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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만큼 드라마틱한, 4명의 근대 유학파 여성들의 이야기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 15일 만에 관객 수 500만을 돌파했다. '부산행', '인천상륙작전', ‘터널’처럼 전쟁, 재난 영화가 흥행을 이어가는 가운데 여성 주연 영화의 이색적인 흥행이다. '덕혜옹주'를 연기한 손예진은 개봉 후 한 인터뷰에서 '여자의 일대기' 자체가 기획되기 힘든 주제라 출연 기회를 더 소중히 생각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맞다. 한국에서 '여성의 일대기'를 다룬 대중영화는 드물다. 그나마 ‘황진이’가 유일하다고 할까? 특히 근대 초기 전문교육을 받고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했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덕혜옹주'는 왕실의 자손으로 억지로 일본에 끌려가 강제 유학을 '당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에게는 ‘덕혜옹주’보다 더욱 당찬 근대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주체적으로 유학을 떠나 전문교육을 받고 귀국해 적극적으로 드라마 같은 삶을 열어갔다. ‘덕혜옹주’에 이어 영화화가 될법한 '대선배 커리어우먼'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1. 최은희 - 조선 최초의 민간지 여기자

"...만약 조선에 처음인 여기자로서의 나의 생활이 일천만 여자계에 큰 공헌이 없다면 아무 가치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날부터 나는 여자의 수줍은 태도를 떠나서 아주 대담한 마음으로 부장의 분부를 받아 가지고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정처도 없고 청함도 없는 발길을 멈출 사이 없이 자꾸 돌아다니었습니다...우리 조선...여성 사회가 얼마나 빈약하며 단순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습니다...경제적으로 자본주의자인 남성에게 노예가 되고 성적으로 남편에게 구속을 받는 이중 사슬에 얽매인 우리 여자계의 현상을 볼 때에 나는 단지 남성을 반역하는 운동으로부터 해방의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요 근본적으로 이러한 남성을 만들어내는 사회조직을 무엇보다도 먼저 개혁하여야겠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었습니다." (1926.1.1 조선일보)(책 '한국의 여기자', 김은주 저)

1924년 최은희가 여성 최초로 민간지 조선일보에 입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일화 하나가 전해진다. 최은희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여고) 3학년 재학 당시 3.1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구류 후 풀려난 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있었는데, 방학 때마다 잠시 귀국하곤 했다. 이 때 이광수의 아내였던 개업의 허영숙이 왕진을 갔던 어느 부잣집에서 출산 경비를 받지 못해 애를 먹는단 얘기를 듣고 분개해 아예 그 집 앞에 찾아가 돗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낮잠까지 자며 하루 종일 버틴 끝에 결국 출산 경비를 대신 받아온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광수가 그런 ‘수완과 배짱’이라면 기자를 하기에 알맞은 자질이라 생각해 조선일보에 추천을 넣었다는 것이다(책 '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 김경일 외 저). 과연 그 '수완과 배짱'을 살려 최은희는 나이든 여자 하인으로 변장해 그 처우를 직접 알아보는 잠입 취재, 기자 최초의 비행기 탑승 취재, 방송 첫 여자 MC 등의 커리어를 남긴다. 정작 일본 유학은 신문사 입사 때문에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지만, 달리 보면 3.1 운동 주도도, 일본 유학도, 출산 경비를 받아낸 일도 모두 기자로서의 '수완과 배짱'과 연결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해볼 만하다.

2. 김점동(박에스더) - 조선 최초의 여자의사

"...만일 무사히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포기한다면 내겐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신의 뜻이라 해도 의사공부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남편 역시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내가 의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다면, 그때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요." (책 '큰 별 되어 조선을 비추다:한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최혜정 저)

후일 정동교회에서 받은 세례명과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개명한 김점동은 이화학당의 네 번째 제자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에 가면 밥은 먹고 옷은 입을 수 있을 것이다’란 아버지의 생각으로 보내진 학교였지만, 김점동은 두각을 나타냈다. 열 살에 입학해서 단 4년만인 열 네 살에 의사선교사 로제타 홀의 영어 통역을 맡았다. 통역 및 의료보조를 하며 의사의 꿈을 가지게 된 김점동은 로제타 홀이 미국 뉴욕으로 돌아갈 때 자신을 데려가 줄 것을 간청한다. 그렇게 로제타 홀의 도움으로 뉴욕에 간 김점동은 생활비를 벌며 동시에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공부해 1년 만에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지금의 존스홉킨스 대학)에 합격한다. 실로 놀라운 능력이다.

