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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내버려두라!

'소박하고도 진실한' 이 가족 이야기를 보며 오히려 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정신분열적인 데가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가족을 추켜올리는 시도는 가족의 수난을 은폐하거나 예고한다. 쉽게 가치를 부여하면서 쉽게 내팽개치며, 해체의 위협을 가하고 있을 때 가장 숭배를 바친다. 무엇보다 우리는 가족을 공동체의 원형으로 소환한 다음 곧장 공동체의 실패를 떠안겨버린다. 공동체와 가족의 실제 관계는 정확히 그 반대다. 공동체가 가족의 원형이며 가족의 고난은 공동체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상이다. 그러니 사회적 삶의 문제를 더는 가족에게 미루지 말아야 하며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가족을 내버려두어야 한다. 특히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는.

  • 황정아
  • 입력 2016.10.06 11:45
  • 수정 2017.10.07 14:12

어지간한 억지에는 둔감해져버렸거니 생각했으나 방심은 언제든 금물이다. 가족의 반대로 최선의 치료가 이뤄지지 못해 사망했으니 '병사(病死)'라는 해명은 그 황당함이 깊다 못해 재차 문구를 확인하고도 이런 말을 누군가 실제로 했으리라 믿기 어렵다. 가족의 반대가 문제였다고 주장할 것이라면 그건 또 어째서 '외인(外因)'이 아니라 '병'이란 말인지. 사회적 불의와 실패를 은폐하고자 가족을 소환하는 그 낡디낡은 기제를 새삼 확인하는 이 시절에 '가족영화'는 기시감과 거리감이 뒤섞이며 사뭇 낯설어 보인다.

가족을 소환하는 오랜 방식, 그리고 어느 '가족영화'

코레에다 히로까즈(是枝裕和)의 2016년작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면, '섬세하고 따뜻'하다거나 '마음의 위안'이라거나 '진심어리고 인간적'이라는 문구들을 만나게 된다. 과연 그랬다. 배경이 된 낡은 연립주택은 우리 '어머니'의 집처럼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키끼 키리인(樹木希林)과 아베 히로시(阿部寛)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무척 진심어린 것이었으며, 감독 특유의 아무렇지 않은 장면들을 구성한 디테일은 대단히 섬세했다. 마음의 위안을 얻어 거의 꼼짝없이 따뜻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설득되지 못했고 내내 어떤 위화감이 체기처럼 걸려 있었다. 코레에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 또한 물색없이 가족의 가치를 소리 높여 내세우거나 가족의 상실을 비장하게 개탄하는 건 아니다. '한량'처럼 무책임하게 살다 갔으리라 짐작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제 훨훨 자유롭다고 느끼는 어머니의 인생이 든든한 축으로 자리잡고, 한때 소설가로 주목받는 듯했으나 지금은 취재를 핑계 삼아 흥신소에 근무하면서 이혼한 아내에게 양육비도 제때 주지 못한 채 점점 아버지의 '사행성'을 닮아가는 아들의 인생이 앞자락에 깔린다. 한마디로 가족, 정확히 말해 흔히 가족의 토대라 여겨지는 결혼이 해체되고 난 다음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여기에 남편 때문에 인생의 온갖 쓴맛을 삼켰을 것이 분명한데도, 아니 오히려 그 쓴맛을 통해 정련되었을 어머니의 유쾌한 현명함(은 단연 압권이다)과, 스스로 점점 자기 인생의 쓴맛이 되어가면서도 좀체 삼키기는 거부하는 아들 료타의 철들지 않는 한심함 사이의 대조가 겹쳐진다. 둘 사이의 대조는 얼마든지 그럴 법하고,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말처럼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면서 정작 자기 아들과의 관계는 다르길 바라는 료타의 기분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대다수의 우리들은 료타 쪽에 가까워서, 풀리지 않는 인생을 '대기만성'이라는 말로 눙치며 망가진 과거에 미련을 두는 척 오늘의 할 일을 외면하곤 하니까.

이 잔잔한 흐름에 정서를 내맡기며 그것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지지 않는 건 제목에 등장하는 '태풍'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모든 걸 크게 뒤흔드는 태풍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덧붙이자면 원제인 '바다보다 더 깊이' 쪽이 훨씬 나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이혼한 아내의 데이트 장면을 몰래 뒤쫓는 건 스토킹이고 흥신소 고객을 상대로 부당거래를 도모하는 건 직업윤리 위반이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뭐라도 돈 될 만한 걸 남기지 않았나 어머니 집을 호시탐탐 뒤지며 집문서까지 노리는 건 절도(미수) 아닌가. 따지고 보면 심각할 수 있는 료타의 이 모든 행위는 영화에서 기껏해야 '찌질함'으로 수렴된다. 나의 됨됨이가 치명적으로 비판받지 않는 댓가로 폭로되는 못남과 나약함이란 얼마나 쉬운 반성의 대상이며 나 자신이 고작 찌질한 인간이라는 건 얼마나 안도할 일인가.

어떤 행위가 다른 무엇이 아닌 찌질함으로 비쳐지기 위해서는 그 행위의 성격에 응당 부합하는 해석을 범퍼링해줄 장치가 필요하다. 족히 수백년은 넘도록 가족이 그런 일을 해왔을 것이다. 료타가 무슨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므로 이 영화에서 가족이라는 범퍼는 그와 그의 인생 사이에 놓인다. 어머니가 무언가를 버려야 행복해진다는 경구를 들려주는 장면은 이미 료타가 매일매일 스스로를 적지 않게 버려온 인물임을 살짝 가려준다. 그가 아버지, 어머니, 전처, 아들, 누나 등의 가족관계를 거치지 않은 채 온전히 자기 삶을 응시해본 적이 몇번이었을지 의심스럽다. 그는 자기 삶의 실패를 가족의 실패와 너무 많이 얽어두었다. 그리고 이제 태풍이 오는 밤 아버지와 놀이터에서 보냈던 시간을 고스란히 아들과 재연하며 대기만성을 기다리는 삶을 앞으로도 지속할 에너지를 추출한다. 몰래 가져온 아버지의 벼루를 맡기러 간 전당포에서 실은 아버지가 소설가로서의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음을 알게 되는 설정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는 사실상 과거와 기억으로 남은 가족마저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

공동체와 가족의 뒤바뀐 관계

'소박하고도 진실한' 이 가족 이야기를 보며 오히려 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정신분열적인 데가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가족을 추켜올리는 시도는 가족의 수난을 은폐하거나 예고한다. 쉽게 가치를 부여하면서 쉽게 내팽개치며, 해체의 위협을 가하고 있을 때 가장 숭배를 바친다. 무엇보다 우리는 가족을 공동체의 원형으로 소환한 다음 곧장 공동체의 실패를 떠안겨버린다. 공동체와 가족의 실제 관계는 정확히 그 반대다. 공동체가 가족의 원형이며 가족의 고난은 공동체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상이다. 그러니 사회적 삶의 문제를 더는 가족에게 미루지 말아야 하며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가족을 내버려두어야 한다. 특히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는.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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