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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갈등, 세대차이

'동료 며느리'들과 나눈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처음 남자친구 집에 인사드리러 간 날 '설거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스스로를 보며 '결혼을 꼭 해야할까' 생각했다는 것, 아침은 먹고 출근하느냐는 질문에서 남편 밥 잘 차려주라는 질책이 느껴진다는 것, 벨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로 들어오시는 게 침입처럼 느껴진다는 것, '남편이 바쁘면 너라도 시댁에 오너라'라는 말이 느닷없는 사장님 호출만큼이나 어리둥절하다는 것, 예비 시어머니가 '네가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는데 결혼하면 내 아들 밥은 차려 주겠냐?'고 말해서 애인과 헤어진 친구도 있다는 것. 요즘 세대 여성들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을 어머니 세대들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 장수연
  • 입력 2016.09.29 11:54
  • 수정 2017.09.30 14:12
ⓒGettyimage/이매진스

나에겐 3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학창시절 내가 밋밋한 모범생이었던 데 반해, 동생은 친구도 많고 좋아하는 가수 팬클럽에도 가입해 재미나게 지내는, 나보다 훨씬 매력적인 여고생이었다. 사복을 입어야 하는 소풍날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동생은 용돈을 모아 두세 벌의 옷을 미리 사두고 이리저리 코디해 보며 '결전의 날'을 기다리는 타입이었다. 학교에서는 그녀가, 집에서는 내가 더 인기가 좋았다. 부모님은 '언니처럼 조신하지 못하다'며 동생을 나무라셨으니까. 정작 술담배에 쩔어 사는 게 나일줄은 모르시고.

어느 해인가, 소풍을 앞두고 동생이 당시 유행하던 통넓은 바지를 사서 옷장에 걸어놓은 적이 있었다. 검은색, 얇은 멜빵이 달린, 한쪽 통에 다리 두 개는 족히 들어갈, 농구선수 야오밍이 입고도 남을 길이의, 그땐 정말 세련돼 보였던 바지. 그런데 동생이 야심차게 산 그 바지를, 엄마가 싹둑, 잘라서 단정하게 꿰매 버리고 말았다. 야오밍 반바지쯤 되는 길이로. 동생은 바지를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고, 아빠와 엄마는 "그런 옷 사지 말라고 엄마가 진작에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말투에서 '본때를 보여줬다'고 생각하시는 속내가 읽혔다.

이 슬픈 에피소드가 불현듯 떠오른 건 얼마 전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였다. 소설 속에서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주인공 영혜에게 아버지는 억지로 입을 벌려 고기를 쑤셔넣는다. 영혜는 극렬하게 저항하다 과도로 손목을 긋고 병원에 입원하는데, 여기서 히트는 엄마가 입원한 영혜를 속이고 흑염소 즙을 먹이려 한다는 것이다. 다 큰 딸의 입에 완력으로 음식물을 넣는 아버지도, 고기 먹지 않겠다고 손목까지 그은 사람에게 흑염소 즙을 먹이려는 어머니도, 모성애나 부성애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다.

<채식주의자>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폭력성'이라고들 하고, 특히나 어떤 평론가는 소설 속 아버지의 행동을 '남성적 폭력'이라고 썼던데, 나는 이들의 모습이 '한국적 폭력', 혹은 '한국 부모의 폭력'이라고 읽혔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식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계속 입을 때 그 옷을 가위로 잘라버리는 폭력이다. '저대로 두면 몸 상할 텐데' 하면서 입에 억지로 고기를 쑤셔 넣는 모습의 연장선에, '저러다 겉멋 들어 공부 안 하는 것 아닐까' 걱정하며 바지를 잘라버리는 내 엄마가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 자식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다는 태도, 아니 개입해야 한다는 믿음, 그것도 아주 깊숙이-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달려들어 자식의 잘못된 면모를 바로잡아 주려는 공격적인 모성 혹은 부성.

