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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사용설명서

김영란법은 결국 전문가들이 공정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대포에 쓰러진 농민의 사망진단서는 '병사(病死)'가 맞나. '외인사(外因死)'가 맞나. 사법정의를 지킨다는 판검사들이 왜 스폰서에 놀아나는가. 기자들은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전문가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움직이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직업적 자존심만은 지키겠다는 각성이 이어질 때 김영란법은 성공할 수 있다.

  • 권석천
  • 입력 2016.10.05 06:25
  • 수정 2017.10.06 14:12
ⓒ연합뉴스

우린 뭔가 오해하고 있다. 부정청탁 금지법(이하 '김영란법')은 단속하고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법 제정을 주도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은 "행동 강령"이라고 말한다.

"소수의 악당이 아니라 다수의 선한 사람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라면 그걸 통제하는 방법이 중요해요. 체포 가능성을 높이고 처벌수위만 높여가지고는 해결될 수 없다는 거죠. 오히려 도덕적 규범을 머리에 떠올리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태도를 바꿀 수 있다...."(『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공직자와 교원, 언론인은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을 넘어 주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법을 사용하는 방법부터 알아야 한다.

1. 법률가에게 맡기지 말고 함께 토론한다.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만나고, 전화 받고, 밥 먹고, 선물 받았다면 이제는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야 한다. 직무와 관련된 사람의 사무실에 들러 차 한잔을 마신 것도 김영란법 위반일까. 그런 고민을 법률가들에게만 맡기는 건 곤란하다.

'3·5·10'(식사·선물·경조사비) 원칙이 적용되는 '원활한 직무수행'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가장 잘 아는 건 국민권익위도, 판사들도 아니다.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자신이다.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를 놓고 국회의원들이, 각 부처 공무원들이, 교수·교사들이, 기자들이 토론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올바른 직무의 범위와 한계가 가려질 것이고 수사·재판에서 판단 자료가 될 것이다.

2. 제대로 일하는 시스템을 만들어간다.

김영란법은 부정한 청탁을 주고받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공무원들이 김영란법을 핑계로 민원인과의 접촉을 기피한다든지, 업무 처리를 보류하는 건 옳지 않다. 오히려 할 일은 늘었다. 무슨 얘기냐고?

그릇된 청탁에도 이유가 있다. 그동안 국회의원 등에게 '특별면회' 민원이 몰린 것은 교도소·구치소 재소자들에게 면회 기회와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소자 면회 시설과 지원 인력을 늘려야 한다. 공무원이 청탁을 우려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건 직무유기다. 김 전 위원장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양쪽을 불러 같이 만나라."

3. 돈에 꼬리표 붙이려는 욕심을 버린다.

'공연·문화계가 고사 위기다.' '연수 지원 금지는 부당하다.' 우려와 반발이 불거지고 있다. 기업들이 돈에 꼬리표를 붙이겠다는 욕심만 버리면 해결될 가능성이 크다.

티켓을 다량 구매해 유력인사들에게 돌리는 대신 공연계에 대한 직접 지원을 확대하면 보다 많은 시민이 저렴하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대기업 언론재단은 언론진흥재단이나 기자협회에 연수 지원금을 일임하고 페어플레이 정신에 따라 연수자가 선발되도록 해야 한다. 진정 문화 발전, 언론 발전을 위해 지원해 온 것이라면 그러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4. 전문가의 생명은 자존심임을 기억한다.

김영란법은 결국 전문가들이 공정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대포에 쓰러진 농민의 사망진단서는 '병사(病死)'가 맞나. '외인사(外因死)'가 맞나. 사법정의를 지킨다는 판검사들이 왜 스폰서에 놀아나는가. 기자들은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전문가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움직이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직업적 자존심만은 지키겠다는 각성이 이어질 때 김영란법은 성공할 수 있다. "선배님들께 의사의 길을 묻습니다. 전문가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오류를 범했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의대생들의 성명에서 희망을 본다.

김영란법은 김영란 한 사람이 만든 게 아니다. 한국 사회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한계상황에 접어든 것이다. 시행 초기의 혼란과 부작용을 부각시키며 실패하기만 기다려선 안 된다. 그렇게 화훼 농가가 걱정된다면 가족과 연인에게 꽃을 사가라. 그것이 다음 세대에 좀 더 깨끗한 일상을 물려주는 길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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