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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큼 아파 보이지 않아 실망했나요?

ⓒ연합뉴스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방송인 정형돈

남자는 아팠다. 마음은 점점 각박해지고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게 하루아침에 티끌이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맡은 일은 날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데, 그 일을 잘해내는 건 어느 순간부터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에게 나는 약을 먹는다고도 고백해봤고,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고도 말해봤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기대치를 걸고 턱도 없이 부담스러운 별명을 붙여주며 너라면 잘해낼 거라는 말로 등을 밀었다. 어떤 날은 숨을 쉬기가 어려웠고, 어떤 날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을 찌를 것만 같다는 상상을 떨칠 수 없었다. 결국 무너져 내린 남자는 맡고 있던 중책들을 내려놓고 기약 없는 휴식기를 가졌다. 휴식은 단순히 일을 안 한다는 노동에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말도 안 되게 올라간 사람들의 기대치를 채워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오랜만에 쉬는 시간을 갖게 된 남자는 그간 바빠서 놀아주지 못했던 아이와도 놀아주고, 취미 삼아 쓰던 글도 쓰고, 여행도 떠났다. 마음을 보살필 탄탄한 토대를 쌓으려면 일상부터가 건강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더러 빨리 나으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프다더니 왜 아파 보이지 않느냐고.

세월호 유족에게도 그랬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이들 중 대부분은 ‘남자’의 자리에 누구의 이름이 들어갈 것인지 알고 있겠지만, 그 자리에 정형돈의 이름을 넣기 전에 우선 한번 ‘나’를 넣어보자. 그리고 다시 상상해보자. 그가 예능 프로그램 녹화에 처음 복귀했던 날, 취재를 허가하지 않은 제작진의 만류에도 밀물처럼 몰려 들어온 취재진을 본 심경은 어땠을까. 그간 부담을 느껴왔던 문화방송 <무한도전>으로의 복귀를 끝내 포기하고 대신 새로운 분야인 작가에 도전해보겠다고 했을 때, “<무한도전>은 아파서 못하는데 작가는 할 수 있는 거냐”며 대뜸 ‘꾀병’이네 ‘배신’이네 하는 말들을 입에 올리는 이들과 그런 말들을 ‘네티즌 여론’이라며 퍼 올려서는 고스란히 기사에 담아내는 언론을 보는 기분은 어땠을까. 언론은 “‘쉬긴 한 걸까’ 정형돈의 작정한 복귀”(<티브이데일리>)와 같은 헤드라인으로 복귀 전부터 “왜 안 아파 보이냐”며 정형돈에게 자신들이 생각한 환자의 이미지를 강요한 사람들의 편견에 편승해 기사를 홍보했고, “환영받지 못한 정형돈의 복귀… 문제는 타이밍”(<쿠키뉴스>) 같은 기사에선 웹드라마 작가와 ‘형돈이와 대준이’ 듀오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한 게 너무 빨랐다며 훈수를 두기도 했다. 결국 “활동하는 걸 보니 <무한도전>을 그만둬야 할 만큼 아파 보이진 않는데, 왜 그만두느냐”는 볼멘소리를 이래저래 돌려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모든 문제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꾸 타인의 고통을 셈할 때 자신이 상상했던 이미지가 아니면 의심을 하고 화를 낸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진실 규명 투쟁에 나선 유가족들을 보며 일부에서는 “진정한 유가족”과 “선동세력”을 구분해야 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마치 세상 어딘가에 “진정한 유가족”이라는 이데아가 있고 그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은 죄다 위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지난 25일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지 317일 만에 세상을 떠난 백남기씨를 추모하는 시민들 중 일부는, 그의 딸이 여전히 트위터상에서 활발하게 발언하는 것을 보며 어떻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딸이 태연하게 맨정신으로 트위터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사칭 계정이 아니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자신들이 생각한 유가족의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잃은 딸의 슬픔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는 말로 모욕당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선 이런 일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목격된다. 가족이 실종됐다며 찾는 걸 도와 달라고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인터넷에 공개한 한 여성은, 모르는 상대로부터 “진정으로 가족을 걱정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며 훈계를 당했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과 자기소개 문구가 평상시처럼 발랄한 상태라는 이유에서였다. 가족이 실종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사방에 도움을 요청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에게, 그 모든 노력 이전에 잠시 짬을 내어 ‘내 프로필 사진이랑 자기소개 문구가 뭐였더라’를 먼저 확인하고는 바꿨어야 한다고 훈계하는 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일까?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자신이 성폭행당한 경험을 증언하고 고발해온 여성은 “강간 피해 여성이 그 경험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다닐 리 없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라는 모멸적인 언사를 듣는다. 아픈 사람, 가족을 잃은 사람, 고통스러운 경험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해 보이는데, 거짓말하는 것 아니냐”며 진정성을 의심당한다. 이럴 거면 한국어 회화에서 “힘드시겠지만 평소처럼 굳건하게 버티셔야 한다”는 문장은 없애는 편이 낫지 않나. 굳건하게 버티면 거짓말쟁이라고 모욕당하는 세상인데.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나는 여기에서 타인의 고통조차 소비할 대상으로 삼는 소비주의와 세상에 대한 냉소를 본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멘탈리티 중 하나로 ‘냉소주의’를 지적하는 정치평론가 김민하의 말을 인용하자면, “현대의 인터넷-대중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속는 것’이다. (중략) 예를 들면 <먹거리 엑스 파일>은 어떤가? <먹거리 엑스 파일>의 세계관 속에서 (착한 식당을 제외한) 모든 식당은 ‘속인다’. 모든 식당이 속인다는 건 곧 모든 상품과 생산자가 소비자인 나를 속인다는 것과 같다. 구체적으로는 100원짜리를 1000원에 파는 거다. 속는 놈은 졸지에 100원짜리를 못 알아본 무능한 자가 된다. 서열 만들기와 타락한 능력주의(박권일)를 내면화한 이 세계에선 속는 건 무능한 거고 승부에서 지는 것이며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거다”(팀블로그 ‘파벨라’ 기고 글 “욱일기에 대한 생각”). 이 논리 구조를 정형돈의 사례에 대입해보자. 진정성을 가지고 대중을 대하는 몇몇을 제외한 연예인들은 죄다 대중을 기만한다. 정형돈은 ‘안 아프면서 아프다고’ 자신을 속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가 <무한도전>을 하차하는 걸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은 기만당하는 것이고 속는 것과 같다. 그러니 여기에 공감을 하는 것은 내 소중한 감정의 자원을 지출하는 꼴이 되고, 그것은 무능한 일이다.

