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친구와 가까이 사는 1인 가구의 삶] 집은 따로 일상은 같이

"나올래?", "갈까?" 한마디면 언제고 만날 수 있었다. 어느 치과가 진료를 잘하는지, 어느 가게 채소와 생선이 신선한지 생생한 정보를 고스란히 전수받았다. 대충 저녁을 때우려던 날, "퇴근길에 들러 밥 먹고 갈래?"라는 친구 문자를 받고 그 집으로 조르르 퇴근하기도 했다. 가장 든든했던 건 한밤중 아팠을 때다. 갑자기 심장이 옥죄는 듯해 숨을 고르며 가만히 앉아 여차하면 친구에게 전화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지만 5분 안에 올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안심되었다. 적어도 '고독사'하지는 않겠다는 확신.

글 _ 사진 이여름

서른 넘은 비혼. 독립에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여 친구들과 함께 살던 나는 이제 나만의 공간을 꾸리며 자유롭게 지낸다. 산책할 곳이 있는 동네에서 마음 맞는 친구와 막차 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어울리는 일상. 혼자 살기에 가능한 것도 같다.

'호적 파서' 부모님 집에서 나오다

처음 집을 떠난 서른 초반까지 나는 외국에서 보낸 이태 남짓 말고는 부모님과 늘 함께 살았다. 학교와 회사는 집에서 다닐 만한 거리였고, 밥과 빨래가 해결되니 집에 머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좋지만도 않았다는 건 독립한 뒤에 오히려 귀가 시간이 앞당겨진 걸 보고 알았다. 내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던 게다. 부모님 눈치 보지 않고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드라마를 보고, 배가 안 고프면 저녁을 건너뛰며, 친구들과 집에서 시끄러이 떠들거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욕구도 잘 모를 만큼 나는 뭔가에 억눌려 있었다. '착한 딸 콤플렉스'였을까.

한국에서 여성이 독립하는 덴 장애물이 많다. 물론 가정마다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처음에 부모님은 내가 결혼하지 않고 따로 나가 사는 걸 남우세스러운 일로 여겼다. 주위에서 "같은 서울에서 왜?", "결혼은 안 한대요?"라는 말을 하곤 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나는 스스로 "자식은 부모를 실망시키는 존재"라고 되뇌었고, 부모님에게는 "잘 키우셨기에 독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먼저 독립한 친구들은 "이젠 '호적 파라'는 말을 들을 차례"라고 했다. 예언대로 그 말을 듣는 정점을 찍고서야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부모님과 나는 지금 더 잘 지낸다. 장을 보고 요리하고 치우고 음식물쓰레기를 따로 처리하고 먼지를 털어 내고 화장실을 닦고 하는 일들이 매일 벌어진다는 걸 알게 되니 부모님 집에 가서도 바지런해진다. 먹고 자고 하다못해 쓰레기를 버릴 때도 돈이 드는데 나는 그저 얹혀살았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로 나는 요리를 해서 부모님을 초대하기도 하고(어머니는 내가 차린 것보다 더 많은 음식을 해 가지고 오신다) 아버지는 고장 난 물건을 고쳐 주신다. 부모님은 우리 집에 오는 걸 즐긴다. 세상모르던 딸이 철드는 걸 대견히 여기는 것이겠지.

친구들과 야밤에 산행을 갔다. 같은 동네에 사니 늦은 시간 만나는 것도 걱정 없다. 더운 여름, 이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경치 없이 어찌 살았던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엄청 힘들었다.

한집 살이는 '케미'가 맞아야

막 독립해서는 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네 명이 각자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보증금을 내서 집을 구했다. 함께 밥 먹고 심심한 밤엔 같이 영화를 보거나 산책도 하며 지냈다. 단, 함께 살려면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일터가 멀어 불편한 것 등 각자 맞닥뜨리는 불편을 감수하겠다고 마음먹어야만 가능하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모여 살던 친구들과 다른 행보를 걷기로 결심하고 나는 새로이 집을 구했다. 어느 순간 함께 사는 즐거움보다 구속이 더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함께 살면 생활비를 아낄 수 있고, 서로가 긴장하게 돼 너무 '막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 내 관심사를 넘어 네 관심사로까지 나를 확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몰입하고 싶을 때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는 내 상태를 충분히 이야기해서 이해와 배려를 받아야 하는데, 그게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같이 사는 건 재미있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같이 잘 살아갈 친구를 만나는 건 부부가 가정을 이루는 것처럼 서로 '케미'가 맞아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가까이서 서로 폐를 끼치며