남녀가 화성과 금성만큼 멀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사이는 태양계를 관통하는 거리쯤 되는 것 같다.

문제는 이게 폭력이라는 생각을 한국의 어떤 부모도 하지 않으리라는 데 있다. 소설 속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나온다. 나는 이 소설이 3일만에 25만권이 팔릴 만큼 열풍이라는 기사를 보고, 이 책을 읽은 사람 중에 영혜의 아버지 세대에 속하는 사람도 있을까, 혹시 월남전에 참전했던 분도 계실까, 그들은 소설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척 궁금해졌다. 그래서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엄마, 어떤 여자가 채식을 해서 몸이 좀 말랐는데, 그 여자네 아빠가 억지로 입을 벌려서 고기를 막 쑤셔넣었대. 그 아빠 좀 이상하지 않아?" 그랬더니 엄마 왈. "둘 다 이상하네. 아니, 채식을 왜 해, 채식을? 고기를 어느 정도는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지! 너도 이제 회사 다니려면 잘 챙겨 먹어야 해. 곰탕 좀 끓여줄 테니까 냉동실에 얼려 놓고 한 팩씩...$%^&#!&*%......."

엄마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폭력성에 앞서 사고의 차이를 느끼곤 한다. 예를 들어 아직 결혼 생각이 없는 내 동생에게 엄마가 퍼붓는 잔소리는 매우 폭력적인데, '엄마가 내 삶에 어떤 강요를 한다'는 사실에 답답해지기도 전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불행하다, 늦게 결혼하면 아이 낳기 힘들다'는 그녀의 전근대적인 생각에 먼저 질식해 버리는 것이다. 남녀가 화성과 금성만큼 멀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사이는 태양계를 관통하는 거리쯤 되는 것 같다.

얼마 전 시어머니 때문에 크게 당황한 사건이 있었다. 내게 말도 없이 우리 집에 친구분을 데려오신 것이다. 그날은 내가 저녁 스케줄이 있어서 시어머님이 아이들을 봐주시기로 한 날이었다. 일이 끝나고 밤 10시쯤 집에 들어왔는데, 난생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혼자 식탁 의자에 앉아계시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 얼굴이 굳어졌고, 아주머니는 "어머님은 방에서 하율이 재우고 있어요"하시며 웃으셨다. 그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내 순발력이 나는 지금도 기특하다.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고 '현모양처 며느리 모드'로 전환하여 어머님과 친구분을 배웅했다.

내가 없는 내 집에 친구와 함께 오시는 어머님도, 밤 10시까지 계셨던 그 친구분도, 나는 참 불편하고 이해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우리 시어머님의 생각은 아주 단순하셨을 것이다. 며느리가 아기를 봐 달라고 하고 본인은 친구를 만나고 싶으니까, 친구와 같이 아들 집에 가서 아기를 보면 될 거라는 생각. 어쩌면 두 분은 매우 만족스러워 하셨을지도 모른다. 너희 며느리는 이렇게 늦게까지 편하게 일 보러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복 받은 거냐고. 그런 분들에게 내가 "어머님, 친구분 모시고 올 땐 미리 연락 주세요. 가능하면 밖에서 만나시면 더 좋구요"라고 말씀드리면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까.

예비 시어머니가 '네가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는데 결혼하면 내 아들 밥은 차려 주겠냐?'고 말해서 애인과 헤어진 친구도 있다

몇몇 지인들과 이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레 '시어머니 성토장'이 되고 말았는데, 개중에는 인권침해 수준으로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도 있었고, 비교적 양호하지만 나는 겪고 싶지 않은 정도의 시어머니도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두 명의 시어머니가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는데, 어떻게 이렇게 모든 며느리들이 시어머니 때문에 힘들 수 있을까?

