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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선 출퇴근길의 비애

출퇴근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하나같이 다 젊은 부모들이에요. 20대나 독신자는 굳이 일산이나 김포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가지 않아요. 회사에서 가까운 오피스텔이나 학군이 좋지 않은 동네의 저렴한 빌라에서 살면 되거든요. 우리의 삶이 힘들어지는 건, 부모가 되는 순간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거, 굳이 책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젊은 세대가 임신 출산 육아를 포기하는 건 그들이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 김민식
  • 입력 2016.08.24 07:53
  • 수정 2017.08.25 14:12
ⓒ연합뉴스

요즘 저는 교대 근무로 일하는데, 철야 근무의 경우 오후 5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 7시 반에 끝납니다. 올림픽 중계라도 있는 경우, 밤을 꼴딱 새며 일합니다. 밤을 새운 후 아침에 퇴근하려고 상암에서 버스를 타면 자리가 없습니다. 강남 가는 광역버스를 타는데, 강변북로에서 막히면 30분을 꼬박 서서 갑니다. 그럴 땐, '아,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나' 싶습니다.

차라리 책이라도 편하게 읽자는 생각에 버스로 가양역까지 가서 9호선 전철을 탔습니다. 가양역은 종점 근처라 앉을 자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오전 8시 9호선 급행은 지옥철입니다. 앉을 자리는커녕 사람이 너무 많아 서서 가기도 힘듭니다. 중간에 앉을 자리가 나지도 않아요. 가양역에서 타면 신논현까지 쭉 서서 갑니다. 가양역부터 꽉 찬 9호선 전철을 보며, '아, 세상 사는 게 왜 이리 힘들까', 싶습니다.

'일산서 오는 버스나, 김포에서 오는 지하철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뉴스를 보고 의문이 풀렸어요. 최근 몇 년간 서울의 집세가 오르면서 시내에서 외곽으로, 서울에서 경기도로 전출한 인구가 늘었답니다. 혹 누가 일어날까 앉아 가는 이들의 표정을 열심히 살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은 듯 잠에 빠져있어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고, 모자라는 수면은 전철이나 버스에서 벌충합니다. '아, 다들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냐', 싶습니다.

환승역 맞은 편 승강장에서 기다리는 일반열차를 보면 텅텅 비어 있어요. 그런데도 다들 기를 쓰고 그 복잡한 급행에 오릅니다. 한번 문이 열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밀리고 쓰러지는 이들의 비명이 속출합니다. 보통 열차는 비어서 가고, 급행은 미어 터지고. 가양역에서 신논현역까지 급행과 일반의 시차는 겨우 13분입니다. 출근 시간 13분을 당기려고 급행에 밀고 들어오는 이들을 보며 '아, 다들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나...' 싶습니다.

문유석 님의 '판사유감'에서 소개된 책 '맞벌이의 함정'(엘리자베스 워런,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 / 주익종 / 필맥)을 읽었습니다.

하버드 법대 파산법 교수 엘리자베스 워런이 연구를 해보니, 가구 파산을 신청하는 맞벌이 중산층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1981년 파산을 신청한 미국 여성의 수는 약 6만 9000명이었어요. 그런데 1999년에는 그 수자가 50만 명으로 급증합니다. 처음엔 입력하는 사람이 실수로 0을 두 개 더 붙인 줄 알았대요. 조사해보니, 파산신청을 한 여성의 수가 실제로 662% 늘어났답니다. 이혼 등으로 혼자 사는 여성만 곤경에 처한 게 아니라 수십만 명의 기혼 여성들도 남편과 함께 파산을 신청했어요.

'최악의 재정난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자녀가 있는 부모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자녀가 있다는 것은 이제 여성이 재정파탄을 맞을 것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고지표다.

몇 가지 사실들을 검토해 보자. 우리의 연구는 유자녀 기혼 부부가 무자녀 기혼 부부보다 두 배 이상 파산신청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아이를 키우는 이혼 여성은 자녀를 가진 적이 없는 독신 여성보다 거의 세 배나 더 파산신청하기 쉽다.'

(위의 책 16쪽)

아이가 있으면 왜 지출이 늘어날까요? 엄마가 사치를 하기 때문에? 유기농 이유식을 사고, 명품 아기옷을 사고, 비싼 장난감을 사는 등 명품 소비를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소비 지표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지난 20년 사이 가계 지출이 과소비로 흘렀다는 증거는 없답니다. 가장 확실하게 늘은 지출은 바로 주택 구입 지출입니다. 맞벌이로 가계 소득이 오른 것보다 집값이 몇 배로 뛰었습니다.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우는 집의 경우, 더 좋은 학군, 더 안전한 동네로 이사하려는 경쟁에 불이 붙어 집값이 몇 배나 뛰었어요. 맞벌이를 하니 아이를 돌보기 어려워지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빚을 내서라도 좋은 학군이 있는 동네로 이사갑니다.

책에서 저자들이 강조하는 점은, 절대 집을 사기 위해 빚을 지지 말라는 점입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03년의 일이에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저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2008년의 미국의 경제 위기는 피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2008년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피할 수가 없었어요. 왜? 모두가 맞벌이 부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빚을 지고라도 더 좋은 집, 더 좋은 동네로 이사 가고 싶은 부모가...

장거리 출퇴근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하나같이 다 젊은 부모들이에요. 20대나 독신자는 굳이 일산이나 김포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가지 않아요. 회사에서 가까운 오피스텔이나 학군이 좋지 않은 동네의 저렴한 빌라에서 살면 되거든요. 우리의 삶이 힘들어지는 건, 부모가 되는 순간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거, 굳이 책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젊은 세대가 임신 출산 육아를 포기하는 건 그들이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출산 육아를 종용하기보다 아이를 키우기 더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을 만드는 게 우선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인센티브가 없는 일은 그 누구도 하지 않으니까요.

어른들은 더 좋은 학군을 놓고 경쟁하고, 아이들은 더 좋은 학교를 놓고 경쟁합니다. 경쟁 속에는 답이 없어요. 우리의 삶이 갈수록 더 힘들어질 뿐이지요. 과연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요?

'맞벌이의 함정',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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