혼자서 어디에 살지 고민했다. 터를 정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일터 근처, 교통 혹은 학군 좋은 곳 등. 나에게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주변에 마음을 나눌 친구와 산책할 곳이 있을 것. 그게 갖춰지면 교통쯤은 아무래도 괜찮다. 기준이 명확하니 집을 구할 때 품이 많이 들지 않았다. 집세만 보고 이 동네 저 동네 왔다 갔다 하지도 않았다. 친구 집 주변에서 내 처지에 맞는 집을 구했다. 몇 번 이사하는 동안 그런 집은 정말 불현듯 나타났다. 계획과 달라도 때마다 이런저런 사정이 맞아 살게 되니 "집은 따로 인연이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렇게 터를 잡은 곳에서 친구와 나는 막차 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만났다. 이사한 첫날, 그 경험이 낯설고도 즐거워 우리는 새벽 밤거리에서 깔깔대고 웃었다. 누군가 우울해하면 밤늦게 불러내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거나 동네를 산책했다. 부모님이 보내 준 반찬이나 많은 양의 식자재, 인터넷에서 1+1로 산 물건도 나누었다. "나올래?", "갈까?" 한마디면 언제고 만날 수 있었다. 어느 치과가 진료를 잘하는지, 어느 가게 채소와 생선이 신선한지 생생한 정보를 고스란히 전수받았다. 대충 저녁을 때우려던 날, "퇴근길에 들러 밥 먹고 갈래?"라는 친구 문자를 받고 그 집으로 조르르 퇴근하기도 했다.

큰 힘 들이지 않아도 일상을 함께할 수 있으니 자주 보게 되고 서로 필요한 게 무언지 알게 된다. 운동화를 사야 한다고 노래 부르며 막상 무거운 등산화만 끌고 다니던 나를, 친구는 어디론가 데려갔다. 멈춘 곳은 동네 신발 가게 앞. "시간 못 내는 것 같아서 데려왔어. 얼른 골라서 산 다음에 밥 먹자"는 친구 덕에 운동화를 장만했다. 밤에 일하는 프리랜서와 낮에 일하는 직장인으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던 우리가 함께 노느라 피곤했던 게 꼽자면 단점. 야식을 먹으며 살이 찐 건 '지못미'. 가장 든든했던 건 한밤중 아팠을 때다. 갑자기 심장이 옥죄는 듯해 숨을 고르며 가만히 앉아 여차하면 친구에게 전화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지만 5분 안에 올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안심되었다. 적어도 '고독사'하지는 않겠다는 확신.

전세를 살았는데 집주인이 월세로 바꾸자고 해 최근 또 새집을 구했다. 이제 고작 정착한 지 몇 주째인 새 동네에도 역시 친구들이 있다. 친구 집에 놀러 왔다가 동네가 마음에 들었고 내 형편에도 적합했다. 친구들이 먼저 살고 있어서 고마웠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이 돈에 이만큼 맘에 드는 집을 어떻게 구했을지 막막하다. 우리 집에 페인트칠을 해주겠노라는 호언장담이 진심인지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한날 이사 나가고 들어오느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 와서 첫 아침을 맞으며 생각했다. '폐를 끼치며 그렇게 살아가자'고. "그래서 말인데, 동네 둘레길로 나를 데리고 다니며 하드 트레이닝 시키는 친구들아, 그때 내가 맡긴 스피커는 왜 소리가 안 나는지 좀 살펴봤어? 그리고 숫돌 빌리러 한번 갈게."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는 친구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아직 같이 탄 적은 없다.

이여름 님은 잡지사에서 사람들을 만나 글 쓰는 일을 하다가 지금은 쉬멍 놀멍 다음 행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상에 여유를 다시 갖게 되어 '천의 표정'을 회복해 가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살림이야기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성 #1인가구 #사회 #이여름 #살림이야기 #라이프스타일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