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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사람들에게 콜레라는 무시무시한 재앙이었다

지난 8월 31일 거제에서 세 번째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보건당국은 콜레라균에 오염된 바닷물에 서식하던 수산물을 먹어서 감염되었을 가능성과 국외 환자가 전염시켰을 가능성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다행히 이번 콜레라는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사망자가 생길 가능성도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나 19세기만 해도 콜레라는 무시무시한 재앙이었다. 일단 발병되면 열흘 안에 수천 명 이상 죽는 것은 기본이었다. 발병 또한 자주 일어났다. 공중위생 개념의 부재 때문인데 콜레라가 비브리오 콜레라균에 의해 물을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방역이라고 한 행동들이 오히려 널리 콜레라를 퍼뜨리기도 한 이유다. 책에서 콜레라를 막거나, 퍼뜨렸던 방역의 결정적 순간들을 살펴보았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19세기 도시의 분위기를 느껴보자.

1. 미신과 검증되지 않은 요법

"...국가 차원에서는 역병 귀신을 쫓는 여제(厲祭)를 베풀었다. 여제는 역병이라는 재앙에 국가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정치적 치장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억울한 원혼 따위가 뭉쳐져 원(寃)기역에 파견했다. 유행규모에 따라 중앙에서 파견된 제관의 등급이 달랐으며, 많은 겨우 그 지방의 수령이 직접 제사를 거행했다. 또한 유행이 매우 심할 때에는 왕이 직접 제문을 짓기도 했다." (책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신동원 저)

"...치료법과 예방책은 다양했고 논쟁거리가 많았다. 몇몇 시에서는...소음으로 실험을 했다. 협곡을 폭파하고 총을 발사하고 징을 울리고 일출부터 일몰까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의사들은 소금, 겨자, 구운 후추, 다진 마늘, 으깬 고추냉이, 불에 태운 코르크 등으로 뜨거운 찜질 약을 처방했다. 또한 얼음냉수 목욕, 온수 목욕, 담배 관장약, 아편 좌약, 그리고 한때 유행했던 방혈 등을 권장했다. 영국은 기도와 구원의 공휴일을 제정해 두 차례 시행했다. 그러나 모두 헛수고였다." (책 '왜, 독감은 전쟁보다 독할까', 브린 바너드 저)

조선시대에는 콜레라를 '호열자'라고 불렀다. 콜레라에 걸리면 격한 설사를 해서 탈수 증상이 일어나고 몸이 파르스름하게 변해가는데, 그 과정이 호랑이가 할퀴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정확히 누가 어디서 어떻게 걸릴지 알 수 없는 병이라 해서 '괴질'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우리는 배설물, 체액 등에 있는 콜레라 균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서 발병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당시만 해도 콜레라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는 미지의 공포 그 자체였다. 그리고 미지는 미신을 낳았다. 국가에서 방역 대신 원혼을 달래 역병을 가라앉히려는 시도를 대대적으로 행했다. 민간에선 콜레라를 쥐 귀신이 옮기는 것이라 생각해 고양이 그림을 그려 붙이기도 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를 어리석다며 비웃었지만, 사실 19세기 말까지 서양도 그리 다른 처지는 아니었다. 국가에서 신의 구원을 비는 공휴일을 콜레라 방지를 위해 제정하기도 했고, 콜레라를 쫓아내기 위해 허공에 총을 쏘기도 했다. 쓸데 없는 짓들이 이어지면서 콜레라는 더욱 창궐하곤 했다.

2. 잘못된 믿음

"...어째서 관료들은 템스 강을 망가뜨리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으로 치달았을까? 각종 위원회의 위원들도 쓰레기를 강에 쓸려 보낼 경우 수질이 끔찍하게 나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인구 중 상당수가 그 물을 마신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콜레라의 수인성 이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갈수록 많은 분뇨를 상수원에 투기하면서 즐겁게 환호하는 정책은 미친 짓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것은 광기라 할 만했다. 이론이라는 주술에 들린 나머지 생긴 광기다. 악취가 곧 질병이라면, 런던의 보건 위기가 전적으로 오염된 공기 탓이라면, 건물과 거리에서 독기를 제거하는 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치 있게 보였던 것이다. 템스 강을 거대한 하수구로 타락시키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책 '감염지도', 스티븐 존슨 저)

사실 콜레라는 도시와 함께 자라난 전염병이다. 콜레라에 무지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피해가 19세기에 더 커진 이유다. 도시에서 기하급수적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체계적인 상하수도 망의 부재였다. 100만 명 이상이 살면서도 골목마다 똥오줌이 넘쳐흐르고, 그 배설물이 그대로 지하수로 스며 우물물이 되었던 19세기 런던을 상상해 보라. 배설물이 섞인 물을 먹는 것이 일상이 되며 콜레라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은 전염병의 원인을 배설물 자체보단 거리에서 나는 악취 때문이라고 막연히 믿었고, 보건당국은 도시 악취 원인인 배설물을 없애기 위해 대대적인 하수도망을 설치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하수도망을 통해 배설물을 쏟아부은 곳이 템스 강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상수원에 하수도관의 끝을 연결해 놓은 셈이다. 이런 어이 없는 ‘방역’ 덕분에 콜레라는 더욱 빨리 퍼져나갔다.

