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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구속' 사진은 없는 이유

지난 금요일 김수천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구속됐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로부터 재판 관련 청탁과 함께 1억7000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김 부장판사 구속엔 남다른 대목이 있었다. 구속 수감되는 사진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한 만큼 영장심사 출석 사진은 있을 수 없다. 검찰 소환이나 구속 수감 때는 다른 이들처럼 검찰청 포토라인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문제는 사진 한 장이 있고 없고가 아니다. 구속 장면을 가린다고 그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상징하는 최후의 특권의식,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최후의 동업자 의식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 권석천
  • 입력 2016.09.07 06:52
  • 수정 2017.09.08 14:12

"갑을 말고 '갈읍'이라고 아세요?" 몇 주 전 대학 후배들과 만났을 때였다. 한 후배가 물었다. 갈읍? 처음 들어본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갑(甲)은 갑인데 을(乙)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이 '갈'이죠. 갑이 을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거꾸로 을의 위치에 있지만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이들을 '읍'이라고 부른답니다. 을인데 갑과 비슷하다고...."

지난 금요일 김수천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구속됐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로부터 재판 관련 청탁과 함께 1억7000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김 부장판사 구속엔 남다른 대목이 있었다. 구속 수감되는 사진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한 만큼 영장심사 출석 사진은 있을 수 없다. 검찰 소환이나 구속 수감 때는 다른 이들처럼 검찰청 포토라인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지난해 1월 '명동 사채왕'에게서 2억6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최민호 전 판사가 구속됐을 때도 소환이나 구속 사진은 없었다. 두 경우 모두 검찰은 판사들이 출두한 다음 소환 사실을 알렸고, 구속 수감 과정도 공개하지 않았다.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소환·구속 장면을 공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원칙이 왜 판사에게만 적용돼야 할까. 그것이 '법 앞에 평등'일까.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말한다.

"법원 쪽에서 요청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판사에 대한 예우를 해줬다고 봐야죠. 잇따른 구속영장 기각으로 속앓이를 해온 검찰로선 동시다발적 수사를 벌이는 상황에서 법원과 좋은 관계를 도모할 필요도 있고...."

그간 검찰 수사에서 이름이 거론된 판사는 김 부장판사만이 아니었다. 검찰 주변에선 "현직 판사 수사는 김 부장판사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을 두고도 "판사 수사는 더 이상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거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법원과 검찰이 갑을 관계는 아니다. 다만 법원은 최종 판단자로서 검찰의 수사권·기소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 관계가 '갈읍' 비슷한 것으로 바뀌고 있는 건 아닐까. 중요한 건 법원-검찰의 관계가 사회에 미칠 영향이다. 나는 검찰과 법원 사이가 좋은 게 시민들에게도 좋은 것인지 묻고 싶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최근 검찰 수사 과정에서 "압수수색 영장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발부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법조계에선 "발부해 준 판사가 누구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기자 휴대전화에 대한 압수 영장이 발부된 후에는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이 불거졌다.

법원이야 유·무죄 판결로 검찰 수사를 판단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 단계, 압수수색이나 구속영장 단계에서 엄격하게 걸러지지 않으면 피의자에겐 사회적으로 '유죄'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다. 법원과 검찰의 밀월이 서로에겐 달콤할 수 있으나 시민들 입장에선 위험한 것이다. 오히려 두 기관 간에 약간의 긴장감이 흐를 때가 좋은 것이다.

판검사 출신 변호사, 검사장, 청와대 수석, 신문사 주필, 부장판사.... 사회 정의를 앞장서 지켜야 할 자들의 손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권력이든, 돈이든 명줄 쥔 자의 마름 노릇을 하면서 부정한 청탁을 주고받은 결과일 것이다. 진상을 철저히 파헤치고 그 결과에 따라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판사의 오직(汚職)이 참담한 건 그래서다. 판사는 사회의 건강성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에서 신분과 일(재판)의 독립을 헌법으로 보장해주는 직업은 판사밖에 없다. 그들마저 깨끗하지 못하다면 누가 심판자 역할을 할 것인가. '공정한 재판'이란 가치마저 사고파는 상품일 뿐이라면 서민들은 어디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것인가.

문제는 사진 한 장이 있고 없고가 아니다. 구속 장면을 가린다고 그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상징하는 최후의 특권의식,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최후의 동업자 의식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 참석을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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