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더 새로운 영화 3편

지난 여름 우리나라 영화는 초강세를 보였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8월 한국 영화 관객 점유율이 거의 70%에 달했다. 특히 1위부터 4위까지 ‘터널’,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 ’부산행’ 등 모두 한국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는 늘 현재를 반영하곤 한다. 특히 상위 순위의 영화를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래야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움직이고, 그로 인해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이 고민하는 철학적 사고와 인문 정신 등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인간의 집약적 고민과 맞닿는다. 영화가 훌륭한 인문 교재가 될 수 있는 이유다. 그런 관점으로 접근한 이야기를 만나보도록 하자.

1.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 속 이야기는 신비롭다. 표류를 하게 된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가 한 배에서 동거를 한다. 잡아 먹힐 위치에 있는 주인공이지만 호랑이와 공존하는 법을 익힌다.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관람객의 생각은 복잡해진다. (영화 속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헛갈린다. 호랑이와 함께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요리사의 시체를 먹으며 살아왔던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파이가 직원들에게 들려준 두 이야기의 관계는 합리적 이성과 비합리적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사실상 두 번째 이야기가 진실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두 번째 이야기의 진실성을 다양한 상징을 통해 드러낸다. 특히 식인섬 이야기는 이러한 상징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믿음의 문제로 넘어간다면 첫 번째 이야기가 진실이 될 것이다. …. 미국 종교학자이자 문학가인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 된다. …. 이런 성스러움은 홀로 나타나지 않고 평범한 일상 세계와 더불어 나타난다. 성스러움이 나타나기 위해선 일상 세계가 필요하며, 성스러움은 오직 일상 세계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 종교적 인간인 파이가 경험한 것은 마술적 효과로서의 성현이다. 만약 파이가 철저하게 이성만을 중시한 채 바다를 표류하였다면 호랑이라는 존재는 없었을 것이며, 홀로 바다를 외롭게 떠돌아다니다 죽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반대로 파이가 신비적 체험만을 중시한 채 이성을 배제하였다면 식인섬에서 진작 잡아 먹혀 죽었을 것이다. …. 파이는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즉 이성을 중심에 둔 채 신비적 체험과 믿음을 통해서 자신의 살아 있음을 지속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책 ‘영화 읽어주는 인문학’, 안용태 저)

2. 인셉션

당대 최고 영화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런이다. 우리에게는 ‘인터스텔라’ 감독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역작들 중 인셉션은 평점이 매우 높은 축에 든다. 꿈에 들어가 생각을 훔칠 수 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반대로 새롭게 제안을 받아 생각을 심고 나오는 과정도 재미 있다. 과연 그렇게 생각이 심어진 상태의 나는 진짜 나일까? 아님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인가? 놀런 감독의 화두는 인간 주체성에 관한 것이다. 진부한 소재일 수 있는 풀어내는 방식이 항상 새롭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끝없는 결핍을 자신이 간절히 갈망하는 환상을 통해 채우려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환상 속에서의 달콤한 만족은 현실로 돌아오면서 사라진다. 이때 인간이 보여주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한편으론 환상 속의 완벽한 나에게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다른 한편으론 현실의 나를 직시하여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태도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전자의 경우를 상당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환상 속의 나에게 지나치게 매료되어 현실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현상이 각종 도박, 마약 따위의 중독이다. 도박에 성공했을 때 그려지는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완벽하기에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달콤한 환상 속의 나는 하나의 상상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애정을 품는 나르시스의 모습이야말로 거울 이미지에 매료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일 것이다.”(책 ‘영화 읽어주는 인문학’, 안용태 저)

3. 설국열차

간혹 우리는 어떠한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 기세에 눌린다. 인간과 제도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제도가 우리는 지배하는 순간, 우리의 운명은 남의 손에 들어가 버리게 된다. 설국열차도 마찬가지다. 열차를 만든 것은 인간일 텐데, 어느 순간 열차가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저서 ‘호모 사케르’에서 꼬리 칸 사람들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호모 사케르, 다시 말해 벌거벗은 생명(조에)이란 정치권력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자를 의미한다. 반면 정치적 존재(비오스)는 권력에 의해 보호받는 자들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 존재는 언제든지 벌거벗은 생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은 막연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안 그래도 불안한 내 삶이 조에로 전락해버린다면 더 힘들고 고단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감시하고 훈육하며 비오스로 남기 위해 애쓰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에들이 완전히 법질서와 괴리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꼬리 칸 사람들은 감옥에 갇힐 권리도 없는 벌거벗은 생명이지만 분명 열차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책 ‘영화 읽어주는 인문학’, 안용태 저)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허프북스 #영화 #인문학 #영화인문학 #라이프 오브 파이 #인셉션 #설국열차 #문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