슬픔의 기대치도 만족시켜야 하는가?

여기에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하나의 스펙터클로 소비하려는 심리가 결합한다. ‘나’는 상대의 거대한 슬픔에 압도되어 함께 울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함께 울고 공감하는 것으로 나의 선량함과 공감능력을 증거할 기대를 하고 있는데, 정작 고통의 당사자인 상대가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는다. 마치 엄청난 기대를 하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기대했던 것만큼 스펙터클한 액션 장면이 나오지 않아 실망한 여름 블록버스터 영화 관객처럼, 타인의 슬픔이 제 기대치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면 바로 실망하고는 앞서 인용한 것처럼 ‘속지 않기 위한’ 비난에 동참한다.

이 지경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의 삶을 저울질해 감정의 순도를 감별하는 판관이 아니다. 타인의 삶은 내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며 우리 또한 관객이 아니다. 심지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 중인 정형돈의 삶 또한 그렇다. 너무 많은 언론이 연예인의 사생활까지 제값 주고 구해온 상품인 것처럼 팔아 대는 통에 많이들 잊고 있는 것이지만, 그는 쇼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인 것이지 그의 삶 자체가 쇼인 것은 아니니 말이다. 정형돈의 원활한 회복과 활동을, 그리고 합당한 위로와 존중이 필요한 모든 이들의 마음의 평안을 기원한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연재 4년차인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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