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거지였지만, 중국의 황제가 된 주원장의 이야기

중국 황제가 우리나라 드라마에 등장하는 일은 흔치 않다. 신라를 돕기로 결정했던 당 태종(이세민)은 SBS ‘연개소문’, KBS ‘대조영’ 등에 나왔고, 조선 건국 과정에서 신경전을 벌였던 명 홍무제(주원장)는 KBS ‘정도전’에 등장한 바 있다. 그래서 중국 황제 중 당 태종과 명 홍무제는 비교적 익숙하다. 이 중 홍무제는 명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우리 역사에는 건국자들의 신분이 비천한 경우가 거의 없다. 삼국의 건국자들은 물론이고, 고려의 왕건, 조선의 이성계도 다 높은 신분이었다. 그와 비교할 때, 중국 역사 속 건국자들은 극적인 경우가 많다. 낮은 신분에서 중국 대륙의 주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사회적 지위에서 중국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 주원장(명나라 홍무제)이다. 그런 배경이 그에게는 장점이자 단점이 되었다.

1. 백성의 고통을 잘 알았다.

주원장은 16살 때 전염병으로 부모와 두 형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절에 들어갔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홍건적에 합류하게 된다. 너무 힘든 나날을 보냈던 그는 백성의 아픔을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구려 때 농사를 짓던 을파소가 고국천왕에 의해 재상으로 발탁된 후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해 주는 진대법을 실시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원장은 백성에게 자기 가족이 겪었던 고통을 다시 겪게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중국 황제 가운데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보며 이렇게 가슴 아파한 황제는 없었다. …. 주원장은 황궁 내에 지나치게 많은 환관을 두는 것을 반대했고, 후궁 수도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주원장은 환관에 대한 약속은 지켰지만 후궁은 40명을 두었다).” (책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폴 로프 저)

2. 모든 신하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주원장은 자신의 신하 어느 누구도 믿지 못했다. 어린 시절 너무 고생을 한 탓이었을까? 절망의 시절을 보내며 여러 사람들에게 실망을 한 탓일까? 아니면 백성들의 고생이 부패한 관리들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로부터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홍무제가 믿는 유일한 사람은 부인 마 황후뿐이었다. 하지만 1382년 마 황후가 죽자 주원장의 피해망상증은 더욱 심해졌다. 홍무제는 분노에 가득 찬 어조로 이런 글을 남겼다. “아침에 어떤 자들을 처형하면, 저녁에 다른 자들이 똑 같은 죄를 저지른다. 내가 저녁에 이 자들을 처형하면, 다음 날 아침 또 다시 위법 행위가 발생한다. 앞서 처형한 시체들을 다 치우기도 전에 다른 시체들이 그 뒤를 줄줄이 잇는다. 처벌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위법 행위는 더 심해진다.”(책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폴 로프 저)

3. 창조적으로 제도를 갖추었다.

보고 배울 것이 없는 주원장이었다. 누구를 계승하였다고 내세울 수도 없었다. 나라 이름도 심플하게 명으로 지었다. 송나라처럼 취약한 황제 권한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중앙과 지방 모두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다른 왕조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군사 제도를 실시하였다. 비천한 신분 출신의 황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전통을 답습하려 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모든 제도를 완비한 그(주원장)의 능력은 ‘근본 없는’ 신생국 명을 일찌감치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중기 이후 무능한 황제들이 속출하는데도 명 제국이 그런대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개국 초에 그가 다져놓은 각종 제도 덕분이다.” (책 ‘종횡무진 동양사’ , 남경태 저)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허프북스 #명나라 #주원장 #홍무제 #비천한 신분 #역사 #국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