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스물넷, 벽장에서 나오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고 고마웠던 점이 바로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보여준 친구들의 반응이다. "난 또 불치병에 걸려서 시한부라고 고백하는 줄 알았다."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말해줘서 고마워." 가슴이 따뜻해지는 대답이 많았다. 백미는 바로 "이제 드디어 커밍아웃하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는데?" 등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내가 게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내가 게이냐 아니냐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지만, 내가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들이 캐묻지 않는 것이 친구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 김승환
  • 입력 2016.09.30 07:24
  • 수정 2017.10.01 14:12

'친구사이' 활동과 광수 형과의 연애에 푹 빠져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 이성애자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예전에 굉장히 친했고 지금도 꽤나 친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연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거짓말로 둘러대고 있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 불편하다 보니 이성애자 친구들과 만나는 횟수를 줄이게 되었다. 그 친구들도 점차 나에게서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 보면 결국 이성애자 친구들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서로 연락이 안하는 사이가 될 것이고, 나의 인간관계는 주로 게이들 위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앞서 이런 고민을 했을 만한 선배 게이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형들은 나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성애자 친구는 서른 살이 넘으면 친구로 잘 남는 경우가 없으니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차라리 이 기회에 친구 관계를 한번 정리해보라고 조언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로 중학교, 고등학교, 재수학원, 대학교 순으로 삶의 큰 단계별로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 친구가 두세 명씩 있었다. 이 친구들만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교류한다면 친구 관계에서는 만족감을 충분히 느끼리라고 판단했다.

누구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할까 생각해보니 남자보다는 여자가 나을 것 같았다. 그때 상황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스트레스가 적은 친구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리할 것 같았다. 결국 중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로 지낸 '민주'를 첫 번째 커밍아웃할 사람으로 결정했다. 그녀에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밥을 먹자고 불러냈다. 전화와 문자로 약속 장소에 나온다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확인했다. 만나서도 다른 이야기를 빙빙 둘러서 계속하다가 결국 몇 시간의 망설임 끝에 커밍아웃을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고는 편견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렇게 친구에게 첫 커밍아웃을 성공적으로 하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이후 다른 친구들에게도 커밍아웃을 했다. 역시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쉬웠다. 그리고 내가 게이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친구들이 늘어날수록 자신감도 붙고 그 친구와의 관계도 더욱 깊어졌다. 내가 진실해지니 상대방도 진실해졌다. 친구들 역시 그동안 자신들이 누군가에게 말하기 힘들었던 고민이나 문제 또는 가정환경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고 고마웠던 점이 바로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보여준 친구들의 반응이다. "난 또 불치병에 걸려서 시한부라고 고백하는 줄 알았다." "사고 쳐서 아기 생겼냐?" "누가 뭐래도 우린 친구이기 때문에 네 성 정체성은 우리 관계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말해줘서 고마워." 가슴이 따뜻해지는 대답이 많았다. 백미는 바로 "이제 드디어 커밍아웃하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는데?" 등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내가 게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내가 게이냐 아니냐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지만, 내가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들이 캐묻지 않는 것이 친구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이렇게 스물네 살을 기점으로 가까운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했다. 우리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하기 힘든 이야기도 서로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사이로 성숙하게 발전했다. 이때 내가 커밍아웃한 친구들은 모두 내 결혼식 때 공개적으로 참석해 축하해주는 나의 든든한 우군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성소수자라서 외롭기만 할 것 같다고 잘못 생각한다. 난 성소수자라도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또한 주변과 얼마나 진실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 누구보다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을 주저하는 많은 성소수자들이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서 커밍아웃하기를 바란다. 그동안 잊었거나 또는 잃은 관계를 회복하기 바란다.

* 이 글은 <광수와 화니 이야기>(김조광수, 김승환 저, 시대의창)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김조광수 #책 #문화 #광수와 화니 이야기 #김승환 #동성결혼 #동성애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