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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회의원은 '입법 세일즈'를 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정책에 관한 댓글들은 매우 부정적이거나 폭력적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정해진 바에 대해서는 반발하기 마련이죠. 우리는 시민들에게 (통보하는 대신) 의견을 물음으로써 이 구조를 뒤집습니다. 논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열린 감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 와글(WAGL)
  • 입력 2016.09.28 10:39
  • 수정 2017.09.29 14:12

'의회와 시민' 공동 창립자 시릴 라져 / 시릴 라져의 페이스북

공익 추구는 더 이상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혁신과 창의성은 이제 시스템 밖, 시민 사회 그 자체에서 떠오를 것입니다.

- 시릴 라져(Cyril Lage)

살면서 한 번쯤은 (사실은 꽤 자주) "이건 나 혼자서는 해결이 안 되겠다"는 말이 나오는 문제를 마주하기 마련입니다. 법과 제도를 바꾸거나 공공기관의 지원이 필요한 일들이 그렇습니다. 문제는 돈도 빽도 없는 평범한 개인이 '감히' 법과 제도를 논하기는 무척 어렵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의 집단지성 입법 플랫폼 '의회와 시민'은 그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국회의원과 연락하고 그들과 토론해서 법안을 만들어 보라고 말입니다.

'의회와 시민(Parlement & Citoyens)'을 만든 프랑스의 공공 정책 및 전략 컨설턴트인 시릴 라져(Cyril Lage)는 개발 배경을 묻는 인터뷰에서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심각한 프랑스 사회에서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를 늘 고민해 왔다고 말합니다.

시릴은 2009년부터 국회 보좌관으로 일했습니다. 시릴은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세간의 시선과는 다르게 '어떤 국회의원'들은 입법과정에서 시민과 투명하게 소통하려는 니즈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법안에 대한 시민의 지지와 토론이 활발할수록, 질적으로 우수한 법안을 만들 수 있음은 물론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도 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릴은 시민과 국회의원의 '만남의 장소'가 필요할 뿐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픈소스 개발자, 디자이너와 함께 '열린 민주주의(Démocratie Ouverte)'를 만들어 활동하며 구상을 다듬어 왔죠. 마침내 2013년 2월,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에서 사회 민주주의 정당 PS까지 6개 정당 6명의 국회의원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시민 집단지성 입법 플랫폼 '의회와 시민(Parlement & Citoyens)' 서비스를 정식 론칭합니다.

국민전선의 마리옹 마레샬 르펜(Marion Maréchal-Le Pen, 위)과 PS의 도미닉 람부르그(Dominique Raimbourg, 아래)이 의제를 제안하고 시민들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 '의회와 시민' 웹사이트

무엇이 특별한가?

'의회와 시민'은 국회의원이 온라인에서 의제를 제안하면 시민들과 함께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고 이를 법안으로 추진하는 플랫폼입니다. 전문가나 관료 등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시민들의 집단 지성에 기반한 입법 과정인 것이죠. 이 활동은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모두에게 그 과정이 공개됩니다.

'의회와 시민' 입법 프로세스

1. 시작 : 국회의원이 호스트가 되어 안건을 발표하고 시민들은 토론 참여를 신청한다.

2. 토론 : 국회의원과 시민이 안건에 대한 '문제 정의', '원인 분석', '해결책 제시'

- 각각의 의견에 대해 토론할 수 있고 찬반을 표시할 수 있다.

- 해결책은 의원과 시민 모두 제시할 수 있고 모든 제안은 토론에 부쳐진다.

3. 종합 보고서 : 약 한 달간 이뤄진 토론을 바탕으로 '열린 민주주의'팀에서 보고서를 발표한다. 문제의 정의, 원인, 해결책이 주 내용이다.

4. 공개 토론 : 안건을 제시한 의원과 시민 8명이 화상 토론을 진행하고, 온라인 생중계한다.

(선출된 시민 8명 가운데 3명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의견 제출자, 3명은 희망자 중에서 무작위 추첨, 2명은 '열린 민주주의' 추천)

5. 법안 공개 : 위의 과정을 토대로 만든 법안을 공개한다.

6. 실행 : 의원이 이를 발의한다.

