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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잊음이 내게 준 큰 변화

얼마 전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내 물건인데 내 물건 같지 않은 낯선 기억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했다. 대학 시절 발품 팔아가며 소중하게 한땀 한땀 점역해 두었던 전공서적들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눌려지고 닳아져서 내용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게 변해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 놓은 옷들 중에는 언제 어디서 입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진 것들도 많았다. 그때는 너무도 소중했을 종이편지들과 작은 물건들은 조금씩 구석으로 구석으로 옮겨지면서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때의 기억들도 그때의 인연들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해져 있었다.

  • 안승준
  • 입력 2016.09.28 12:10
  • 수정 2017.09.29 14:12
ⓒGettyimage/이매진스

나름 건강체질이라고 자부하고 살던 나인데 재작년 여름부터인가 몸 여기저기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는 걸 느꼈다.

체력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언젠가부터인가는 조금만 오래 서 있어도 어지러워서 견딜 수 없이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병원에서는 기립성 저혈압인데 물을 많이 먹고 쉬는 것 말고는 특별한 치료법은 없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도 개선될 것 같지 않던 증상은 약간의 이명을 동반하더니 어마어마한 양의 눈곱을 동반하고 급기야는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의 통증까지 가져왔다.

선배들은 30대가 넘어가면서 한 번씩 늙는 것을 느끼는 자연스런 과정이라고도 했고 친구들은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중독 후유증이라고 당장 운동부터 그만두라고도 했다.

웬만한 아픔은 티조차 내지 않는 내게도 쉽게 지나쳐버릴 상황이 아니라고 느낄 만큼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시경 검사도 해 보고 각종 영양제도 하나씩 먹어보았지만 원인도 개선점도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슬쩍 보험도 하나 들고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단 아픈 눈부터 어떻게 해결해 보려는 요량으로 안과를 방문했다.

이리저리 살피시던 의사선생님께서는 렌즈는 언제부터 끼고 다녔냐는 물음을 던지셨다.

보이지도 않는 눈에 무슨 렌즈인가 하던 내 머릿속에 번쩍 하고 무언가 떠올리던 순간 의사선생님도 챠트에서 무언가 발견해 내신듯 깜짝 놀라셨다.

2년 전 눈을 살짝 찔려서 각막보호용으로 착용했던 치료용 렌즈가 아직 내 눈에 남아있던 것이었다.

의사선생님도 나도 까맣게 잊고 있던 작은 조각 하나가 내 몸 속에 2년이나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하셔서 의사선생님의 걱정도 나의 놀라움도 그냥 해프닝으로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이상스럽게 몸이 가뿐해지기 시작했다.

눈곱은 당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지러움의 느낌도 확연히 줄어드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냥 기분 탓이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은 하나둘씩 급격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렌즈 하나 제거했을 뿐인데 무슨 큰 관련이 있겠냐고 다들 이야기했지만 내 몸의 변화는 그게 아니었다.

의사선생님마저도 큰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고 하셨지만 어쨌든 내 몸은 거의 예전의 상태로 돌아왔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작은 것들은 물론이고 때로는 엄청나게 큰 것들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까마득히 잊은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고는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잊음과는 관계없이 그것들은 나의 많은 것들에 그 때의 렌즈처럼 남아서 이런저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자세의 변화 혹은 식생활의 변화가 시간의 무게 속에서 내 몸에 큰 변화를 주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내 물건인데 내 물건 같지 않은 낯선 기억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했다.

대학 시절 발품 팔아가며 소중하게 한땀 한땀 점역해 두었던 전공서적들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눌려지고 닳아져서 내용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게 변해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 놓은 옷들 중에는 언제 어디서 입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진 것들도 많았다.

그때는 너무도 소중했을 종이편지들과 작은 물건들은 조금씩 구석으로 구석으로 옮겨지면서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때의 기억들도 그때의 인연들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해져 있었다.

분명히 한 순간 한 시절 내겐 너무도 의미 있고 소중한 기억이고 물건들이었을 텐데 오랜 시간 속에서 너무도 많이 잊혀버린 것 같았다.

어떤 것은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긍정적인 사라짐이었겠지만 분명 어떤 것들은 나의 렌즈처럼 꼭 기억했어야만 했던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작은 렌즈의 망각은 내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만 되새김 된 새로운 기억은 내게 다시 큰 건강을 선물해주었다.

우리가 잊고 있는 많은 기억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작용하고 있을지 모른다.

작은 잊음들에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는 오늘이다.

아직 남아있는 많은 이삿짐 더미 속에서 잊어지지 말았어야 했을 것들을 조금 더 찬찬히 살펴보아야겠다.

너무도 감쪽같이 잊혔던 기억들 속에서 무언가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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