의 예처럼, 내 자리를 보전하려고 애를 썼다면, 나는 그 자리를 지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설령 지켰다 하더라도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과 각축을 벌이다가 결국 '그들 중의 하나'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나는 내 자리와 역할을 양보하고 넘겨준 사람들 보다는 늘 '형님' 대접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캠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었던 비결을 하나 더 소개한다. 나는 MB에게 이것저것에 대해 보고하고, 건의 할 때 사전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실명제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즉, '이 얘기는 아무개의 의견입니다. 지금 누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심지어는 가능하면 아이디어의 소유권자를 직접 데리고 가 MB를 만나게 해주기도 했다. 이것이 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내게 사람이 몰렸다. 사람들이 내게 기대와 믿음을 갖고 모여들었고, 나는 그 힘을 결집하여 나와 그들과 캠프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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