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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흔들고 있는 건 네 몸이지, 내 몸이 아니었어

A는 인생에서 거쳐온 고비라곤 수능밖에 없는 지루한 서사의 인간이었다. 세상에 대해 평론하고 싶은 것이라곤 맛집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이 가게 점원 태도가 어쩌네 저쩌네' 하며 아르바이트생의 인성을 운운하는 A를 볼 때면 나는 그를 멸시했다. 사랑이 도취나 찬양이 아닐 수 있고, 어떤 욕구의 교환일 수 있다는 걸 A는 내게 가르쳐줬다. 내가 그를 멸시했던 것은 그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 조소담
  • 입력 2016.10.06 10:28
  • 수정 2017.10.07 14:12

소녀, 소년을 만나다 02 | 네가 흔들고 있는 건 네 몸이지, 내 몸이 아니었어

너는 장례식장에 있었다

조문 가던 날을 기억한다. 언니의 검은 원피스를 빌려입고 고속버스를 탔다. 창에 기대서 핸드폰을 뚫어져라 봤다. 한참 연락이 없기에 그럴 만한 상황이겠거니 짐작했다. 네이버에 '조문 예절'을 검색했다. 절은 두 번 반. 오른손을 왼손 위에, 아니 왼손을 오른손 위에? 절을 하다 넘어지면 어떡하지. 양말에 구멍이 나있으면 어떡하지. 나는 옆자리가 빈 버스 안에서 조용히 신발을 벗어 발바닥을 확인했다. 다행히 구멍은 없었다.

고속버스를 내리고도 한참을 갔다. 택시가 잘 잡히지도 않는 동네였다. 한가로이 달리던 차 하나를 잡았다. 장례식장 이름을 말하니 기사는 대꾸도 없이 엑셀을 밟았다. 동네가 오밀조밀하다고 해야할지, 덜 채워졌다고 해야할지. 눈높이보다 높이 세운 건물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장례식장 주변은 휑했다. 한 층 짜리 건물에 주차장만 넓었다. 도로변에 놓인 그 곳은 양 옆으로 초라한 슈퍼와 구멍가게를 끼고 있었다. 누가 엎어놓고 떠난 마분지 박스 같았다. 바람에 덜덜 흔들릴 것 같았다.

장례식장 입구엔 네온 사인으로 상주와 고인의 이름, 배정된 호실이 번갈아 표시됐다. 야구 게임장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다. 빨강에 초록 네온. 그 위에 A의 이름이 있었다. A를 처음 보고 나는 웃었던가? 울었던가? 울다가 눈물을 닦고 웃었던가? 그 애를 먼저 안아주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A는 울지 않았다. 애정 없는 친척의 상이라 말했다. A는 밧줄 맨 이상한 모자에 팔토시를 하고 있었다. 본 적 없는 양복 차림에 몸에 맞지도 않는 커다란 셔츠가 어색했다. 나는 A를 때리며 좀 웃었다. A는 장례식장에서 급히 빌린 옷이라 했다.

나는 육개장 그릇을 나르지 못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방에 갔다가 A의 어머니에게 혼쭐이 났다. 등 떠밀려 상에 앉아 편육을 먹었다. 내 생에 가장 맛없는 편육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죽음에 출장을 와서는 누가 버린 재활용 가구처럼 가만 앉아 편육을 씹었다. 속으로 주말이 아깝다 생각했다. A는 나를 신경 써주었다. 내 앞에 앉아 있어주었다. 그가 신경을 써주는 게 불편했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은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달라는 걸 주고, 나는 받고 싶은 걸 받고

A는 동아리에서 만났다. 나이는 같았지만 행동이 애 같았다.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가 있으면 그날 저녁은 그 메뉴를 먹으러 가야 했다. 내가 종이처럼 밥을 씹고 있어도 별 미안함 없이 계속 같은 식당을 데려갔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게 징그럽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게 편했다. 내가 이기적으로 굴면 이기적이라고 나를 욕해줘서 편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돌리지 않고 '떼를 쓰는 모습'이 편했다. 사랑에서 뭘 줘야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관계가 있고, 뭘 줘야할지 분명한 관계가 있다. A는 후자였다. 나는 A를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뭘 달라고 할 때 주는 정도의 관심으로 A를 대했다. 달라는 걸 주고, 나는 받고 싶은 걸 받았다.

