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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공권력에 의해 부검이 이루어졌던 과거 4가지

지난 해 민중총궐기에서 물대포를 맞고 중태에 빠진 이후 316일만에 사망한 농민 백남기씨의 부검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법원은 유족과 유족 지정 의사 2명, 변호사 1명 입회 하에만 부검이 가능하다는 조건부 부검영장을 9월 28일 발부했지만, 유족들은 부검 자체에 대해 결사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있다. 이에 맞춰 10월 1일 대학로에서 주최측 추산 3만명이 모인 추모제가 벌어졌고, 그 전인 9월 30일 서울대 의대생 102명이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실, 부검이 문제가 되어 심각한 갈등 상황으로까지 갔던 죽음이 이번만은 아니다. 특히 의문사가 많았던 8,90년대 국가에 의해 강제 집행되었던 부검들은 시대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던 요인이기도 했다. 책을 통해 부검이 문제가 되었던 죽음들 중 '극히 일부'의 사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1. 박종철

"...이 날 밤 9시경 검사 입회하에 부검이 실시되었다. 이 부검에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1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황적준은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경찰측으로부터 부검감정서에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협박을 받았다."(책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강준만 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경찰이 부검 과정에서 사인을 조작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경우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던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은 물고문 끝에 경부압박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을 덮기 위해 당시 부검을 맡았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에게 부검감정서에 사인을 심장마비로 적으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감정서 소견을 근거로 고문이 아닌 '심장마비에 의한 쇼크사'라는 주장을 하려던 속셈이었다. 실제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박종철 사망 다음날인 1월 15일 "책상을 '탁'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사망하였다는 요지의 공식발표문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1월 16일 대공분실 5층 9호실에서 박종철의 사망을 처음 목격한 내과의 오연상을 통해 물고문의 가능성이 처음 제기되었고, 17일 소신을 꺾지 않은 부검의 황적준의 '흉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소견서가 최종 보고되면서 경찰의 고문 실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부검의가 경찰의 뜻에 따랐다면 영영 묻혔을지도 모를 사건이었다.

2. 박관현

"...이날밤 11시경 2개 중대 병력의 경찰기동대와 정사복형사들이 갑자기 영안일 주변을 에워쌌다.

"시신을 부검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시신을 인도해 달라. 부검 후 가족들에게 인도하겠다."

...관현의 어머니도 "내 자식 두 번 죽이려거든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울부짖으며 대항했다. 조문객들과 가족들이 결사적으로 버티자 부장검사가 나타나서 '시체부검영장'을 제시했다. 대치가 계속되고 있던 저녁 11시 30분경, 경찰은 '시신탈취작전'을 개시했다...10월 13일 자정 무렵, 시신은 관 속에서 다시 꺼내져 가족은 한 사람도 입회하지 않은 채 다시 갈기갈기 찢기어졌다."(책 '광주의 넋 박관현', 임낙평 저)

19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5.18 민주화 운동 수배자로 1982년 4월 5일 연행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그 안에서 교도소 수감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3차례에 걸쳐 단식투쟁을 벌이다 10월 12일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경찰은 시신이 안치된 전남대 부속병원 빈소로 시민과 학생들이 몰리자 병원 주변을 경찰력으로 봉쇄하고 '부검영장'을 들고 진입해 시신을 탈취해간 후, 가족 입회 및 동의 없이 부검을 진행하고 시신을 고향 영광 불갑의 원불교당에 던져놓는다. 박관현의 시신은 1987년 망월동 묘역에 정식으로 이장될 때까지 그렇게 그 곳에 묻혀있어야 했다.

3. 박창수

"사실이었군요. 그렇게도 믿기질 않아 제 살을 꼬집으며 행여나 당신의 구속 소식을 들었을 때 꿈이길 바랐건만 아무것도 꿈이 아니군요.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먹고 살자고 한 일이니 금방 풀려나겠지.

늦어도 여름이 가기 전에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와서 예전의 모습대로 늘 앞장선 믿음직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되겠지.

...목이 빠지도록 당신을 기다려 온 용찬이 엄마, 용찬이, 예란이...그 모든 이들이 그토록 당신을 사무치게 기다려 왔건만 이 미치도록 푸른 여름에 어쩌자고 당신은 이렇게 서럽디 서러운 주검으로 돌아오셨습니까?...어쩌자고 이렇게 돌아오셨습니까?"(책 '소금꽃 나무', 김진숙 저)

박창수는 1990년부터 91년까지 한진중공업의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다 91년 2월 10일 대우조선 파업을 지지했단 이유로 연행되어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5월 4일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5월 6일 병원 1층 콘크리트 바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연행 전부터 안기부 직원이 박창수를 감시하였고 사망 전날에도 병원에 직접 찾아와 면회를 가졌다는 증언이 있는 점, 단순 추락사로 보기에는 깨진 링거병 조각이 너무 좁게 흩어져 있던 점 등을 미루어 보아 타살의 가능성이 있음을 유족들이 제기하였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Ⅱ(2000.10-2002.10)',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저). 따라서 당시 검찰은 유족이 지정한 의사와 변호사의 입회 하에 부검을 실시할 것을 유족과 합의했으나, 5월 7일 백골단을 동원해 영안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어와 노동자들을 끌어낸 후 시신을 탈취해갔다. 결국 부검은 누구의 입회도 없이 강제로 진행되었고, '자살'이란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박창수의 죽음은 2016년 오늘까지도 '의문사'로 남아있다.

4. 김준배

"...현장 검증을 하면서는 이○진이 김준배를 발견하고 검거하는 장면을 재연하지 않았고, 김준배의 유족이 경찰폭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최초 발견자인 이○진에 대한 구타 여부 조사를 하지 않았고, 1308호 안에 들어간 형사기동대원들이 김준배와 접촉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부검 중에도 유족이 김준배 상의에 나타난 신발 자국이 구타로 인해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지속적으로 사망과정에 구타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그에 대한 수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Ⅱ(2000.10-2002.10)',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저)

김준배의 죽음은 경찰의 형식적인 부검으로 인해 진실이 가리워진 경우다. 김준배는 광주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운동가로, 수배를 피해 광주광역시 북구 청암아파트 1308호에 은신하던 중 자신을 검거하려 진입한 경찰을 피하다 추락해 1997년 9월 16일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구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학생들의 항의 및 시위를 두려워한 경찰은 추석연휴 기간 중 수사를 서둘러 종결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절차가 누락되었다. 부검은 진행되었으나 구타에 대한 유족들의 의혹 제기는 수사 과정에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검거 당시 경찰의 안전조치 이행 여부에 대한 검토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부검감정서가 경찰에 회신된 것조차 수사가 종결되고 4개월이나 지나서였다. 사건을 빨리 덮으려는 형식적인 절차 중의 하나로써만 부검이 이용된 까닭에 김준배의 죽음은 '의문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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