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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기사가 전하는 ‘김영란법 시대' 국회 명절 풍경

“유난히 택배를 반송한다는 의원실이 많아서 가욋일이 늘었어요.”

이번 추석이 국회 택배 기사로서의 5번째 명절인 ㄱ씨는 부쩍 늘어난 반송물량 처리에 애를 먹었다. ㄱ씨는 “의원실에 100개 배달하면 1~2건 정도 수취거부가 있을까 말까 했다. 수취거부 자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번엔 10개 배달하면 2건 정도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예전보다 대략 10배 정도 수취거부 건수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왼쪽) 한가위 연휴를 열흘여 앞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택배 수령 장소가 한산하다.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명절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오른쪽) 추석을 엿새 앞둔 2014년 9월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회 직원들이 택배를 분류하고 있다.

국회로 들어가는 택배 물량을 5년 넘게 맡은 택배 기사 ㄴ씨도 “의원실에 택배 왔다고 연락하면 어디서 보냈는지 묻기는 하더라도, 별말 없이 택배 받으러 의원회관 로비로 내려왔었다. 그냥 ‘알겠습니다’하고 묻지 않고 내려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어디서 보낸 건지 반드시 물어본다. 피감기관이나 지역구 등에서 보낸 것이면 열에 다섯은 돌려보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국회에 택배를 배달하는 복수의 기사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번 추석엔 예년 명절보다 국회의 택배 수취거부가 크게 늘었다. 이들은 “예년에 비해 적어도 5배 이상은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 오는 28일부터 일명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 시행을 앞두고 달라진 국회의 명절풍경이다. 법이 시행되면, 국회의원은 피감기관으로부터 5만원이 넘는 선물을 받을 경우 형사처벌받게 된다. ㄱ씨는 “곧 있으면 김영란법이 시행되니까 의원들이 언론에 안 좋은 사례로 소개될까봐 미리 몸을 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량 자체가 줄고, 반송 요구가 늘어나면서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는 업무처리가 많아졌다. 평소 국회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절대적으로 물량이 적고 가정용 택배와 달리 받는 사람에게 직접 물건을 전해줘야 해 택배 기사들이 선호하지 않는 곳이다. ㄹ씨는 “가정 택배는 연락만 하고 경비실이나 문 앞에 두고 떠나면 되지만 국회에는 워낙 많은 택배가 모이기 때문에 로비에 그냥 두고 가면 분실위험이 있다. 보좌진들이 내려와서 받아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한건당 600~700원 받는 택배 기사는 한정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배달해야 한다. 좋은 배달지는 아닌 셈이다. 게다가 물량까지 줄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고 말했다.

ㄴ씨는 “국회를 담당하는 택배 기사들은 국회 물량이 평소에는 적기 때문에 사실상 명절만 바라보면서 일한다. 그런데 물량이 4~5배 가까이 줄어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럽다. 지난 설만 하더라도 물량이 많아 온 식구들이 배달업무를 돕기도 했는데, 이제 혼자 처리해도 무리가 없다”고 했다. ㄹ씨는 “반송되면 보낸 사람에게 다시 전달하기 위해 집하장에 반납해야 한다. 그 대가로 반송 1건당 200~300원 정도 받지만, 그 시간에 한 건 더 배달하는 게 낫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손해다”고 말했다.

아예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택배 기사들에게 미리 선언한 곳도 있다. 20년 넘게 국회를 맡고 있는 택배기사 ㄷ씨는 “자꾸 선물 거절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까 수취거부를 미리 알려오는 방(의원실을 지칭)도 좀 있다. 이번 추석에는 10곳 넘는 곳에서 아예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예전에는 4곳 정도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ㄱ씨도 “이번 명절에 택배 배달 때문에 한 의원실에 전화했더니 ‘죄송합니다만 동료 의원님들이 보내신 택배 말고는 저희는 안 받는 거로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요청하더라”고 전했다.

피감기관이 해당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보낸 명절선물로 가득찼던 의원회관 로비도 이번 추석은 예년보다 한산했다. 국회 택배 배달 4년 경력의 택배 기사 ㄹ씨는 “지난해와 비교해 배달물량이 3분의 1 수준이다. 지난해 추석에는 많을 경우 1200개, 적을 때도 700~800개였는데, 이번에는 많아야 500개, 보통 200~300개에 그쳤다. 이번처럼 한가한 명절은 처음이다”고 말했다. 그는 “추석 선물 때문에 보통 명절 2주 전부터 일이 많아지는데, 이번에는 명절을 일주일 앞두고서야 조금씩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ㄴ씨도 “새로 국회가 구성되면 여기저기서 의원들에게 새로 인사하기 위해 선물을 많이 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특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그간 국민이 뽑은 의원들이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렸는지 생각하면 씁쓸한 느낌”이라고 꼬집었다.

보내는 선물의 양상도 달라졌다. ㄱ씨는 “상대적으로 선물의 부피와 무게가 줄었다. 흔하던 과일 상자도 드물다. 가격이 높은 갈비, 굴비, 양주 등 고가의 선물이 거의 없어지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멸치 선물이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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