A와 있는 시간은 장례식에서 식은 편육을 먹는 것만큼 지루할 때가 많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자주 감탄했다.

"대단하다. 너는 정말 대단해."

이 말은 덧붙여 번역하자면 이랬다.

"대단하다. 너의 불행은 정말 대단해. 너는 어떻게 그 불행들을 뚫고 살아올 수 있었어? 나는 한 번도 너만큼 불행한 적이 없었는데. 네 불행이 참 매력적이야."

A는 인생에서 거쳐온 고비라곤 수능밖에 없는 지루한 서사의 인간이었다. 세상에 대해 평론하고 싶은 것이라곤 맛집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이 가게 점원 태도가 어쩌네 저쩌네' 하며 아르바이트생의 인성을 운운하는 A를 볼 때면 나는 그를 멸시했다. 사랑이 도취나 찬양이 아닐 수 있고, 어떤 욕구의 교환일 수 있다는 걸 A는 내게 가르쳐줬다. 내가 그를 멸시했던 것은 그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 A의 구애를 받던 때, 나는 A에게 이렇게 (돌려) 말했다.

"나는 너를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해.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동시에 너를 만나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

= '나를 채우려면 10이 필요한데 너는 2 정도를 가진 사람이야. 그러면 나는 왜 너만을 사랑해야 해? (섹스가 포함된) 데이트나 하자.'

A는 혼란스러운 그대로 승질을 내었다.

"이기적인 년."

그러고는 내 제안대로 나를 만났다. 씩씩대며 뒤돌아와서는. A가 나를 욕하지 않았다면 나는 A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욕망 받이는 되지 않기로 결심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상대방도 '추호도 남의 욕망만 받아줄 생각은 없는 인간'이길 바랐다. A는 적당한 상대였다.

인간이 온혈동물이 아니었다면 연애 같은 건

사랑이란 단어로 퉁 치기엔 관계의 스펙트럼이 무수하다. 사랑을 신격화할 생각은 없다. 사랑은 말과 몸이 머물렀다 비어가는 그 모든 자리다. 그러니까, 달팽이 진액처럼 알맹이가 지나가고 찐득하게 남은 '빈 자리' 또한 사랑이다. 징그럽게도 말이야. 말이 빈 순간마다 A는 몸을 채웠다. 내가 비어있지 않도록 그는 계속 살을 맞대었다. 함께 보낸 수많은 시간 중 말이 없었던 시간이 더 많았다. 할 얘기가 없었고, 이야기를 불려나갈 상상력이 없는 파트너였으니까. 그래도 체온이 좋았다. 나는 인간이 온혈동물이 아니었다면 연애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았어?"

뒤돌아 누워 A는 그렇게 물었다. 열 번을 섹스 하면 열 한 번을 물었다. 계속 인정을 구하는 사람은 밑 빠진 독 같다. 나는 종종 고민했다. 이렇게 답하면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될까?

'혀는 미꾸라지 같았어.

너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어.

네가 흔들고 있는 건 네 몸이지, 내 몸이 아니었어.

나는 몸도 마음도 미동 없이 그냥 졸았어.'

말해봤자 너는 못 알아듣고 '졸리면 자자'고 날 안았을 것이다. 말이야 뭐 쓸모가 없지. 너나 나나 우리는 혼잣말만 하는 연애를 하고 있잖아.

"응. 이제 잘까?"

나는 영민해서 포기가 빨랐다. 얻을 수 있는 것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았다. 헛된 기대라고 선 긋는 것이 굿잡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혼잣말 같은 연애는 생각보다 길었고, 그 연애가 끝날 때쯤엔 '다시 이런 연애를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를 바 없는 남자를 또 만났다.

귀가 제대로 달려있는 남자를 찾기란 어려웠다. 고추는 다 달려있는데 귀까지 달려있는 사람은 찾기가 어렵다. 자신이 애 같고 이기적인 것을 내가 이해해줘야 하는 성역으로 만드는 7살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자신을 '열 세 살쯤은 먹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텅 빈 자리 같은, 혼잣말 같은 연애가 자꾸 끝나고 또 시작되었다.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 되었다. 사람은 딱 자기가 비워줄 수 있는 자리만큼만 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란 걸 나중에 깨달았다.

모든 일은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그때 일어납니다. 몇 가지 진실과, 몇 가지의 거짓으로 써 내려가겠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기록. <소녀,소년을 만나다>는 시리즈로 연재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블로그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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