고부간의 문제를 개인 차원이 아니라 세대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았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어머님들의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당신이 꽤 괜찮은 시어머니라고 생각하신다는 것. 그녀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구박을 하니 뭘 하니, 나 정도면 좋은 시어머니지'라는 생각. 아마 자신들이 시어머니에게 당했던 것과 비교하며 '이 정도면 잘 해주는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세대 차이 아닌가.

'동료 며느리'들과 나눈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처음 남자친구 집에 인사드리러 간 날 '설거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스스로를 보며 '결혼을 꼭 해야할까' 생각했다는 것, '아침은 먹고 출근하느냐'는 질문에서 남편 밥 잘 차려주라는 질책이 느껴진다는 것, 벨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로 들어오시는 게 침입처럼 느껴진다는 것, '남편이 바쁘면 너라도 시댁에 오너라'라는 말이 느닷없는 사장님 호출만큼이나 어리둥절하다는 것, 예비 시어머니가 '네가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는데 결혼하면 내 아들 밥은 차려 주겠냐?'고 말해서 애인과 헤어진 친구도 있다는 것. 요즘 세대 여성들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을 어머니 세대들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본인들이 경험한 고부관계와 비교해 지금은 훨씬 낫지 않으냐는 시어머니들과, 나와 남편이 대등하지 않은 부분에 불쾌함을 느끼는 며느리들이, 도대체 어떻게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시어머님과 친구분이 다녀가신 날 저녁, 조심스레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밤 10시에 집에 들어왔는데, 모르는 아주머님이 계셔서 너무 당황했어..." 남편 역시 조심스럽게 대꾸하더라. ".....음.... 어머님이랑 같이 나가려고 기다리고 계셨나보지..." 비슷한 문제로 여러 번 싸웠던 부부의 노련한 우회 화법이었다.

나와 시어머님의 차이가 세대간의 사고 차이라고 결론지으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남편에게 쏟아내던 분노가 조금은 조절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남편들은 자연스럽게 본인의 엄마를 변호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럴 거라고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혹스럽긴 하다. 시어머님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결혼했던 그 남자는 없다. 거의 <페이스 오프> 수준이다. 여긴 어디? 이 효자는 누구? 내 친구 중 한 명은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단다. "아니, 우리 엄마가 뭘 어쨌다고 그렇게 불편해 하니?" 이 사람아, 시어머님과 며느리 사이라는 건, 며느리가 설거지를 해도 불편하고, 시어머님이 설거지를 하고 며느리가 쉬어도 불편한 그런 관계라네. 장모님이 설거지를 하면 당연하고 사위가 설거지를 하면 기특한, 우리 엄마와 당신의 관계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고.

어머님과 관련된 문제에서 남편은 답이 아니다. ('내 남편은 답이 아니다'라고 해야 할까.) 시어머님에 관한 문제를 싸움 없이 해소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시도는 늘 처참히 상처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저런 훈수들을 읽고 들었지만 실효성이 있다고 느껴진 적은 없다. (혹시 있다면 알려주시라. 진정 알고 싶다.) 그래도 어떤 문제들은 그 성격을 규명해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적인 흥분이 가라앉는 법. 나는 나와 시어머님의 차이가 세대간의 사고 차이라고 결론지으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남편에게 쏟아내던 분노가 조금은 조절되기 시작했다.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님이 <다시,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신 시어머니 십계명'이라는 걸 쓰셨다. 며느리가 직접 자기 시어머니에게 알려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 글이 널리널리 퍼져서 내 시어머니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문을 게재해 본다. (중년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강렬한 '카톡 전파력'을 응원해 보기는 또 처음이다.)

1. 나는 시어머니 이전에 나다.

2.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다.

3. 며느리는 딸이 아니다.

4. 며느리도 나와 같은 여성이다.

5. 아들네 집은 내 집이 아니다.

6. 며느리에게 가르치려 들지 마라.

7. 좋은 며느리란 따로 없다.

8. 아들도 며느리도 손님이다.

9. 칭찬하고 또 칭찬해라.

10. 생긴대로 보여줘라.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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