3. 편견에 찬 식민지 정책

"...일찍부터 제국주의화하고 있던 19세기 영국인들이 남부 인도에서 료트와리(ryotwari) 제도(수입에 기초해 각각의 농민을 개별적으로 평가하는 제도-역자)로 견지되는 소작지를 창출할 때 고려하지 못했던 점은, 그런 정책을 통해 급속하게 경작되는 '기준 이하의' 토지 규모가 엄청나게 증대되는 결과였다. 정부 통계학자 W. W. 헌터(Hunter)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이런 결과를 우려하기보다는 경작지의 증대(1853년 이후 24년 동안 66퍼센트가 증대됨)가 문명화를 이룩하는 영국이 지닌 힘의 증거라며 찬양했다. 그러나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 료트(ryot:농민들)들이 변두리 토지에 보다 크게 의존함에 따라 그들 또한 납세 만기가 되었을 때 어려움을 피하려고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비가 오지 않거나 반대로 엄청나게 비가 와서 농작물이 피해를 입을 경우, 고리대금업자와의 약정은 채무 불이행과 몰수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기근과 (만일 비브리오가 어쩌다 근처에 있었다면) 유행성 콜레라의 창궐이었다." (책 '전염병과 역사', 셸던 와츠 저)

19세기 콜레라 발병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되었던 것은 '속인론'이었다. 개개인의 잘못된 습관이나 나쁜 마음가짐이 병을 불러들인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이 설명은 특히 식민지 인도에 적용되었다. 제임스 밀의 ‘인도사’는 인도 사람들을 '태곳적부터 변함없이' 게으르고 더러운 사람들로 묘사했고, 당시 행정가들은 인도에서 여러 번 창궐한 콜레라도 이런 인도인의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받아들여 특별한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실제 콜레라의 원인이 기존 토지 소유권을 부정하면서 벌어진 인프라를 책임졌던 마을 지도자의 해체, 강제 정착령 때문에 불가능해진 피난, 깨끗한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던 점 등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급속히 창궐한 콜레라는 인도에서 시작해 교역선을 타고 영국에 상륙하게 된다. 안전 대신 이윤을 택한 배에서 콜레라에 걸린 사람이 정박한 항구에 내리는 순간이 영국에 콜레라가 퍼진 '결정적 순간'이었다.

4. 펌프 손잡이의 제거

"...펌프 손잡이 제거는 역사적 반환점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런던에서 가장 폭발적이었던 질병에 종언을 내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에는 단 몇 분 만에 세상을 변혁시킨 기념비적인 순간이 많다. 지도자가 암살당하고, 화산이 분출하고, 헌법이 비준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보다 규모가 작되 의미는 작지 않은 반환점도 많다. 낱낱이 존재하던 100여가지 역사적 추세가 별것 아닌 하나의 행위에 수렴하고, 향후 수년 또는 수십 년간 그 단순한 행위로부터 1,000가지 변화가 물결쳐 나오는 것이다. 부산한 도시의 한 길가에서 누군가가 펌프 손잡이를 비틀어 빼버린 일도 그런 행위였다. 그 순간 세상이 바뀐 것은 아니다. 변화가 가시화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조용히 진화하는 변화라고 해서 덜 중대한 것은 아니다." (책 '감염지도', 스티븐 존슨 저)

앞서 살펴본 콜레라를 퍼뜨린 순간들이 정부의 어이 없는 방역 정책이나 무관심에서 나왔다면, 콜레라의 종언의 순간은 두 명의 민간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의사 존 스노와 목사 헨리 화이트헤드가 그들이다. 존 스노는 콜레라가 세균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악취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엔 의문을 표하며 분명 다른 매개체가 있을 거란 자신의 추정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온다. 런던 브로드가 40번지에서 대규모 콜레라가 발병한 것이다. 보건당국은 악취와 생활습관이 원인이란 전제를 두고 하수구 뚜껑의 봉인 여부, 발병자의 식생활 등을 체크했지만, 스노는 지도에 콜레라 환자 가구를 표시하며 발병자들의 집이 브로드가의 식수 펌프 근처에 몰려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스노는 지역 교구 이사회에 펌프 손잡이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진다. 마침내 최초로 콜레라 매개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치를 취한 사례가 생겨난다. 화이트헤드 목사는 브로드가의 주민으로, 존 스노가 할 수 없었던 인터뷰를 통해 콜레라의 시작이 콜레라에 걸린 아이의 변이 묻은 기저귀를 식수 펌프 근처 오물 구덩이에 던진 한 어머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존 스노에게 전해 콜레라가 물을 매개로 전염된다는 논문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를 계기로 점차 악취 대신 물이 전염의 매개체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지게 된다. 지역 주민의 적극적인 제보와 전문가의 통찰력이 협업을 이뤄낸 가장 효율적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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