아마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다면 본인에게 어떤 기회도 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던 ‘간절함’ 또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심정은 어려운 경제사정에 시달리던 김점동이 학업 중단을 권유하는 로제타 홀에게 답한 위의 인용문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열정으로 김점동은 마침내 입학 4년만인 1900년, 의학사 학위를 받아 조선인 최초의 여의사가 된다. 하지만 미국병원에 추천서를 써 주겠다는 교수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조선에 귀국한 김점동은 10개월에 3천명을 진료하는 초인적인 일정 끝에 귀국 10년만인 1910년 폐결핵으로 숨져야 했다. 34세의 나이였다. 뜨겁게 개척했던 유학 길에 비해 귀국 후의 활동은 안타깝게도 너무 짧았다.

3. 최영숙 - 조선 최초의 스웨덴 유학파 여자 경제학자

"최영숙 여사의 열정과 용단과 자립성은 한 가지 큰 뜻을 위하여 통일 조화되어 있다. 재주는 일중영불서에 능통하고 연구는 경제학에 깊다. 이 모든 것보다도 그를 여자로서 여자답게 하고 세상으로 하여금 장래의 촉망을 갖게 하던 것은 실로 그의 무게 있는 인격"이라..." (일기자, 1932) (책 '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 김경일 외 저)

최영숙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최초의 조선인 여성이었다. 1926년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 유명한 여권론자였던 스웨덴 여성 엘런 케이(Ellen Key)를 동경해서라는 말이 전한다. 그 곳에서 최영숙은 스웨덴 여성들이 "자유스럽고 쾌락적인 가정생활이며 사회 활동"을 하는 모습과 "동양에서 이른바 현모양처에 그치지 아니하고 (스웨덴에서는) 사회의 일 분자로 국민의 한 분자로 (여성이) 그 임무를 완전히 다함"을 보았다고 쓰고 있다('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 김경일 외 저). 최영숙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경제학뿐 아니라 1931년 유학생활을 마칠 때까지 영어, 독일어, 스웨덴어, 일본어, 중국어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익혀놓았다. 또한 유학 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인도, 중국 등을 여행한다. 지금도 쉽지 않은 여정인데, 1930년대 조선인 여성으로서 대단한 여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귀국 후 그녀에게 돌아온 일자리는 전무했다.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여성소비조합을 인수해 교남동에 매장을 열어 콩나물 등을 팔았던 게 그녀가 돈을 벌 수 있었던 유일한 활동이었다. 결국 그녀는 귀국한지 5개월 만에 건강 악화로 숨졌다. 겨우 27세였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5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며 세계일주까지 한 능력 있는 여성에게 콩나물 장사만을 허락했던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다.

4. 주세죽 - 조선의 혁명가

"내 이름은 주세죽. 1901년생. 직업, 조선 독립혁명가.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이후 스무 성상 내내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줄기차게 싸워왔다. 그런데 항일 투쟁을 벌여갈 때 언제나 든든했던 '언덕' 소련공산당이 돌연 나를 체포했다. '사회적 위험분자'로 훌닦은 뒤 1938년 5월 22일 카자흐스탄의 사막 도시 크즐오르다르로 '유형 5년'을 명했다. 법률적 절차도, 재판도 없었다. 행정명령으로 그렇게 했다. 죄와 벌 모두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다." (책 '코레예바의 눈물', 손석춘 저)

주세죽은 함흥 영생고등여자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상해에 피아노와 영어를 공부하러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그곳에서 음악 대신 사회주의에 빠져든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망명 와서 활동하던 상해에서 박헌영을 만난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피아노 공부 대신 사회주의 기관지 발행과 조선공산당 조직 활동, 여성동우회를 통한 여성노동자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주세죽은 박헌영과 함께 투옥, 도피를 반복한다. 책 제목인 '코레예바'는 그러한 도피 중 소련 모스크바에 도착해 '혁명이론'을 배우기 위한 두 번째 유학을 시작하며 대학 학적부에 적어 넣었던 ‘고려인’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공부를 마친 후 그녀는 상해로 건너가 지하 기관지 활동에 참여하며 조선으로 돌아갈 기회를 노렸지만, 박헌영의 체포로 다시 모스크바로 도망쳐야 했고, 그 곳에서 스탈린에 의해 '사회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그 사이 그녀는 두 번 결혼 했고, 각각 하나씩 두 아이를 두었지만, 도피 중에 낳았던 큰 딸은 유배 중 소련에 의해 강제로 떨어져야 했고, 젖먹이 아들은 카자흐스탄에서 풍토병에 걸려 먼저 묻어야 했다. 그리고 5년형이 끝난 뒤에도 스탈린은 그녀를 모스크바에도, 조선에도 살게 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카자흐스탄에서 평생 살며 아주 가끔씩만 딸을 만날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딸을 보기 위해 소련 정부의 허가를 얻어 모스크바에 갔다. 무용수로서 지방순회 공연 중인 딸 대신 사위가 모스크바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1953년, 52세의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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