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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

게이인 나에게 오래 사귄 여자 친구는 정말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동물'이지만 동성애자인 새내기 남학생에게 정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왜냐하면 넌지시 동성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다수의 반응은 동성애자는 문란하고 더럽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우리나라에는 동성애자가 없다라는 식으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등 나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비로소 내가 남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내가 지금처럼 동성애자로 살게 되면 앞으로 내 삶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 김승환
  • 입력 2016.08.31 12:42
  • 수정 2017.09.01 14:12

나는 경상남도 창원이라는 보수적인 지역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특이하게도 학창 시절에는 게이라는 성 정체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도리어 여성성을 가진 남성으로 많은 혜택(?)과 특권(?)을 누리며 학창 시절을 즐겁게 보냈다. 당시만 하더라도 게이나 성소수자라는 개념이 없는 시절이었다.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 들도 남고, 여고에 있는 동성 커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또래 문화 정도로 여긴 듯하다. 물론 이 생각에는 대학교를 가면 어차피 이성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렸지만, 덕분에 최소한 나의 학창 시절은 참 행복했다.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대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재수에 실패해서 우울한 마음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이 펼쳐지고 어떤 좋은 남자를 만날지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나는 과 생활뿐만 아니라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내가 뭔가 남들과 다르고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엠티에 가서 깨달았다. 보통 엠티처럼 함께 어울리는 자리에서 놀다 보면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위 '산책 타임'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나에게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다.

한 커플, 두 커플이 맺어지고 그들이 산책을 가다 보니 방에는 나를 포함해 '팔리지 않은' 소수 몇 명만 덩그러니 남았다. 심지어 그 소수 몇 명은 선배들이었고 이미 애인이 있거나 연애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자연히 남은 사람들은 신입생인 나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냐고 물어왔다. 난 반사적으로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다고 둘러댔다. 그러고는 피곤해 자야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며 뭔가 그런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게이인 나에게 오래 사귄 여자 친구는 정말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동물'이지만 동성애자인 새내기 남학생에게 정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왜냐하면 넌지시 동성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다수의 반응은 동성애자는 문란하고 더럽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우리나라에는 동성애자가 없다라는 식으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등 나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비로소 내가 남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내가 지금처럼 동성애자로 살게 되면 앞으로 내 삶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성 정체성을 철저히 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본격적으로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물어보면 오래된 여자 친구가 있고 지방 대학을 가서 학기 중에는 만나기 어렵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다. 가장 난감할 때가 여자 친구 생일이 언제냐?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냐?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냐? 같은 신상에 관한 질문이었다. 매번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내가 예전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해서 잘못 말하지 않으려고 진땀을 흘렸다. 그런 자리가 끝나고 기숙사로 들어오면 녹초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거짓말은 단순히 거짓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는 데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분명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름대로 철저히 거짓말을 하며 그 시간이 서먹하지 않게 여러 이야기를 나누지만 결국 진실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방이 먼저 눈치 채서 그런지 모두 나를 조금씩 멀리했다. 나 역시 계속 거짓말을 하고 여자 친구가 있는 척 연기하는 것이 힘들었다. 자연스레 일대일 약속을 피했고 그러다 보니 아는 사람은 많아도 외롭게 지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당시 동성애자로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잘 몰랐다. 사회적 편견이 막연히 두렵기만 했다. 인격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선배나 동기에게 커밍아웃하고 진실한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거부당하거나 도리어 원치 않는 아웃팅을 당하게 될까 봐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인 오래된 여자 친구는 나의 반복되는 거짓말 속에서 점점 자라나 꽤나 그럴싸한 모습을 갖추었다. 나는 그만큼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갔다. 정말 외롭고 힘든 기간이었다.

* 이 글은 <광수와 화니 이야기>(김조광수 김승환 저, 시대의창)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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