국회의원 클로디 르브레통(Claudy Lebreton)이 시민들과 공개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 '의회와 시민' 페이스북

'의회와 시민' 플랫폼에서 국회의원은 호스트(host)가 되어 이슈를 던지고, 이 논의에 참여할 시민을 모집합니다. 이어 한 달 동안 호스트 의원과 시민들은 온라인에서 문제 정의 및 원인 분석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토론을 진행합니다. 모든 의견에 찬반 투표가 가능하고 이 결과가 파이 차트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이슈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지, 어떤 아이디어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는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토론이 끝나면 관리자는 토론의 내용을 취합하여 종합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보고서에는 문제의 정의와 원인 세 가지, 해결책 세 가지에 대한 각각의 찬반 의견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의원과 시민 모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으며 모든 제안은 토론에 부쳐진다 / '의회와 시민' 웹사이트

국회와 정부를 움직이다

2016년 8월 현재 시민 약 7천여 명이 토론에 참여해, 지금까지 진행된 토론 아홉 건 중 두 건이 국회에서 발의를 거쳐 실제 법안으로 통과되었습니다. '재범 방지 및 형량의 개별화에 대한 법안(2014)'과 '살충제 사용 규제법(2014)'이 그것입니다.

특히 살충제 법안을 통과시킨 유럽 생태 녹색당(EELV) 소속 상원 의원 조엘 라비(Joël Labbé)는 2015년에 또 한 번 '생물 다양성 및 기후변화에 대한 법'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 법안은 무려 투표 5만 건, 참여 시민 9천 명으로 플랫폼 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죠. 환경부 장관이 이 법안을 지지하면서 환경부는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시민들에게 '의회와 시민' 플랫폼에 들어가 법안 토론에 참여하기를 권유하기도 합니다. 국회의원과 장관이 시민들에게 적극적인 '입법 세일즈'에 나선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정책이 다양한 지식과 의견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수 시민들이 입법 과정에 관여할 수 있다면, 법안은 질적으로 개선되고, 국회의원들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것입니다

- 시릴 라져(Cyril Lage)

왜 입법권은 국회의원들이 독점하는가?

우리나라도 진정이나 청원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입법을 제안할 권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인의 권리나 이익과 관련 없는 제도 개선에 대한 의견 제시는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처리율도 매우 낮습니다. 19대 국회의 경우, 청원 227건 중 채택된 안건은 단 두 건 뿐입니다. 나머지 225건은 채택되지 않거나 회기 만료 시까지 계류되었다가 결국 폐기되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하거나 국회의원의 입법권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것이죠.

19대 국회 청원 통계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의회와 시민' 플랫폼은 시민보다는 주로 국회의원이 주도권을 갖고 논의를 진행하는 한계가 있지만, 국회의원과 시민 간의 협업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합니다.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들의 진정이나 청원이 동사무소 직원의 민원 처리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는 것에 비추어 보면 국회의 기능적 한계를 보완하면서도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 폭을 넓혔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중지(衆志)를 모아 더 나은 지혜를 도출하는 것

무엇보다도 '의회와 시민' 플랫폼은 입법 과정에 다수의 시민들을 참여시키고 토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법안의 정당성을 높입니다. 의원과 전문가들만 법안을 만든다는 통념을 깨고, 의원과 이익단체 사이에 법안 통과를 조건으로 한 부당한 거래를 방지하는 것이죠.

이 모든 것에 더해, '의회와 시민'이 갖는 정치적인 의미는 시민들의 정치참여 효능감과 이를 통해 정치의 수준을 높이는 데에 있습니다. 시릴 라져는 집단 지성의 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정책에 관한 댓글들은 매우 부정적이거나 폭력적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정해진 바에 대해서는 반발하기 마련이죠. 우리는 시민들에게 (통보하는 대신) 의견을 물음으로써 이 구조를 뒤집습니다. 논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열린 감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열린 민주주의' 공동 창립자 시릴 라져(오른쪽 첫번째), 아멜 르쿠즈(오른쪽 두번째) / 아멜 르쿠즈의 페이스북

실제로 '의회와 시민' 플랫폼에서는 공격적인 발언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익명으로도 토론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안이 입법에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 때 시민들은 진지하게 임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더 좋은 정치는 참여를 통해서 가능하고, 이 참여는 시민들이 '하면 바뀐다'는 믿음에 근거해 정치적 의지를 발휘하고자 할 때 나타납니다. '의회와 시민'이 앞으로 얼마나 더 성과를 낼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여기에 참여한 시민과 정치인들 모두에게 새로운 정치적 비전과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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