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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여성혐오 뒤에 숨다

당장 대법원을 보라. 재판에 참여하는 대법관 13명(대법원장 포함) 중 여성은 달랑 두 명 아닌가. 거꾸로 여성 대법관들 사이에 남성 두 명만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 정상으로 보이는가. 지난해 여성 평균 임금은 남성의 62.8%(통계청), 대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3%(여성가족부). 가끔 기사화되곤 하는 '알파걸'이니 '여풍(女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착시요, 신기루다. 유리천장에 작은 균열이 갔을 뿐이다.

  • 권석천
  • 입력 2016.09.21 11:22
  • 수정 2017.09.22 14:12
ⓒ연합뉴스

택시가 서울역 앞에 섰다. '부산행 KTX OOO호'. 출발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천리마고속 상무 용석은 대합실 좌석에 앉았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일베 사이트를 클릭했다.

'여성 저임금 수준 OECD 1위.'

용석은 기사가 링크된 게시 글을 열었다. "2014년 여성 임금 근로자 중 임금 중위값의 2/3 미만을 받는 비중은 37.8%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비교 가능한 22개국 중 가장 높았다."(18일자 연합뉴스) 200개 넘는 댓글에 거친 욕설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동남아였으면 몸 팔아야 먹고살 X들이.' '성매매 합법화되면 여성 고임금 1위됨.' '저건 페미(페미니스트)들의 조작 통계야.' '저임금 받는 X들 10명 중 4명이 무슨 노력을 했는데?'

표현은 좀 심하지만 말이야 맞지. 무슨 여자들이 남자하고 똑같이 받겠다는 거야? 그러게 누가 여자로 태어나래? 용석은 인터넷에서 본 성주군수 발언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군수는 사드 배치 철회 집회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특히 여자들이 정신이 나갔어요...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런가, 전부 술집 하고 다방 하고 그런 것들인데."

하지만 용석은 알고 있었다. 한국 사회가 양성평등은 아니라는 걸. 당장 대법원을 보라. 재판에 참여하는 대법관 13명(대법원장 포함) 중 여성은 달랑 두 명 아닌가. 거꾸로 여성 대법관들 사이에 남성 두 명만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 정상으로 보이는가. 지난해 여성 평균 임금은 남성의 62.8%(통계청), 대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3%(여성가족부). 가끔 기사화되곤 하는 '알파걸'이니 '여풍(女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착시요, 신기루다. 유리천장에 작은 균열이 갔을 뿐이다.

용석은 문득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때 회사에서 내보낸 여성 직원들 얼굴이 떠올랐다. 고마운 일이지. 위기가 올 때마다 여자들이 범퍼 역할을 해 주니....(※1997년 49.8%까지 올랐던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다음해 47.1%로 급락. 2009년 2월 30대 여성 취업자 수는 7.1% 감소. 배은경 서울대 교수 논문 '경제위기와 한국여성')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도 국회 청문회에서 고백하지 않았나. "가정주부로 집에만 있다 나와서 전문성이 부족했다." 용석은 최 전 회장이 가정주부가 아닌 재벌가 사모님이었다는 걸, 그 발언이 전문성과 열정을 다해 일하는 여성들을 욕보인다는 걸 알았지만 구태여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삶이 흔들리게 되니까. 전날 저녁자리에서 신문사에서 밥 벌어 먹는 친구가 내뱉은 말이 용석의 머리를 스쳤다.

"여성혐오에 너나 나 같은 아저씨들 책임도 크다는 생각이 들어. 청년 실업률은 10%대를 오르내리고, 부동산값 급등으로 '부자 아빠' 없으면 아파트 전세 구하기도 힘들잖아. 그 불만들을 이런 세상 만든 기득권층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보이는 또래 여성들에게 투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는 사이 우린 가부장제 문화에 젖어 남녀차별을 즐기고 편견을 퍼뜨리고 있는 거고. 혐오 표현에만 눈살 찌푸리는 척, 교양 있는 척하면서...."

자식, 잘난 체하기는. 그런 소리, 젊은 친구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들이 정부와 기업을 향해 괜찮은 일자리 만들라고, 열심히 노력하면 결혼해서 작은 집에라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달라고, 징병제를 없애지 못하면 대체복무라도 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서면 어떡할 거냐고. 싸워야 할 대상은 여성이 아니라 기성세대 남성들이란 걸 알게 되면 어떡할 거냐고. 결국 우리 부담으로 돌아오는데....

힘내라. 일베들. 너희 뒤엔 이 아저씨가 있다. 용석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그려졌다. 어차피 인생은 각자도생(各自圖生).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거야. 나만, 내 가족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거라고. 용석은 대합실 화장실에서 넥타이를 고쳐 맨 뒤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는 그날 뭔가 무서운 일이 자신을 덮치리라는 걸 KTX에 오르는 순간까지 예감하지 못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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