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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다물고 생각을 하라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들이 나서서 연일 북한에 대해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도 대책이 없다'는 무력감과 좌절감의 표현일지 모른다. 그래도 위정자는 책임 있는 말을 해야 한다. 상대방을 광인으로 몰아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미친X'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니 무조건 때려잡겠다는 소린가. 북한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걸 만인 앞에서 자인한 꼴 아닌가.

  • 배명복
  • 입력 2016.09.28 07:03
  • 수정 2017.09.29 14:12
ⓒ연합뉴스

쏜 화살과 흘러간 시간, 그리고 입 밖에 낸 말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기분이 나쁘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화가 난다고 함부로 말을 뱉었다가 후회한 게 한두 번이었던가. 왜 나는 좀 더 말조심을 하지 못했던 것인가. 나이가 들수록 후회와 자책이 커진다. 신언(愼言)의 중요성을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나의 인간관계나 사는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러시아 작가 레오 톨스토이가 말년에 남긴 명상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를 읽다가 "혀끝까지 나온 나쁜 말을 내뱉지 않고 삼켜버리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료다"라는 글귀를 발견했다. 정곡을 찌른 말에 격한 공감을 느꼈다. '입을 다물고 생각하라'는 소제목이 붙은 명상집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장전된 총을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주 잊어버린다.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행동보다 말이 앞설까 봐 경계하고 말하기 전에 오래도록 침묵한다. 말하고 싶을 때마다 입을 다물고 생각을 하라. 그 말이 정녕 말할 가치가 있는 말인가."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에 대해 한국 위정자들이 연일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 북한의 5차 핵실험 탓에 해외 순방 일정을 단축하고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제사회와 주변국의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정신상태는 통제불능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김정은이 '미친 사람', 즉 '광인(狂人)'이란 얘기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지난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한을 '상습적 범법자'로 규정하고 북한의 유엔 회원국 자격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주민의 민생과 인권은 내팽개치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북한 지도자의 행태는 누가 봐도 잘못이고 비정상이다.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기는 쉽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위정자의 역할은 달라야 한다. 북한 지도자를 향해 말폭탄을 쏘는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기고 위정자는 조용히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들이 나서서 연일 북한에 대해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도 대책이 없다'는 무력감과 좌절감의 표현일지 모른다. 그래도 위정자는 책임 있는 말을 해야 한다. 상대방을 광인으로 몰아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미친X'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니 무조건 때려잡겠다는 소린가. 북한의 유엔 회원국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을 도외시한 채 일국의 외교장관이 국제무대에서 아무 말이나 펑펑 질러대는 것은 외교관의 기본 자격을 의심케 하는 비외교적 난센스다. 북한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걸 만인 앞에서 자인한 꼴 아닌가.

진짜로 무서운 사람은 상대가 도발을 해도 바로 반응하지 않는다. 조용히 지켜보다 빈틈을 노려 불시에 일격을 가한다. 무서운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대응한다. 말로만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지금은 한국의 위정자들이 공허한 말폭탄이나 날릴 때가 아니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한 방을 준비할 때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여섯 번의 핵실험 끝에 '핵클럽' 멤버가 됐다. 북한은 지금까지 다섯 번을 했다. 당장 내일 북한이 여섯 번째 핵실험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북한은 미국 본토를 겨냥한 장거리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엔 3만6000㎞ 지구정지궤도에 위성을 올려놓을 수 있는 강력한 로켓 엔진 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을 겨냥한 북한의 ICBM이 실전 배치되는 '악몽'이 점점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게임체인저' 앞에서 미국이 대북 군사조치를 심각하게 검토하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전쟁을 각오하고 미국의 군사조치를 지지해야 하나, 아니면 말려야 하나.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어느 쪽으로 가든 미국과 긴밀히 협력해 대책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북핵 문제의 포괄적 해법을 만들어 미국과 중국에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대국에 의해 끌려가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먼저 칼을 잡지 못하면 남이 잡은 칼에 손을 베일 수 있다. 지금은 말폭탄이나 쏘아댈 때가 아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해 미국과 중국에 내놓을 치밀하고 합리적인 큰그림을 그릴 때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톨스토이는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최선의 대답은 침묵이다"고. "나쁜 말이나 비판은 불길 속에 던져넣는 장작일 뿐이다"고. 어리석은 사람은 물론 김정은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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