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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성은 진화의 역사에서 지워졌을까?

  • 박세회
  • 입력 2016.09.28 10:47
  • 수정 2017.02.20 13:14

인류의 '여성'은 과학에서 어떤 존재로 다뤄져 왔고, 앞으로 어떻게 다뤄져야 할까? 라이프 매거진 '행복이 가득한 집'에 고인류학자 이상희가 기고한 글에서 이 진지한 논의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이 교수는 '여성은 과학의 미래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냥꾼 가설'을 예로 들어 진화 연구가 남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어떻게 여성이 소외됐는지를 논했다.

프랑스 인류 박물관에 전시된 2만 2천 년 전 여성의 해골.

이 교수에 따르면 '사냥꾼 이론'은 침팬지, 오랑우탄과 크게 다를 게 없던 인류가 사냥을 통해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통해 지능적인 일을 하면서 지적 존재로 진화했다는 가설로 사냥을 남자들의 전유물로 해석해 진화의 주역을 남자로 여기고 여자를 진화의 역사에서 지우는 역할을 은연중에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 '사냥꾼 이론'의 환상이 크게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그동안 "사냥은 주로 남자의 역할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아빠가 부양한다” “남자의 부양을 받기 위해 여자는 항상 성관계할 수 있도록 대기 상태다” 등 이 이론에서 중요한 전제로 여겨졌던 사실이 여성 고인류학자들에 의해 반박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인류학자) 크리스틴 호크스는 ‘할머니 가설’을 통해 할머니가 활발한 경제활동 혹은 아이 돌보기를 통해 육아 과정에서 아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자료를 통해 사냥은 남자들만의 행위가 아니라 나이 든 여자들도 적극 참여했으며, 도구를 만들고 쓰는 일과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다음 세대로 전수하는 일을 여성이 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구는 짐승을 잡는 데만 쓰는 것이 아니라 뿌리 식물을 캐고 열매를 따 먹는 등 식물성 먹거리를 구하는 행위에 썼다는 점도 밝혀졌다. 사냥꾼 남자 가설이 무너지면서 다양한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여자들이 있었다. -이상희/행복이가득한집 9월호

고인류학에선 하나의 사실을 두고 진화의 이유를 규명하는 다양한 이론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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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인간 여성은 배란기를 알 수 없는 거의 유일한 동물로, 이는 인간의 번식 행위 중 가장 특이한 점이다. 대부분의 유인원(고릴라, 침팬지 등)은 물론 원숭이들도 배란기가 되면 성기가 분홍색을 띠며 성적 수용상태가 되었음을 자각하고, 수컷에게 성기를 들이미는 등의 적극적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반면 인간 여성의 배란기는 자각이 거의 불가능하고 진단도 정확하지 않았으며 1930년이 지나서야 생리 주기를 바탕으로 배란일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과학자들은 '은밀한 배란의 역설'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를 두고 '남성들의 협동심을 고양하려고', '남녀의 결속을 강화해 가정을 굳건히 하려고', '유아살해(남성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린애를 곧잘 죽였다)를 방지하려고' 등등 다양한 의견이 등장했다.

그러나 여성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내놨다. 생물학자 사라 블래퍼 흘디(소수 이론)는 자신의 저서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에서 재밌는 이론을 내놓은 바 있다.

흘디는 인간 여성의 진화가 누가 아비인지 모르도록 배란을 숨겨 남성을 조종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많은 남성과 몰래 섹스를 한 여성은 그녀의 아이를 두고 여러 남성이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그만큼 많은 남성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흘디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교미만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바로 '은밀한 섹스 역설'이다. 일부일처의 집단생활을 하는 모든 동물은 다른 개체의 앞에서 교미를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난혼을 하는 침팬지는 다른 침팬지가 보는 앞에서 다섯 마리의 수컷과 차례로 교미하기도 한다. 흘디의 이 이론은 이 은밀한 섹스의 역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두고 여러 남성이 자신의 아이로 착각하도록 은밀하게 섹스한다'.

'은밀한 배란'의 역설을 두고 '제3의 침팬지'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6개의 학설을 정리한 바 있다. 하나의 현상을 두고 진화 생물학은 이렇게나 많은 해석을 내놓는다. 그리고 명확한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다수 학설'이 정설로 여겨지고 가장 많이 인용된다. 세상에서 가장 객관적인 학문으로 여겨지는 과학도 가끔은 다수결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 교수가 고인류학, 더 넓게는 과학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더 커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더욱 명확해진다.

아직도 우리는 은연중에 인류의 진화를 남자의 진화로 간주한다. 수많은 인류 진화의 도식을 보면 남자들의 행진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작은 몸집으로 눈을 내리깔고 네발로 걷다가 점점 당당한 체격과 보행 자세를 갖추면서 흰 피부의 남자로 변한다. 그리고 이 도식은 입체 모형으로 만들어져서 수많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그렇게 진열된 모형을 보면서 아이들은 남자를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남성 중심적 현재 사회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중략) 고인류학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더 커져야 한다. 다른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상희/행복이가득한집 9월호

행복이 가득한 집 9월호는 고등과학원 연구교수 고계원, 동물 질병 진단 키트 벤처기업 베트올 대표 김정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장내과 교수 안규리,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 연구원 전미사,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차기 회장 김명자 5인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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